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 이야기

한국다완의 미감 4)이도다완의 아류

썬필이 2018. 3. 2. 00:27

“오사카城과도 바꿀 수 없다”… 日 무사들 애착이 수많은 모작 낳았다
몇 해 전 일본인 고미술품 컬렉터 유족이 ‘추철회시문다완(萩鐵繪詩文茶碗)’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적이 있다. 17세기 초에 만들어진 하기야키(萩燒) 다완으로 
노란색 표면에 붓글씨가 한글로 유려하게 쓰여 있어 눈길을 끌었다.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 하기야키 도공이 쓴 것이다.
하기야키는 1593년 나가토노쿠니의 번주(藩主)였던 모리 데루모토에 의해 납치된 이작광·이경 
형제가 하기 지방에서 구운 도자기다.
이들 형제는 경남 진주성 근처 도자기 가마에서 대대로 도자기 비법을 이어온 
사기장의 후손이었다.
모리 데루모토는 이도다완의 가치를 알아본 일본의 다성(茶聖) 센리큐의 제자로, 1625년 이경을
‘고라이자에몬(高麗左衛門)’이라는 이름으로 사무라이에 임명했다.
하기 도자기의 도조(陶祖)인 이경이 만든 이도다완은 오늘날까지 전해 오고 있다. 

한글 붓글씨가 쓰여 있는 17세기 하기야키 ‘추철회시문다완’. 지름 13㎝, 높이 10.6㎝.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추철회시문다완과 이경이 만든 이도다완 모두 비파색을 내기 
위해 억지로 노란  화장토를 입혀 구웠다는 점이다. 
이는 분명히 하기 도자기가 이도다완의 비파색을 의식해서 제작되었으며,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하기 지역에서 조선 도공이 이도다완을 만드는 흙과 유약을 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특히 추철회시문다완에는 조선의 북방 지역 도공의 도자기 기술이 쓰였는데, 이는 굽 주변에 
유약을 입히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기간(1592∼1598)에 일본에 납치된 도공들은 번주로부터 특별한 대우와 
보호를 받았고, 에도 시대(1603∼1867)에는 사족(士族)에 준하는 신분을 유지했다.
이는 번주들이 영지 안에서의 도자기 제작으로 자신들이 갖고 싶은 도자기를 확보했을 뿐 아니라 
도자기 생산으로 영지 내 산업 부흥을 꾀했기 때문이다.
1605년 일본 아리타(有田) 도자기의 도조인 이삼평이 아리타 이즈미야마(泉山)에서 백토를 
발견하고 최초로 일본 국산 자기를 생산하며 기록한 연호명이 ‘대명성화년제(大明成化年製)’이다.
중국 명나라 헌종(憲宗) 성화 연간(1465∼1487)에 만들어진 도자기를 모방한 것이다.

16세기 무안 반덤벙다완. 지름 16㎝, 높이 8㎝, 무게 388g.

16세기 후반 일본에서 유명 다완은 하나에 쌀 1만석에서 5만석의 값어치가 있었다.
당시 무사들은 이도다완에 무섭게 집착했고, 쓰쓰이즈쓰(筒井筒) 이도다완은 일본 오사카성과도 
바꿀 수 없다고 했을 정도다.
1603년 일본 다인(茶人)들 사이에서 왜구 마쓰라토(松浦堂)에게 납치된 조선 도공들이 만든
가라쓰야키(唐津燒) 차도구가 크게 유행했다. 일본에서 다완 수요 증가와 함께 조선 도자 형태의
다완이 대량 생산됐다.
특히 1930년대 이후 이도다완을 재현한 하기류(萩流) 이도다완이 각광을 받았다.

17세기에 만들어진 고키다완. 지름 14.5㎝, 높이 8.7㎝, 무게 336g, 굽 높이 1.8㎝.

20세기 초 일본에서 재현된 이도다완을 본받아 우리나라에서 재현한 이도다완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16세기 이도다완에 비해 경질이다.
16세기에 만들어진 이도다완은 연질로 물을 흡수하여, 차를 마신 다음 씻어서 종이에
싸놓으면 종이에 습기가 차서 하루에 한 번씩 대략 사흘 정도는 바꿔줘야 된다.
연질 또한 이도다완의 비파색, 매화피 못지않게 재현하기 어렵다. 어느 현대 도예가는 연질 
효과를 얻기 위해 가마에서 두 번 굽지 않고 한 번만 구워 ‘재현 성공’이라고 꼼수를 부릴 정도다.
17세기에 만들어진 고키(吳器)다완은 이도다완과 유사한 태토와 유약을 썼으나,
형태와 질감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다.
도토야(斗斗屋)다완은 이도다완 따라 하기의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중국 4대 미녀로 꼽히는 서시(西施)가 병이 있어서 눈썹을 찡그리며 아픔을 참으니, 
여인들이 이를 보고 아름답다고 여겨 흉내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처럼 도토야다완의 굽 주변을 보면 이도다완의 매화피가 떨어져 나간 것을 보고 따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도다완의 매화피는 유약이 물방울처럼 송글송글 맺히거나 갈라져 태토에 바짝 들러붙은 것과
태토와 유약 사이가 숭숭 뚫려 투각처럼 떠 있는 것도 있다.

몸통에 까슬까슬 부분이 있는 오목백자잔. 지름 7㎝, 높이 6.5㎝.

매화피가 오랜 세월 사용으로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가거나, 사무라이의 손아귀 힘에 뚝뚝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그 자리가 까칠까칠하게 남아 있다. 
이를 흉내 낸 것이 도토야다완 굽 주변의 까슬까슬한 부분이다.
일본 다인들은 이를 참나무 표고버섯의 우산살 같이 갈라진 속 부분과 흡사하다고 표현한다.
다완의 품격에서 도토야다완은 이도다완 다음으로 평가되고 있다.
까슬까슬한 표피는 다완이나 찻잔을 손으로 잡는 데 기능적으로도 편리해 한때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도다완의 얇은 그릇 두께는 16세기 전라남도 지역에서 생산된 반덤벙다완 그릇 두께에서 
보듯 조선 도공의 다완 제작 기술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하게 해 준다.
임진왜란 이후 납치된 조선 도공들은 일본 규슈(九州) 지역에서 흙, 유약, 가마 등의 차이를 
극복하고 조선의 우수한 다완을 재현하려 노력했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일본은 1639년부터 도공, 흙, 땔감 등을 얻어 김해·양산·부산 등지에서 일본 
다인들이 요구하는 주문 다완을 만들었다.
일본인들이 우리 조선 다완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좋아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에서 20세기 초에 재현된 이도다완. 지름 15㎝, 높이 7㎝, 무게 314g.

여전히 누군가는 말할지 모른다. “이도다완이 뭐가 그리 대단하냐. 막사발에 불과하다.
일본인이 요란을 떠는 것이다.”
이도다완은 센리큐 등 일본 다인들이 좋아해서 대단해진 것이 아니다.
이도다완은 본래 최고의 가루차 다완이었던 것이다. 다만 그동안 우리가 그것을 몰랐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