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도예가

세창世昌 김세용 - 세창도예연구소

썬필이 2019. 9. 14. 23:15

世昌 김세용
<약력>
1966 도예입문
1978 세창도예연구소 설립
1981 제 6, 11회 전승공예전 입선.
1982 제 12, 13, 14, 16회 공예품 경진대회 특선 및 입선
1984 제 7회 국제 현대 미술제전 도예부 대상.
1985 저서 『전통기법을 재현한 도자기 공예』(한림출판사)
1986 평화통일 문화제 국제 예술상. / 한국 요업총협회 창립 50주년 제품상.
1997 97‘도자기 공모전 금상. (문화체육부)
1999~00 청강문화산업대학 전임초빙강사.
1999 명지대 산업대학원 도자기 기술학과 수료.
2001 세계도자엑스포 국제도자 워크샵 및 작품전
2002 대한민국 명장 선정(02-22호) / 프랑스 파리 한국문화원 도자초대전 '전통과 현대의 만남'
2003 기술과 디자인의 만남 (예술의 전당)
2004 일본 시네마현 초청 대한민국 명장전 /  중국 경덕진 도자 천년제 초대전
2005 아이치 국제박람회 한국대표작품 선정 /제12회 대한민국 명장전(AT센터) 
       전통공예명품전(갤러리 라메르), 도자기,색과 기술의 만남 (예술의 전당) 
       제3회 세계도자비엔날레 도자퍼포먼스 초대작가
2006 제1회 개인전 “흙에서 빛으로” (세계도자센터,이천)  
       전통공예대전 (부천시청, 무형문화재전수회관)
2007 From the Tea ceremony To the contemporary Ceramic expression
          (collection-baur, Geneve, swiss)
2009 대한민국 명인명장 박람회(코엑스, 서울)
2010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한국도자 천년제
2012 대한민국명장 심사위원
2017 대한민국문화훈장 화관장
<주요작품소장>
영국 엘리자베스여왕, 달라이 라마 왕궁, 청와대, 경기도 세계도자기엑스포
국립동양박물관 (로마, 이탈리아), 컬렉션 보르 (제네바, 스위스) 등   
주소 :경기도 이천시 신둔면 원적로290번길 218(수하리 214-3) / 031-632-7712
세창도예 연구소는 5천년 민족문화예술의 상징이며 민족의 긍지요 자부심인 고려청자를 
이대를 대표할 수 있는 청자로 승화시켜가는 곳입니다.
세창에서 개발하여 작품화한 여러가지 문양의 2중투각 작품들은 청자의 비취색과 섬세하고 
세련된 도공의 손과 가슴으로 빚어져 미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으며 상감기법을 응용한 작품들과 
양각,음각,퇴화문기법등 다양한 기법으로 제작한 청자들은 세창의 자랑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자랑이라고 확신합니다.
2002년 9월 한국산업인력공단으로부터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김세용 명장
세창도예연구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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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보기

한국의호랑이 002
청자운학문 다완
청자 주판알 국화문도자기 넓이 28.0 높이 17.0cm
청자대나무운학문 주병 높이 28.0cm
청자 용문 매병 높이:40.0cm 제품가:1,800,000원
청자흑백상감운학문다기세트
청자흑백상감 운학문매병 높이 25.0 지름 16.0 입지름 5.0 밑지름 10.0cm

- 대한민국 명장 도예가 김세용 - 경기도 세계도자비엔날레 관련 - 2009.04.30
사람이 한평생 한길을 걸어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가슴에 한번 불이 댕겨진 기억은 쉽사리 잊히지 않는법.
이런 이유로 평생을 운명과도 같이 하나만 바라보며 사는 사람도 있다.
김세용 선생과 도자기가 바로 이런 사연으로 얽힌 경우다.
“벌써 40년이 넘은 기억이네요. 고등학생 시절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다가 처음으로 
도자기를 봤어요. 그때 본 도자기가 무척이나 인상 깊었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 짜릿한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 이랄까요.
수많은 도자기중 고려청자가 유독 그런 기운이 강했습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희열과 감동을 받았죠. 
그날 이후로 무작정 청자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도공이 되기로 결심한 이후 이천으로 거처를 옮겼다.
1970년대 초 전기도 없고 모든 환경이 열악했던 시절, 남의 밑에서 일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청자를 만들어야 한다는 굳은 의지가 있었다.
낮에 일하면서 배우는 것 만으로는 실력이 생각만큼 늘지 않아 저녁에 홀로 도자기를 만들었다.
호롱불을 켜놓은 채 점토를 빚고 문양을 새겨나갔다.
그러다 보면 밤은 이내 지나가고 동이 터오게 마련.
그렇게 정신 없이 밤을 지새운 날 아침에는 영락없이 콧구멍이 까 매졌다. 
호롱불의 그을음 때문이었다.
기계시설이 없던터라 유약 만드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맷돌을 직접 돌려야 하기 때문에 손바닥이 부르트기 일쑤였다.
그래도 힘들다는 생각 보다는 재미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도자기를 알면 알수록 그 매력에 점점 빠져드는 그런 시간이었다.
도자기를 접하고 나서 7년이 흐른 후 김세용은 또 다른 큰 결심을 했다. 바로 독립이었다.
주변에서는‘무모하다’는 말을 건넸지만 단 한 사람 아내만은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
아내는‘실패도 젊었을 때 해야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며 든든한 지원군이 돼주었다.
도예 작업을 하다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된 아내는 일에서나 일상생활에서나 그에게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사람이다.
창업 이후 절망적인 순간도 있었다.
“1982년 무렵이었어요. 2년 동안 단 한 개의 작품도 만족스럽게 만들지 못했죠.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오지 않아 만든 도자기마다 모두 깨뜨렸어요.
정말 좌절할 뻔했는데 그때도 아내는 제 옆에서 큰 힘을 줬어요.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에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오히려 ‘밥을 잘 먹어야 힘이 나서 더 좋은 
도자기를 만들 수 있다’며 정성 가득한 밥상을 매끼 차려줬죠. 정말 고마운 사람이에요.”
아내의 응원 덕에 그는 이시기를 절망에서 희망으로 이끌어냈다.
많은 실험과 노력을 거친끝에 흙과 유약,불에 관해서는 전문가가 됐다. 오히려 도자기 만드는 
기술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을 한 시기였던 셈이다.
어느새 훌쩍 커 버린 아이들도 선생 곁을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서른을 넘긴 딸과 아들은 아버지의 솜씨를 그대로 이어받아 도자세계에 몸을 담갔다.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청자를 만들고 딸은 찻잔과 밥그릇, 국그릇 등 생활자기를 주로 만든다.
김세용선생은“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도자기를 만드는 부모를 봐와서 그런지 도자기 만드는 것이 
몸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졌다”며 “이곳을‘세창도예’라 이름을 짓게 된 것도 내 이름과 아들이름
(김창묵)의 가운데 글자를 딴 것” 이라며 아들이 가업을 잘 이어나갔으면 하는 바람을 내비쳤다.
김세용선생은 유독 청자만을 고집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
“처음에는 백자와 색자, 분청 등 여러 가지 작업을 했죠. 모두가 각각의 특징과 성품을 갖고 있고 
풍기는 매력도 천차만별이에요. 청자의 매력은 세련미와 귀족미, 빈틈없이 완벽한 
멋스러움에 있어요.
제 성격과도 아주 비슷하죠.
디자인에 있어 그리는 것보다는 조각을 더 많이 하다 보니 작업속도는 더딘 편이에요.
인내력과 지구력이 많이 필요하죠.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 몇 달이 걸리는 것은 기본이에요.
이런 부분이 저한테는 큰 매력으로 다가왔죠.”
청자의 다양한 조각 기법 중 김세용선생의 주특기는 이중투각이다.
이중투각이란 속에 도자기를 성형하고 겉에 다시 성형한 도자기를 덧대 무늬를 넣는 것으로 
작업자체가무척 까다롭다. 그는“이중투각은 가장 정교하고 섬세하며 아름답다.
반면 작업과정이 더디고 성공확률이 낮아 상품가치로 따져 봤을 때는 잘 팔리지 않는 
작품이다”라며 “남들이 잘 안 하려고 하는 기법이라 내가 잘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도
전했다”고 말했다.
도자기를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과정은 불에 굽는 과정이다. 
그래서 가마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작품을 구상하고 흙을 반죽하고 정성스레 조각을 해도 불을 거쳐 나왔을 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미련 없이 깨지는 게 도자기의 운명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도자기를 깨뜨린 과정들이 고정관념이 아니었나 싶어요.
처음 도자기를 접하면서 스승께 제일 먼저 배운 것이 깨뜨리는 철학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죠.
내 손을 거쳐 모두가 정성이 깃들지 않은 것이 없는데 조금 비뚤어졌다고 깨뜨려 버릴 만큼 
도자기가 가치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불 속에서 자연스러운 변화를 거쳐 만들어진 작품이고, 각자의 색깔을 지닌 도공의 혼이 깃든 
생명력을 가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자식과도 같은 수많은 청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에 대해 묻자 김세용선생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눈가가 촉촉해진다. “제 원래 고향이 개성 아래에 있는 장단이란 곳이에요.
6∙25 때 강제로 피란을 오게 됐고, 아버지는 이후로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며 사셨죠.
제 작품 중에‘금강산 문’이라 이름을 붙인 매 병∙주병 1쌍이 있는데 저의 분신과도 같아요.
원래는 생전에 고향에 너무나도 가보고 싶어하신 아버지를 위해 만들었죠.
도자기로 금강산을 만들어 보여드리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완성된 작품을 보지 못하고 작고하셨죠.
‘사부(思父)도자기’라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김세용 선생의 인생철학은 도공이 지녀야 할 마음가짐과 일맥 상통한다.
인내와 지구력을 가지고 버티는 것,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
그는“요즘 젊은이들은 쉽게 빨리 많은 것을 한번에 추구하려 한다. 그만큼 포기도 빠르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다”라며 “그런 면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일은 
천천히 오래 기다리는 법을 알게 해준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전통문화를 발전시키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도 참 뿌듯한 일” 
이라고 말했다. 도자기를 통해 삶의 의미를 깨우쳤다는 말도 덧붙인다.
“도자기란 내 수행의 방편이에요. 처음 시작할 때도 그랬고, 지금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쭉 그럴겁니다.
도자기를 빚는 과정을 통해 내 몸과 마음을 단련시키고 정화시키죠. 사람에게는 각자의 
사명감이 있어요.
바로 자신의 혼을 진화 시키라는 의미죠. 제게는 그 진화의 과정 또한 도자기를 만드는 것이에요.”
청자를 만들어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무작정 찾아 든 이천. 이곳에 머문 지도 어느새 40년 
세월이 훌쩍 흘렀다.
이천이 도자기 고장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 것은 요장이 많이 위치한 까닭도 있지만
김세용선생은 이에 한가지를 더 말한다.
도자기는 지(땅), 수(물), 화(불), 풍(바람), 공(에너지)의 5가지 원리로 만들어지는데, 이 요소들이 
적절히고루 녹아 있는 곳이 이천이라는 것.
도자기는 불을 거쳐 흙에서 조각으로 재탄생한다.
새 생명을 얻은 도자기는 각자 자신만의 파장을 갖고 숨을 쉰다.
도자기를보면 작가의 숨결을 느낄 수 있고 마음 또한 전해진다. 한마디로 좋은 조건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는 그만큼 멋스러울 수 밖에 없다.
이천의 도자기가 세계 최고의 도자기들과 견줄 수 있는 데는 이런 배경이 존재한다.
세계도자비엔날레를 기다리는 김세용선생의 마음은 설레는 한편 각오로 비장하다.
“이천이 도자기의 본고장으로 국내는 물론 세계에 알려지는 중요한 계기예요.
국내관광객에게는 세계도자기와 현대도자기를 두루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죠.
바라는 점이 있다면 우리나라의 전통도자기를 좀 더 많이 전시했으면 해요.
외국관광객에게 고려청자, 조선백자, 분청 등을 마음껏 자랑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야죠.
고려청자는 우리나라가 세계 으뜸입니다. 더 많이 알리고 보여줘야 해요.” 
아울러 경기도에도 한마디를 전했다.
“무형문화재지정을 활성화해 예술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꾸준히 보존하고 키워야 해요.
경기도가 특히 도자기도시로서의 명성을 이어가려면 이런 제도가 꼭 필요합니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보존, 계승, 발전시키는 것 또한 국가 및 지역의 경쟁력을 키우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꼭 알아줬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