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제목 : 조선양화朝鮮養花 - 꽃과 나무에 빠지다
전시기간 : 2023.09.02(토) ~ 12.30(토)
전시장소 : 호림박물관 신사본관(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317)
제1전시실 側 - 꽃을 사랑한 조선
집 주위에 원림(園林)을 만들고 그 안에 꽃과 나무를 가꾸는 문화는 동양의 오랜 전통이다.
사람은 늘 자연을 동경했고 그것을 곁에 두고자 했다.
그러한 사람의 바람은 화원(花園)이라는 공간으로 실현되었다.
화원은 사람이 만들어낸 소자연(小自然)이었다.
거기에는 사람의 손을 거친 꽃과 나무가 함께 했다.
우리나라에서 화훼(花卉)를 곁에 두고 즐기는 문화는 이미 삼국시대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체계화되고 기록과 실물로 남겨진 것은 조선시대 때부터이다.
조선시대 원예문화의 정점은 왕실이었다. 조선은 국초부터 장원서(掌苑署)를 설치했다.
장원서는 궁궐 조경의 관리와 왕실에서 소용되는 과실과 화초를 재배하는 일을 맡아 처리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는 조선 왕실의 화원과 원예문화를 시각적으로 잘 보여준다.
궁궐 곳곳에는 다양한 꽃과 나무가 식재되어 있었다.
이는 조선 왕실이 꽃과 나무에 큰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원예문화는 민간에까지 퍼졌고 개인들은 자신만의 화원을 꾸미는 데 열중했다.
화원은 각자가 좋아하는 꽃과 나무로 가꾸어졌다.
그리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림과 도면으로 그려 남겼다.
이러한 시각 자료를 통해서 조선 사람들이 꽃과 나무에 품었던 마음과 상징을 엿볼 수 있다.
조선 사람들의 사상과 마음이 담긴 화원은 철학적 사유(思惟)의 공간이자
정신적 와유(臥遊)의 공간이었다.
제2전시실 志 - 나를 키우는 꽃
조선의 문인들은 꽃과 나무를 곁에 두고 배웠다.
그들은 꽃과 나무에서 받은 감동을 시와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일부 문인은 꽃과 나무를 직접 기르고 그 경험과 지식을 책에 담았다.
그러나 꽃과 나무에 마음을 두는 행위는 완물상지(玩物喪志, 사물에 정신을 뺏겨 본뜻을
잃어버림)로 인식되어 사대부가 떳떳하게 드러낼 일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꽃을 키우는 행위는 사물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이치를 살펴서 마음을
수양하는 방편이라고 주장했다.
즉, 꽃과 나무의 겉모습을 단순하게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든 의미를 살펴 자신을
성찰하는 계기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군자(君子)를 상징하는 매화(梅花)・난초(蘭草)・국화(菊花)・대나무(竹)・
연꽃(蓮花)과 절개(節槪)를 상징하는 소나무(松) 등 사대부들이 지녀야 할 덕목을 지닌 꽃과
나무들이 선호되었다. 이처럼 꽃과 나무는 문인의 이상과 소망을 읽어내는 상징 기호였다.
조선시대 원예서의 고전(古典)인 『양화소록(養花小錄)』은 꽃과 나무에 대해 관심을 쏟은 조선
문인들의 의식세계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통로이다.
조선 문인들이 꽃과 나무에 새긴 사유와 마음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과
성찰의 기회가 된다.
제3전시실 養 - 꽃을 키우는 나
조선은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운영된 나라이다.
성리학을 신봉한 문인들은 사물의 철리(哲理)를 탐구하여 자신을 수양(修養)했다.
그러나 격물치지(格物致知)와 같은 사고방식은 상업적인 도시문화가 활발해지면서
서서히 바뀌었다.
소비문화가 발달하면서 점차 사물 그 자체에 관심을 가지는 실체적 인식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완물상지(玩物喪志)로 여겨져 금기시되던 다양한 물질에 대한 호기심이 긍정되었다.
그 결과 물질에 대한 관심과 소유가 정당화되어 그러한 행위가 고아한 취미로 인정받게 되었다.
도덕적 규범과 명분에서 벗어나 개인의 개성과 취미가 중요시된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안녕과 염원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게 되었다.
고동서화(古董書畵)를 수집하거나, 원림(園林)을 경영하면서 꽃과 나무를 가꾸는 행위가 고아한
취미로 인식되었다.
특히 원예 취미는 번잡한 도시생활 속에서 자연을 곁에 두고 즐기고자 했던 문인들의 열망을
해소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꽃과 나무를 기르면서 경험한 다양한 원예지식은 책으로 출간되고 유통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백화암百花菴을 경영하면서 『화암수록(花庵隨錄)』을 쓴 조선 후기의 문인
유박(柳璞, 1730~1787)이다.
한편, 조선 후기에 원예 취미가 유행하면서 다양한 물질문화를 파생시켰다.
우선 매화와 국화 등 다양한 꽃과 나무가 분재(盆栽)로 가꾸어져 유통되고 소비되었다.
이에 따라 분재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물들이 활발하게 만들어졌다.
그 대표적인 예가 도자 화분(花盆)과 분재문양이 장식된 백자이다.
분재와 화분은 문방청완물(文房淸婉物)의 하나로 인식되어 중요한 감상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일부 문인들 사이에서는 밀랍을 사용하여 조화(造花)를 만들어 감상하기도 하였다.
문인이 꿈꾼 상상속의 정원, 의원(意園)
의원(意園)은 마음 속 상상의 정원(庭園)이다.
조선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중요시했던 사회였다.
정원은 인위적 공간이었으나 사람의 손길을 최소화한 자연물로 꾸며졌다.
그 속에 문인들이 꿈꾼 세계가 펼쳐졌고 그들의 자아가 실현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의 문인들 사이에서는 의원을 노래한 글과 이를 시각화한 그림이 크게 유행했다.
조선 중기 문인 허균(許筠, 1578~1607)은 화가 이정(李楨, 1554~1626)에게 편지를 보내
배산임계(背山臨溪)의 멋진 상상 속 공간을 그려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문인들에게 정원은 산수(山水)의 일부로 인식되었다.
그렇기에 일상 속에서 ‘와유(臥遊, 방 안에 누워서 산수를 유람하다)’를 꿈꾸었던 문인들은
의원에 마음을 두었다.
조선시대 백과사전인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서는 중국 명말청초(明末淸初)의
문인 황주성(黃周星, 1611~1680)이 쓴 『장취원기(將就園記)』를 통해서 의원을 소개했다.
높은 산과 고개로 둘러싸인 장취원은 괴로운 현실 세계에서 벗어난 은자(隱者)의 정원으로
인식되어 18・19세기 조선 문인들의 의원기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조선 문인들은 겉모습의 화려함보다는 정신적인 고고함을 추구했다.
의원을 그린 그림 속에 은자를 그려 넣어 자신을 은자와 동일시하여 은거(隱居)를 실현하고자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이 머물고 싶은 이상적인 원림의 모습을 담은 산거도(山居圖)와 같은 그림을
곁에 두기도 했다. 이를 통해 번잡한 일상 속에서도 한가롭게 은거를 꿈꿀 수 있었다.
조선시대 문인들이 늘 곁에 두고 사용한 산 모양의 연적은 높은 산에 에워싸인 집을
형상화한 것인데 이 또한 의원을 형상화한 것이다.
'전시회 소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해분청도자박물관 기획전 - '세라의 가배'CERA’s 咖啡 (2) | 2023.12.28 |
---|---|
지숙경 도예전- Songs of Clay, Fire, and Wind 흙과 불과 바람의 노래 (0) | 2023.12.28 |
도자화화 김미경 & 김은경 2인展 - 도자가 품은 세상 (0) | 2023.12.27 |
김해분청도자전시판매관 초대전 - 탁원대 개인전 '흙에 새기다' (1) | 2023.12.26 |
경주 이스틱 - 플레이스씨 특별기획전 (0) | 2023.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