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매월당의 차법

썬필이 2020. 3. 27. 12:31

매월당의 차법

준초(俊超)라는 이름 위로 준식(俊識), 준혜(俊慧), 준관(俊寬)이 나오는데, 준씨 승문의 대통을 잇는 계보라고

해석 됩니다.
[무라타 슈코가 사용한 일명 슈코 청자차완의 뒷 모습(높이 5~6㎝, 입넓이 13㎝).]
준씨는 11세기 초부터 등장합니다.

일본 역사에서 11세기는 매우 탁월한 능력을 지닌 극소수의 승려들이 송나라로 유학을 가서 중국의 선불교를

배우고 돌아와 일본에다 중국 차(茶)문화를 처음 소개한 시기였습니다.
중국과의 교류는 무엇보다 먼 거리 때문에 빈번하기 어려웠지요. 그 대신 중국과 진배없는 조선의 불교와 차

문화를 배우는 것이 훨씬 쉽고 부담도 적어서 일본 승려들의 조선 여행이 잦았던 것이지요.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승려들이 조선의 불교와 차 문화를 체험하고 돌아갔지만 그들의 체험이 일본 차도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데는 그들의 기존 인식을 변화시킬만한 강렬한 특징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이미 그들은 원효의 무애차에서 비롯된 농차문화를 만든 뒤였고, 무애차에서 느껴지는 소탈하고 질박하며

자유분방한 멋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볼때 매월당은 외국인의 눈에 매우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인물이었겠지요.

더욱이 그가 울산, 웅천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경주 지방에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은 일본 승려들에게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겠지요.
‘준초’가 매월당을 찾아갔을 때 매월당은 스스럼없이 낯선 나그네를 맞아 주었고, 마치 오랜 친교를 가져온

사이처럼 매월당풍의 차를 대접했을 것입니다.

그때 준초나 통역으로 따라간 왜승, 혹은 동행한 승려들 모두의 눈에 비친 매월당의 차법(茶法)과 방안의

모습은 퍽 인상 깊은 이국의 풍물이었겠지요.
일본 승려인 준초가 김시습을 찾아왔을 당시의 일본은 지나치게 엄숙하고 사치스러운 서원차(書院茶)가

유행하고 있었는데, 무로마치(室町)막부의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1435~1490) 때에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무로마치 막부 앞 시대였던 가마쿠라(鎌倉)막부 때는 선승(禪僧) 중심의 차 문화였지요.

그러다가 무로마치 막부 시대가 열리면서부터 차 문화를 이끌게 된 것은 무가(武家)와

상업자본가들이었습니다.

사무라이들의 근엄하고 권위적인 취향과 상업자본가들의 과시욕이 경쟁적으로 작용하여 서원차가

풍미하게 된 것입니다.
화려하고 귀족적인 호화판 차회(茶會)가 빈번해지면서 소비풍조가 만연하고 폐해가 쌓여 갔습니다.

서로의 차와 차완을 자랑하고, 품격과 값을 경쟁하던 나머지 도박으로까지 번졌으니까요.
집권자 요시마사는 병폐가 깊어져 가는 서원차 문화를 바꾸고 싶어했지만 그럴만한 계기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 무렵 간소하고 조용하며 서민풍이 느껴지기도 하는 이색적인 차법을 선보인 것이

무라타 슈코(1422~1502) 였습니다.

그는 대덕사에서 차와 선(禪)을 일치시키는 수행으로 당대의 이목을 받는 승려였습니다.

나이 예순 살을 넘기면서 더욱 더 고요하고 깊은 선열(禪悅)을 느끼게 하는 그의 독특한 차 세계는

서원차의 폐해를 치유시킬 수 있는 대안으로 떠오르게 되었지요.
요시마사의 서원차와 관련된 정치적 고뇌를 곁에서 지켜보던 노아미(能阿彌)는 요시마사에게 차를 가르친

사람이었는데, 슈코 선사의 차법이 지닌 여러 가지 특징과 무라타 슈코를 요시마사에게 직접 소개시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