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제목 : 허상욱 개인전 <수수생춘隨手生春>展
전시기간 : 2023-04-14(금) ~ 2023-05-12(금)
전사장소 : 갤러리완물(서울 강남구 청담동 30-2)
손으로 빚어 현실에 피운 ‘진성(眞性)’ - 홍지수_공예평론, 미술학박사
변격의 마디들 : 도안에서 회화로, 다시 조각으로
허상욱은 분청 재료와 화법을 운용한다.
그중에서도 그릇 전체에 백토(白土)로 분장(粉粧)하고 도상을 음각 시문(施文)한 후, 음각 선 바깥 영역을
긁는 박지기법(剝地技法)을 주로 사용해왔다.
작가는 모란, 물고기, 호랑이를 비롯한 구상문과 반복과 리듬이 주요 특징인 추상문을 때에 따라 번갈아
시도한다. 작업 초기에는 이것을 사발(鉢), 편병(甁), 항아리(壺) 등의 ‘장식 문양’으로 접근했다.
하지만 작가는 점차 공예 도안에서 탈피하여 회화 영역으로 표현의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
공예와 예술 사이에 두었던 경계가 느슨해지면서 매체, 재료, 수법 간 교차와 접목이 자유로워졌다.
이에 따라 공예 의장 성향의 도식화는 사라지고 선은 한층 유연해졌으며 면 분할과 색채 시도
역시 과감해졌다.
최근 이태준의 수필 ‘파초’에서 착안해 시작한 <파초문> 연작은 이러한 변화를 가장 잘 보여준다.
파초 특유의 넓은 잎 형태와 바탕이 함께 어울려 시원한 비례미와 여백미, 색채감이 돋보인다.
분청이라는 단일 수법에 얽매이지 않고 청화, 은채를 자유롭게 접목하는 표현의 변화는
2016년 한국금융결재원(KSD)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스타카토 Staccato>부터 시작했다.
조선시대 책거리 정물화 면모에 착안하여 분청 인화 승렴문과 박지 기법을 곁들여 시각적 리듬과 운율을
만들고, 자신의 일상을 소재 삼아 담담히 일기 쓰듯 그린 서구 정물화, 추상화의 응용이다.
이후 단일 매체, 재료와 수법, 도안에 연연하지 않고 새로운 회화를 시도하던 작가의 행보는
이번 갤러리 완물의 <수수생춘(隨手生春)>에 이르러 새롭게 조각 형식으로 진입했다.
<수수생춘>전에는 작가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모란, 어문, 호랑이 등의 구상 도안을 비롯해 박지 기법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전시장에는 발(鉢)과 기대(器臺)를 부착한 오목한 그릇(bowl) 형태에 비대칭 부속물을 자유자재로 부착한
형태가 대세다. 전통 기물인 귀달이 잔, 반(盤), 장군을 비롯해 입방체 등을 자유자재로 형태 변형했다.
작가의 눈과 본능이 본체의 구조와 에너지에 반응하며 부속물을 자르고 덧붙인 후, 귀얄과 덤벙의 속도와
밀도를 조절해 획득한 즉흥 표현이다. 자칫 방종하거나 과하기 쉬운 기물의 형세를 다독이기 위해,
작가는 일체 도안 장식 없이 귀얄과 덤벙으로만 표면을 마무리했다. 아무리 박지기법에 비해 담백한
귀얄이나 덤벙일지라도 시도 횟수와 속도, 흙물 두께, 붓질의 탄력도 등에 따라 박지기법 못지않은
다채로운 깊이와 물질성, 운동성이 느껴진다.
형태와 질감 처리 각각이 내뿜는 형세의 정중동(淨中動)을 교묘히 조절해 얻는 시각적 재미와 통합적
운용의 묘미가 이번 작업의 관건이다.
추상의 순간
전작의 익숙한 기법과 표현을 기대했던 이들은 이번 전시의 낯선 형태와 형질을 두고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신작의 유기적 형태-이 단순한 선적(線的) 도식과 질감 처리는 낯선 것이기는커녕 매우
익숙한 것이다.
이 익숙함은 작가가 화장토 바른 용기 표면 위에 수없이 그린 모란의 겹에서, 물고기의 비늘, 호랑이의
두상과 꼬리 그리고 마저 깎지 않고 남겨두었던 희끗희끗한 박지 바탕에서 우리가 익히 보았던
그것의 부분이자 확대다.
작가가 즐겨 그리는 모란, 물고기, 호랑이, 파초는 전통 시대 장식미술뿐 아니라 미술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도상의 종류는 달라도 이면에는 모두 세상에 태어나 많은 자손을 거느리고 부귀와 안락을 누리며 병 없이
오래 살고 싶은 인간의 본능적 욕구가 담겨 있다.
모란은 집안 평안과 부귀에의 소망을, 어문에는 신분 상승의 욕구를, 호랑이에는 집안의 안락을 담보하는
벽사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림과 장식미술의 도상들은 모두 ‘가형(假形)’이다.
화가가 비슷한 기운의 형상에 의미를 빗댄 것이다. 동시대를 사는 화원과 대중이 모두 암묵적으로 알고
있고, 누구나 오래 보고 싶고 갖고 싶으나 소유하지 못한 것들 즉, ‘진성(眞性)’을 그린 것이다.
허상욱이 그린 모란, 물고기, 호랑이, 파초 등은 옛것과 유사하더라도, 작가가 도상 안에 담은 진성은
옛것과 다르다. 작업 초기, 옛 도상에 담긴 기복(祈福)을 자신이 그린 도안에도 담아 자신과 가족, 그리고
소유자들까지도 함께 복을 누리고 안락하길 바라는 마음이 애당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작업이 진척될수록 작가의 머릿속에서 도상이 가지고 있던 기복과 벽사의 의미는 희미해진다.
같은 도안을 반복해 그리고 형태, 구도, 구성을 달리 시도하다 보면, 어느새 작가 자기 신체와 행위,
리듬에 맞게 소재의 형태는 단순해지고 자기만의 것이 된다. 조금 더 행위에 속도와 능숙함이 붙으면,
작가가 스스로 의도하지 않아도 생략과 변형이 일어나면서 참조했던 원형과는 다른 변격, 창신(昌新)이
일어나게 된다. 어느 날에는 작가의 눈에 더 이상 모란, 물고기, 호랑이, 파초가 아닌 선과 면, 질감으로만
보이는 전환의 순간이 찾아온다.
도안의 의미나 형태는 사라지고 단순히 구조로서의 물질, 점․선․면으로 이뤄진 기하학적 명료함으로
축소되는 시각적 태세 전환 즉, 구상에서 추상화로의 이행이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가 허상욱의 작업에서 보는 도상의 실체는 기실 작가가 손목을 반구형 궤적으로 반복해 움직여 그린
곡선들의 구성에 불과하다.
우리의 눈이 그것을 임의로 특정 도상으로 본 것이다. 우리가 본 평면 위 도상을 실재의 촘촘한 그물 안에
고유한 재질, 선, 균형, 부피를 가진 입방체로 세우려면, 작가는 그것을 추상의 영역으로부터 촉각적이고
물질적인 현실 세계로 가져와야 한다.
무게가 없는 것에서 무게를, 부피가 없는 것에게 부피를, 방향이 없는 것에게 x, y, z가 맞물린 위치 좌표를
부여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평면에 오래 익숙했던 작가가 대상을 입체화하는 과정에서 경험했을 부침과 어려움을
어렴풋이 가늠해볼 수 있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작가는 평면 위 도상의 점, 선, 면을 일으켜 입체기의 입술, 배, 귀, 삼족 굽으로 만들었다.
보는 이의 시각 방향과 각도 그리고 빛의 조도와 움직임 여부에 따라 용기와 그림자와 한 몸으로 엉켜
우리 눈에 카오스적인 형국이 펼쳐진다.
각자 본 것을 꽃, 구름, 수면 위 파문 혹은 산세 겹침 등으로 달리 볼 수 있다. 누가 무엇을 보았든 옳다.
사람은 각자의 마음에서 불러낸 색(色)과 인식의 세계 안에서 대상을 본다.
사람에 따라 세계에 대한 깨달음과 의의가 다르니 같은 것을 보아도 다른 것을 보는 것은 마땅하다.
다만 사람의 마음(人心)은 위태롭고 우리 감각기관(五根)이 느끼는 오경(五境)은 자의적인 데 그칠 뿐이니,
바깥 세계의 가형에 속기 쉽고 그 안에 숨은 진성을 놓치기 일 수인 것이 문제다.
허상욱의 작업은 특정 대상을 재현한 것이 아니다.
그가 흙을 깎고 붙인 곡선 그리고 덤벙과 귀얄로 그린 표면의 형세는 사물의 진성 즉 기(氣)를 표현한 것이다.
전시 제목인 ‘隨手生春’을 글자 그대로 읽으면, ‘손길 따라 피어나는 봄’이다.
그러나 작가가 피운 ‘봄’은 피움, 발산, 생동, 솟구침의 기운이지 특정 계절 혹은 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모란뿐 아니라 작가가 전작에서 즐겨 그리는 물고기, 호랑이, 파초도 마찬가지다.
그중에서도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모란을 변격의 실마리로 삼은 것은 작가의 취향이 늘 여유 있고 부드러운
공간과 형태, 따뜻함과 평안함에 있기에 모란의 형태와 의미가 여기에 가장 부합하고, 가장 오랫동안 손익은
소재이기에 다루기 쉬운 측면이 일면 판단에 작용했다고 본다. 모란으로부터 입체화를 시도했지만,
곡선을 깎고 붙이며 몸체, 입술과 손잡이, 다리 등로 형태 변형하는 일은 시도를 거듭하면 할수록 가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진성에 다가가는 추상화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기물 요소마다 높고 낮음(高低), 좁고 넓음, 표면의 부드러움과 거침, 곡선의 너울거림과 리듬을 조율하는 일은
전체를 아우르며 부분을 결속시키는 ‘단순미’와 ‘조화미’를 추구한다.
일명 우리 미술의 조형 정신 대교약졸(大巧若拙)과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정신이다.
이것은 가상을 지우고 진성을 추구하는 현대 미술의 추상화 과정과 크게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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