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청자 가마터
고려시대 초기의 청자가마는 지방호족의 영향아래 전라도 일대, 충청도, 경기도, 개성 인근의 황해도 등지에
다양하게 분포했다. 그러나 고려 왕권이 강력해지고 정치 제도가 완성되는 11세기 후반부터는 차츰 전라남도
강진(康津)과 전라북도 부안(扶安) 일대로 집중되었다.
12세기 이후에는 이 두 지역 이외에 고급 청자는 거의 제작되지 않았다.
고려 청자의 뛰어난 솜씨를 말해주는 청자는 모두 이 곳에서 만들어졌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강진의 대표적 청가 가마터가 있는 대구면 사당리(大口面 沙堂里) 가마터는 1910년부터 알려졌으나 본격적인
발굴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1965년부터 이뤄졌다.
이곳에서는 청자기와 조각이 확인됐을 뿐 아니라 12세기를 대표하는 비색 청자와 상감청자의
파편이 다수 발굴됐다.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保安面 柳川里) 가마터는 강진 사당리 가마터와 함께 12세기 절정기의 청자를 굽던
가마로 인근에 40여개의 가마터가 있었다. 현재는 대부분 논밭으로 개간돼 그 흔적 조차 확인하기 어렵게 됐다.
하지만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이곳에서 발굴된 도자기 파편은 이화여대박물관에 다수 소장돼있다.
관영으로 운영되던 강진과 부안의 청자 가마는 14세기 후반이 되면 고려 왕조의 쇠퇴와 함께 맥이 끊기게 된다.
이 무렵 청자 기술자들이 전국으로 흩어졌는데 약 50여년 뒤인 세종때 조사한 기록(세종실록지리지)을 보면
당시 전국 3백여곳에 자기소와 사기소가 있는 것으로 전한다.
중국의 고려청자 평가
과거 세계 최고의 도자기 제조기술을 보유했던 중국도 고려청자만큼은 그 수준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당시의 자료로 널리 인용되는 것 중 서긍이 지은 『선화봉사 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과 송나라
태평노인이란 사람이 지은 『수중금(袖中錦)』이 있다.
『선화봉사 고려도경』은 1123년(인종 1년) 여름 송나라 사신의 수행원으로 고려에 온 서긍(徐兢)이 약 한 달간
송도에 머물면서 보고들은 내용을 적은 보고서이다.
여기에 당시 고려의 청자에 대한 언급이 세 군데 나온다.
1) 그릇은 금이나 은으로 도금한 것이 많고 청자는 귀하게 여기고 있다.
(器皿多以塗金, 或以銀, 而以靑陶器爲貴)
2) 도자기 색이 푸른 것은 고려 사람들이 이를 비색이라 부른다. 이는 근래 제작이 매우 정교해졌으며 색과
윤택이 몹시 뛰어나다.
술 담는 항아리는 참외 모습을 띠었는데 위에 뚜껑이 있고 연꽃 위에 오리가 엎드린 형태를 띠었다.
또 완, 접시, 술잔, 사발, 화병, 탕잔도 잘 만들었는데 모두 (중국) 정요의 그릇을 모방했으므로
생략하고 그리지 않는다*.
술 항아리만 다른 것과 다르므로 특별히 이를 나타낸다.
(陶器色之靑者, 麗人謂之翡色, 近年以來, 制作工巧, 色澤尤佳, 酒尊之狀如瓜, 上有小蓋,
面爲荷花伏鴨之形,復能作盌葉杯甌花甁湯琖,皆竊放定器制度, 故略而不圖, 以酒尊異於他器, 特著之.)
*고려 도경은 일부 내용에 대해 그림을 그려 설명하기도 했기 때문에 여기에 그린다는 말을 사용했다.
현재 서긍이 그렸다는 그림은 전하지 않는다.
3) 사자모양 향로 역시 비색이다. 위는 쭈그려 앉은 짐승처럼 돼있고 아래는 벌어진 연꽃이 이를 떠받치고 있다.
여러 기물 가운데 이것이 가장 정교하고 절묘하다.
그 나머지인 즉 (중국) 월주가마의 옛 비색이나 (중국) 여주의 새로운 가마에서 구운 그릇과 대개 비슷하다.
(狻猊出香, 亦翡色也, 上爲蹲獸, 下有仰蓮以承之, 諸器惟此物最精絶, 其餘則越州古秘色,
汝州新窯器, 大槪相類)
또 남송시대의 수장였던 태평노인이 『수중금(袖中錦)』에는 천하 제일의 물건을 나열한 대목이 있는데 거기에
고려청자가 들어가 있다.
監書, 內酒, 端硯, 洛陽花, 建州茶, 蜀綿, 定磁, 浙漆, 吳紙, 秦銅, 西馬, 東絹, 契丹鞍, 夏國劍, 高麗翡色,
興化軍子魚, 福州荔眼, 溫州掛, 臨江黃雀, 江陰縣河豚, 金山劍鼓, 簡寂觀苦荀, 東箤門把鮓,
京兵, 福建出秀才, 大江以南士大夫, 江西湖外長老, 京師婦人, 皆爲天下第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