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웅천왜관의 日승려

썬필이 2020. 3. 12. 22:30

웅천왜관의 日승려

왜관이 설치된 부산, 웅천(내이포), 울산(염포) 세 곳에는 일본 사찰이 속속 들어 섰지요.

사찰에는 일본 불교를 대표하는 다이도쿠샤(大德寺), 엔랴쿠지(延歷寺), 네고로지(根來寺), 일향종(一向宗)외

혼간지(本願寺)에서 경쟁적으로 승려를 파견하여 조선의 문물을 일본으로 빼내 오도록 했습니다.
[김시습이 일본승려 준을 만났던 경주 남산 용장사지의 삼륜대여래좌상.]
이 사찰들은 삼포 안의 사찰을 장악하기 위한 암투를 벌였지요.

가장 절이 많았던 웅천(내이포)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막부정권의 세력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웅천에는 항상 열 개 이상의 사찰에 50명 정도의 일본 승려가 상주했을 만큼 일본 정부와 불교 세력들이

눈독을 들였던 곳이었습니다.
1423년부터 임진왜란까지 169년 동안 웅천 일대는 왜관의 일본인들의 땅이었습니다.

웅천은 매우 낙후된 곳이어서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았습니다.

조선정부가 일본에게 왜관을 허락하면서 웅천을 지정해 준 것도 그곳이 별로 알려진 곳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웅천이 역사적으로 중요성을 갖게된 것은 웅천왜관이 들어선 이후 일본인들의 활약 때문이었지요.

조선의 눈길이 그다지 미치지 않는 곳임을 간파한 일본 승려들이 웅천에다 경쟁적으로 절을 짓게 되면서부터

웅천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과의 무역상들도 자연히 웅천을 선호했고, 임시 체류자와 일본 국왕사들도 웅천을 주로 이용했습니다.

웅천은 가히 일본인의 땅처럼 변해갔지요.
숫적으로 절대열세인 조선인들은 왜관의 일본인들에게 경제적인 종속과 함께 머슴같은 처지로 전락했지요.

이같은 사실은 1455년 7월 경상도 관찰사 황수신이 세조에게 보고한 기록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일본 국왕사의 주축을 이루는 승려들은 조선에 설치되어 있는 삼포의 왜관에 미리 와서 생활하는 승려들로부터

여러 가지 정보를 얻었습니다.

초기에는 조선에서 쌀, 콩, 면포를 그들이 가져온 구리와 바꿔서 가져갔지만, 1450년 이후 일본에서

선종(禪宗)이 크게 유행하자 조선의 대장경과 범종을 구해가는 것으로 양상이 바뀌었지요.
일본 불교에서 선종이 유행하게 된 이유도 일본국왕사로 왔던 승려들에 의하여 조선의 선불교 문화가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웅천에 있는 왜관의 사찰에 사는 승려들 중에는 조선말을 배워서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은 물론 조선의

풍속과 지리에도 밝아서 조선인 복장을 하고 조선 전역을 누비고 돌아다닌 자들이 더러 있었다는 기록이 조선의

여러 개인 문집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조선으로 귀화하여 조선 여자와 혼인한 자도 생겼지요.

그런 자들이 수집한 정보는 일본국왕사로 온 승려들에게 고스란히 넘겨졌습니다.
김시습이 경주 금오산 용장사(茸長寺)에 칩거하며 ‘금오신화’를 집필하고 있을 때 김시습을 찾아왔던

일본 승려 준(俊)을 주제로 한 시가 있습니다.
‘고향을 멀리 떠나니 뜻이 쓸쓸도 하여
옛 부처 산 꽃 속에서 고적함을 보내누나.
쇠 차관에 차를 달여 손님 앞에 내놓고
질화로에 불을 더해 향을 사루네.
봄 깊으니 해월이 쑥대 문에 비치고
비 멎은 산 사슴이 약초 싹을 밟는구나.
선의 경지나 나그네 정 모두 아담하나니
밤새 오순도순 이야기할만 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