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일본 초암의 역사

썬필이 2019. 10. 8. 11:05

일본 초암의 역사

서원차에서 초암차로의 변화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차실의 건축 방법과 차실

내부의 구조입니다.
초암차실(草庵茶室)이라 할 때의 ‘茶室’이라는 명칭은 일본 근세 초기 기록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말입니다.

다도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스키야(數奇屋)’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스키야가 곧 초암차실을 뜻했지요.
초암차실 건축 양식은 일본의 근세 주택 양식인 ‘스키야 풍(風) 건축’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했을 만큼 일본

건축 문화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스키야 풍 건물’이라 함은 초암차실이 지닌 소박한 아름다움을 서원 형식의 일본 고유 건축 양식 속으로 끌

어들인 것을 말합니다.
초암차실은 매우 소박한 초가입니다.

이는 서양 건축과도 전혀 다르지만 일본 고유의 건물과도 현저하게 다른 건축 양식입니다.
일본 고유의 이름있는 건축물들은 그 쓰임새가 종교적인 것이든 세속적 필요에 의해 지어진 것이든 간에

웅장한 규모를 지닌다는 것이 특징이지요.
그런데 초암차실이 나타난 뒤로 서민들의 집은 물론 일본의 모든 건축물에까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건축 문화의 변화는 구체적인 사회변동이 원인이 되어 나타나게 되는 것이 보통인데, 일본의 전통 건축 양식과

다른 양식이 시대의 거부나 저항 없이 자연스럽게 등장했다는 것은 사회 문화적 원인이 있었음을 뜻하겠지요.
그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이 조선에서 유입된 문물이었습니다.

건축 양식에 대한 새로운 미의식이 필요해지고, 그같은 미의식이 반영된 건축물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이 뒤따라야만 합니다. 시간이 필요한 문제지요.
이렇듯 일본의 건축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초암차실이 완성되기 까지는 크게 세단계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무라타 슈코의 초기 실험 단계, 다케노 쇼오의 중간 정리 단계, 센노 리큐의 최종 완성 단계가 그것입니다.

앞의 세 사람이 초암차실과 초암차를 정립시키는데 걸린 시간은 약 130여년이 됩니다.
세 단계로 이루어진 변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초기 실험 단계를 시작한 무라타 슈코는 나라(奈良) 출신으로서 쇼메이지(稱名寺) 승려였습니다.

그곳에서 당대 최고의 차인이라는 노아미(能阿彌·1379~1471)를 스승으로 차를 배웠지요.
그때 노아미는 도호슈(同明衆)라는 직책을 지니고 있었는데, 장군의 측근에서 예능, 잡역을 맡아 하는

직책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장군가(家)에서 수집한 미술품을 감정, 관리, 장식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지요.

그 과정에서 차도의 예법을 세련되게 정리하는 공헌을 세워 서원차를 확립시킨 인물이기도 합니다.
무라타 슈코도 차도를 즐겼지요. 점점 깊이 빠져들어 나라류(奈良流)라는 토유차(鬪茶) 놀이에 탐닉했습니다.

절에서의 수행을 게을리 할 수 밖에 없었지요.

마침내 절에서 추방되어 방랑생활을 했습니다.

25세 때 교토 변두리에서 집을 짓고 차 농사도 하고 사람들에게 차도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