강수화 KANG SOO HWA / 姜壽華 - 홍익대교수
1935년 ~ 1991년 함남 원산 출생
1960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졸업
< 기관경력 >
1968년-1974년 수도여자사범대학교, 성신대학교 대학원 등 강사
1970년-1971년 한국기능올림픽 위원회 심사장
1972년-1973년 대한요업학회 분회장
1972년-1991년 경희대학교 산업대학 요업공예학과 교수, 학과장
1973년-1976년 1986년, 동아일보사 공예동우회 회장
1973년-1991년 한국디자이너협의회 이사
1977년-1978년 전국대학미전 심사위원 공예분과 과장
1978년 도예가협회 창립위원
1981년 남한산요(강수화백자연구소) 소장
1981년-1986년 서울신문사 도예공모전 심사위원
1982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1982년-1983년 캐나다 마니토바 주립대 초청교수
1982년-1989년 경희대학교 교수
1983년 아프리카 가봉 공예기술 협력조사단 정부파견
1984년 한국일보 문화센터 강사
1984년-1985년 아프리카 가봉정부 파견교수
1986년 동아일보 공예동위회 회장
1987년 미국 롱아일랜드대학교 초청교수
1987년-1990년 전국 공예품 경진대회심사
< 전시 >
1971년 현대도예 초대전, 신세계 화랑
1972년~1986년 개인전 14회
1973년~1978년 한국디자이너 협의회전, 국립공보관,디자인포장센터등
1973년~1981년 백인전(8회) 신세계미술관
1973년 다완전 신세계화랑
1974년~1990년 동우회전 동아일보사
1975년 현대공예수작품전 신세계미술관 / 한국현대공예대전 국립현대미술관
1976년 백자전 신세계미술관
1977년 진사백자전 신세계미술관 / 한국현대공예 우수작품 초대전 새로나백화점
진사백자전 신세계미술관 / 제2회 전국공예작가 초대전 미술회관
1977년~197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88회전
1978년 한국현대도예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 / 진사자기전 신세계백화점
1978년 ~1983년 제1회~4회 한국도예가회전 신세계미술관
1979년 국제도예전 나고야
1980년 한일화기전 한국일보사
1981년~1986년 서울신문사 도예공모전 서울갤러리
1981년 신공예전 동경 / 세종대왕기념관전 세종문화회관
1982년~1989년 '82,'84,'85,'87,'89현대미술 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
1982년 한국미술대전 미술회관 / 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전 국립현대미술관
1983년~1991년 현대도예작가회 회원전
1985년 동아공예대전 초대전 프레스센터,서울갤러리
1986년 범세계창작도예전
1987년~1988년 서울현대도예전
1988년 제7회 서울올림픽대회 기념전 / 경희대학교 미국 롱아일랜드대학교 미술교류전
한국현대미술전 국립현대미술관
1988년~1990년 동아공예대전 및 공예동우초대전
1991년 유작전 현대미술관 '91년 서울 현대도예 비엔날레 서울시립미술관
< 수상 >
1969년 동아민속공예대전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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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보기
강수화 교수를 추모하며
지난 10월 6일 새벽 4시 강수화교수가 타계하였다는 소식을 그와 항상 같이 있던 제자
이헌국교수로부터 전해 듣고 나는 평소 그를 아끼고 가까이 지내온 선후배사이로 그 충격과
애석한 마음은 이루 무엇으로 표현할지 모르겠다.
평소 그를 잘 아는 많은 사람들은 그의 털털하고 소박한 심성의 인간성과 그의 작품세계에
대하여 아쉬워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강수화교수의 작품세계는 그의 인간성이 말하듯 그 선이 부드러우면서도 중후한 멋이 있다.
그의 청년시절 백자로 시작된 작품은 이조백자의 맥을 이어 오면서도그의 특유한 예술적
감각으로 자기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하였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누구나 다루기 쉬운 기름가마나 가스가마를 마다하고 항상 장작을 사용하는
등요를 고집한 것도 우리 도예의 전통과 맥을 이은 그의 집념이라고 하겠다.
그가 광주 산곡 시절 그는 많은 사람들과 교우하기를 좋아해서 그와 친교를 맺어온 사람으로서
그의 호탕한 성격과 서민적인 그의 소탈한 생활 그리고 그의 두주의 실력, 그의 도자기 요 옆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여기저기 통나무로 만들어 놓은 정자, 그 분위기는 도시의 때가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며 흙 냄새가 물씬 나는 가식없는 그의 성격 소박함 그대로였다.
특히 그는 이러한 환경을 만들어 놓고 여기가 좋아 그 먼 거리에서 대학을 통근하였다.
특히 그는 먹새가 좋아 대식가이며 육류도 큰 그릇에 가득 담아놓고 계곡 옆에 고기 굽는 공간을
만들어 놓고 장작 연기 냄새에 눈물 흘리며 하루 종일 구우면서 많은 사람들과 나눠 먹던 그의
성격이 그의 순수함과 대담성 그리고 큰 용기다운 그의 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대범하고 소탈하면서도 한편 예민하고 정열적인 그의 왕성한
작품의욕도 대단하였다.
그의 40대 이후부터 백자에서 진사로 넘어가면서 그의 진사 작품의 색은 우리나라 도예계에서는
그 누가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천하일품인 아주 훌륭한 선홍 진사색을 낼 수 있는
유일한 작가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의 진사색에 대하여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1981년이었다고 기억된다.
일본 나고야의 중부신문에서 4회 국제도예전에 출품할 한국의 중진작가 명을 추천해 달라고
해서 그 중 강교수도 출품하게 되었다.
이 때 일본 도예계의 명인들인 일본의 원로 중진작가 鈴木淸久, 河本五郞, 加藤五氏孝
삼인이 한국작가들을 상면하러 왔다.
이 때 여러 작가를 만난 후 강교수 요장에 가게 되었다.
그들은 강교수의 작품 상설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무릎을 치며 자기들이 한국의 많은 작품을
보았지만 이제야 내가 보고 싶은 작품을 보게 되었다고 기뻐하며 강교수와 작품에 대하여
이야기하던 그들의 모습이 선하다.
특히 그들 중에서 鈴木氏는 자기도 진사를 잘 다루는 작가로서 그의 말에 의하면 강교수의
진사색은 대만의 고궁박물원에 있는 중국 송시대의 진사색에 버금 간다고 기뻐하며 한국에
이러한 작가가 있을 줄 몰랐었고 서로 만나게 된 것을 무척 기뻐하였다.
그 이후 이들은 작고할 때 까지 강교수와 교류하였다.
강교수의 진사작품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의 정열이 숨쉬고 있는 듯 하며 또한 그의 작품의
형태는 그의 체격에서 보듯이 항상 넉넉하고 원만하며 중후한 멋이 있다.
화를 잘 내지 않고 친우들에게 폐 끼치지 않으며 언제나 웃는 얼굴로 친지들과 교우하던 그의
모습이 바로 눈 앞에 있는 것 같다.
금년 들어 그는 유난히 작품에 정열을 쏟았고 매일 학교 연구실에서 숙식을 하면서 밤
세워가며 작품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더욱이 그는 대학시절 회화과를 나왔으므로 금년 틈만 나면 부쩍 수채화 작품도 많이
그리고 11월 초 개인전 준비도 활발하였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에 의하면 그 생애의 전력을 이번 작품준비를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 세상에 없다.
그러나 그가 생을 받쳐 올린 그의 작품이 있으며 그 작품 속에 강수화의 인산성과 그의 예술이
있으며 그의 정열과 그의 혼이 있다.이제 그는 갔어도 그의 작품은 남아있다.
또한 그의 작품 속에 그의 정신은 살아있고 그를 이제는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없어도 그의
작품을 통하여 그의 예술세계와 작가정신을 이해하고 대화하고자 한다.
강교수가 평생 다 못한 예술세계를 강교수가 지도한 많은 제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강교수의 예술세계와 그의 업적이 영원하기를 소원한다.
1991. 11 한양대학교 산업미술대학장 박 대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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