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부풍향차보

썬필이 2018. 7. 30. 20:38

- 실증에 가까운 부풍향차보의 원형 밝히는 것 - 정서경 논문 <영.정조시대 부안 현감 이운해의

<<부풍향차보>>연구 1 - 차와문화 - 2018.06.28

<부풍향차보>는 우리나라 혼합차를 대표하는 차로 잘알려져 있다.

목포대학교 인문학부 연구전임교수인 정서경 박사가 <부풍향차보>의 잘못된 분석을 바로잡고자 하는

논문을 보내왔다.

비교민속학회 제 63집에 실린 이 논문은 2017년 7월 4일 투고되어, 2017년 7월 14일부터 7월 30일까지

심사위원이 심사하고, 2017년 8월 14일 수정 완료하여 2017년 8월 18일 심사위원 및 편집위원회에서

게재가 결정된 논문이다.

본지는 정서경 박사의 논문을 몇회 나누어 싣는다. <편집자 주>

본고는 부안의 차문화 기록으로 현존 유일한《부풍향차보》를 고찰한 글이다.

《부풍향차보》는 弼善 이운해(李運海, 1710~?)가 부안 현감으로 부임한 翌年 1755년에 남긴

차에 대한 기록이다.

당시 무장의 선운사 일대 찻잎을 채취하여 차를 만들고 지명을 부쳐 기술한 책이다.

제다법과 마시는 방법, 차의 명칭과 도구까지 상세히 계량하여 기술하였다.

찻자리에서 쓰이는 다도구를 그림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

이운해는 1754년 10월 3일에 부안에 부임했다. 부안과는 3舍地 떨어져 있는 茂長의 차 소문을 들었다.

당시 무장은 선운사가 위치한 곳으로 사찰 주변에 좋은 차가 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관아의 사람을 시켜 선운사의 찻잎을 채취해 오라고 했다.

그렇게 딴 찻잎을 주재료로 常飮할 수 있는 일곱 가지 향차를 만들었다.

차 여섯 냥에 향약재 2종을 섞은 것으로 특정 증상에 효험이 있음을 증명하였다.

말하자면 부풍지역의 차 계보에 관한 기록이다.

《부풍향차보》는 1994년에서 2004년까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頤齋亂藁》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0년에 걸쳐 해마다 1권씩 한국학자료총서3(국학진흥연구사업추진위원회) 총 10권으로

정리하여 색인본까지 갖추고 있다.

《부풍향차보》는《이재난고》제1책(원전《頤齋亂藁》2책) 172~173쪽에 실려 있다.

그리고 차계에는 2008년과 2011년에 소개되었다.

이후《부풍향차보》의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필사한 원전을 분석하는 데는 다소의 논전이 야기된다.

원전자료를 근거로 분석하기보다 유추나 추론이 많아 부풍향차의 원론적인 문제가 오도될 수 있다고 사료된다.

부풍향차의 제다나 음다의 방법이 여타의 기록에서 차용한 해석으로 인해 원전 분석에 사족이 상당하다.

추정이나 단정보다 지역 차문화의 독창성을 드러내고 인정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과다한 해석으로 향토색이 짙은 지역 차문화의 특수성이 망실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고전은 원전을 중시해야 한다.

부풍향차는 고고학적 자료이기보다 영․정조 시대의 차문화의 실상이다.

자칫 분석의 오류가 불명으로 종말 될 우려도 있어 원전자료를 중심으로 천착하고자 한다.

본 연구에서는《부풍향차보》의 원전 분석을 통하여 실증에 가까운 부풍향차의 원형을 밝히고자 한다.

더불어 부풍향차의 제다법과 음다법이 가진 역사문화적 의의와 그림으로 남긴 다도구를 통하여 조선시대 지역

차문화를 고찰하는데 목적이 있다.

먼저 우리 차문화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향차의 역사를 고구하고, 기록을 통한 향차의 전승과 현대로 이어지는

가향차(Flavory tea)나 블렌딩차(Blending tea)의 전망을 조명해 볼 수 있다.

이는 향후 토속성을 살린 지역 차문화의 비교연구와 특성화된 차산업 발전을 도모하는데 크게

기여하리라 판단된다.

논문- 정서경. 목포대학교 인문학부 연구전임교수. 문학박사

 

- 부안지역 향차문화 기록《부풍향차보》의 전말 - 정서경 논문< 영.정조시대 부안 현감 이운해의

<부풍향차보>연구 2    - 차와문화 ;2018.07.03

▲ <사진 1>《頤齋亂藁》2책의《부풍향차보》원전, 출처 황병관씨 소장.

부풍은 1416년(태종16) 10월에 부령현扶寧縣, 別號-扶風과 보안현(保安縣, 별호-浪州)을 합병하여 부령의

부扶와 보안의 안安을 따 扶安縣이라 고쳐 불렀다.

부풍은 현 부안의 옛 이름이다. 부풍은 고유한 지역명이고 鄕茶는 특정 지역의 향토성을 띤 차라는 뜻으로

무장을 의미한다.

그런데 현재까지 향차의 해석이 분분하다. 향차는 香茶와 鄕茶로 구분하여 표기할 수 있다.

香茶는 차 이외의 향이 있는 재료를 넣어 만든 차라는 의미이다.

차의 제법에서 나오는 용어다. 鄕茶는 한정된 지역의 공간성을 나타낸다.

특정 지역의 차문화를 기술한 데에서 나오는 용어 정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鄕茶는 지방이라는 內意가 담겨 있고, 특정지역의 차의 기록이라는 의미에서 譜를 빌어 이름한

이운해의 의도를 비친 大題(앞머리글)이다.

<동의보감>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鄕藥의 개념으로서 쓰였다면 부풍향차는 향차의 제다법을 중심으로

쓴 의도가 엿보인다.

무장의 찻잎을 이용하였지만 부안 현감이 지시하여 만든 차다.

현감으로 부임한 이운해의 결의나 포부도 내재되어 있다.

현감으로서 권위를 웅변하고자 한 정치적 동기도 숨어 있다고 이해된다.

정조만 하더라도 <동의보감>의 체제를 보완하고 그 내용을 보강하여 스스로 <壽民妙詮>이라는 의서를

편찬하였다고 하였다.

지역민을 계도하기 위한 취지를 보인 하나의 표어로써의 조치나 작용까지도 해석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하겠다.

이운해는 최적의 입지를 갖춘 지역의 찻잎을 이용해 차를 만들게 된 동기와 내력, 향차의 효능과 제다한 차의

종류, 완성된 차의 주된 치료효과까지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제다법과 음다법, 다구의 실측을 통해 당대 차문화의 편린을 살필 수 있게 하였다.

실험적 정신을 발휘하여 음다 체험을 기록함으로써 조선시대 지역 차문화를 고구하는 자료로써 가치가 있다.

부풍향차보는 이운해가 부풍 현감으로 발령을 받고 내려와 무장 선운사 인근의 차를 이용해 향약차

7종을 만들었다.

이것을 기록으로 남겼으나 원본은 현존하지 않고, 이재 황윤석(頤齋 黃胤錫, 1729~1791)의

《頤齋亂藁》2책에 그림과 함께 실려 두 쪽 분량으로 남아 있다.

▲ <사진 2> 황윤석의 8대손 황병채 옹

그의 학문은 사후(死後) 53년인 1829년(순조 29)에 후손 수찬(秀瓚)과 당시의 전라도관찰사 조인영(趙寅永)에

의하여 간행된《頤齋遺藁(이재유고)》12권 7책과 이 유고가 간행된 지 114년 뒤인 1942년에

황병관(黃炳寬)씨의 부친 황서구(黃九,1896~1966)와 향유(鄕儒)들에 의하여 속간된

《頤齋續藁(이재속고)》14권 7책, 그리고《理藪新編(이수신편)》10책에서 그 학문적 도량을 알 수 있다.

이어 1975년에 황병관씨가 소장한 고서를 포함하여 호남 실학의 3걸로 일컬어지는 이재 황윤석, 存齋 위백규

(魏伯珪, 1727~1798), 圭南 하백원(河百源, 1781~1844)의 글을 한데 묶어 내기도 하였다.

황윤석은 이운해의 기록《부풍향차보》를 시골집(전북 고창)에서 일기에 필사하여 담았고 20여년 정도 후에

중요한 내용을 다시 발췌하여 덧붙였다. 그 원본을 다 필사할 수 없어 全文 해석이 아쉽다.

▲ <사진 3>《부풍향차보》를 소장하고 있는 황병관씨

필자는《이재난고》를 확인하기 위하여 2017년 5월 28일 황윤석 생가(시도민속문화재 25호)가 있는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 353번지를 방문했다.

황윤석의 8대 후손들이 현재 마을을 지키고 살고 있다. 직계인 황병관(黃炳寬, 1944~甲申生)씨가

《이재난고》를 보존하고 있었는데 그는 2015년 전주로 이사 가고,《이재난고》는 DB구축을 위하여

한국학중앙연구원에 1차적으로 1권부터 30권까지 가 있는 상태였다.

황윤석의 8대 후손들과 족보(平海黃氏從仕郞公派世譜)를 살펴보았다.

황윤석은 평해 황씨 22세손 황전(黃㙻, 肅宗 甲申(1704 정월 9일)생~辛卯(1771 12월 14일) 졸)의

장남으로 英祖 己酉生 辛亥卒로 되어 있다.

슬하에 一漢, 七漢, 輔漢, 弼漢과 딸 셋을 두었다.

이재 황윤석은 興德縣 사람으로 理學, 天文學, 韻學, 文學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두루 섭렵한 通儒로서

어려서부터 博覽强記로 이름이 높았다.

당대 대 유학자였던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의 문하에서 새로운 학풍인 실학을 접하였다.

홍대용(洪大容, 1731~1783), 신경준(申景濬, 1712~1781)과 교류하면서 성리학과 자연과학 등을 폭넓게

섭렵하여 석실서원학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7~1584),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의 학문을 존중하며 노론

낙론계 학풍을 따랐다.

조선 후기 호남 실학을 대표한 인물이다. 이재 황윤석은 “군자는 한 가지 사물이라도 알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君子恥一物不知)”는 신념을 가지고 박학의 학문체계를 지향했다.

▲ <사진 4>《부풍향차보》가 실린 《이재난고》2책.

그 결과 문학, 경제, 經學, 禮學, 사학, 算學, 兵刑, 종교, 道學, 천문, 지리, 易象, 언어, 典籍, 예술, 의학,

陰陽, 풍수, 譜學, 物産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방대한 업적을 남겼다.

정치, 경제, 사회, 농․공․상 등 인류생활에 이용되는 실사(實事)를 망라하여 쓴 일기 또는 기사체(記事體)로서

책마다 쓰기 시작한 연대와 끝낸 연대를 기록하고 난고(亂藁)라는 표제를 달았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보다 1세대쯤 앞서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며, 학문의 영역이 광범위하고

학풍이 정치(精致)한 점에 있어서도 높이 평가된다.

그의 기록벽에 의해 남겨진《이재난고》는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활용․분석되고 있다.

황윤석은《부풍향차보》를 1757년 6월 26일자 일기에 베껴 적었다.

六月二十六日, 曉前 有異夢 在京中 大闡甲科 作家書 將走一伻 而家親 亦在旅次

敎以不必汲汲馳書 是時 訪安佐卽及諸親舊  而李雲擧 亦在座矣

새벽에 기이한 꿈을 꾸었는데 서울에서 갑과가 크게 열리는 꿈이었다.

집으로 보내는 편지를 써서 장차 심부름꾼을 보내려고 하는데 가친 또한 여관에 머무르고 계시니

굳이 치서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

이 때 안좌랑 및 여러 친구를 방문하였는데 이운거 또한 좌중에 있었다.

이재 황윤석이《부풍향차보》를 필사한 때는 이운해가《부풍향차보》를 기록한 1755년으로부터 2년째이고,

이운해가 부안 현감으로 부임한 1754년 10월 3일과는 3년 째 되는 시점이다.

황윤석의 나이로는 26세 때의 기록이고, 10살 때부터 기록하였다고 하니 16년째의 일상의 기록 중 필사였다.

《이재난고》에 남아 있는《부풍향차보》는 다섯 개의 항목 <서문(序文)>과 <차본(茶本)>, <차명(茶名)>,

<제법(製法)>, <다구(茶具)>와 1개 추기로 구성되었다.

이재 황윤석이 저자 필선 이운해의 인적에 관한 글을 붙여 적은 것이다.

이운해의 유년기와 수학했던 내력 그리고 이운해의 저서를 남겼다.

추기를 한 때는 ‘이운해 형제가 이미 고인이 되었다고 슬프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윤석이《부풍향차보》를 만나게 된 이유에는 태인현감 조정과 김이신, 흥덕현감 閔鏽, 정읍현감 韓光載,

장성부사 정경순, 부안현감 李雲海가 황윤석 형제의 서울 유학을 후원하였다고 한다.

이운해의 경우 서울 출신이기는 하였으나 무신란 때 진주우병사로 재직하다 충군죄인이 된 李時蕃의

지친으로 한직을 떠도는 처지에 있었다.

그 결과 이운해나 이중해 형제의 중개로 李家煥의 처남인 鄭喆祚를 만나 ?수리정온?과 천문학서적인 ?

역상고성? 중 일부를 빌려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인연이 되어 일기에《부풍향차보》를 필사했을 개연성이나 가능성이 클 것으로 판단된다.

글. 사진 목포대학교 인문학부 연구전임교수 정서경

 

《부풍향차보》 늦봄이나 여름에 제다 - 정서경 논문 < 영.정조시대 부안 현감 이운해의

<<부풍향차보>>연구 2 - 차와문화 - 2018.07.09

1.《부풍향차보》序文, 부풍향차보에 붙인 개요

扶風之去茂長三舍地 聞茂之禪雲寺有名茶 官民不識採啜 賤之凡卉 爲副木之取 甚可惜也 送官隷採之

適新邨從叔 來與之參 方製新各有主治 作七種常茶 又仍地名扶風譜云. 부풍扶風에서 무장(茂長)은

3사지(90리, 36㎞) 떨어진 곳에 있다.

듣자하니 무장 禪雲寺에 명차名茶가 난다고 하는데 관민들은 따서 마실 줄을 모르고, 초목이나 부목과 같은

것으로 취급하니 심히 애석하다.

관아의 사람을 보내 차를 따게 하였는데 때마침 新邨 從叔도 오셔서 함께 참여하였다.

막 새로운 차를 만들어 각각 주치를 두고 상음할 수 있는 7종의 차를 만들었다.

지명을 따《부풍보》라 한다. 위 원문의 내용은 부풍과 무장의 거리감 그리고 무장 선운사의 차에 대한

사정轉聞으로 시작한다.

부풍에 차가 나지 않아 선운사의 찻잎을 이용했다는 분석도 보이나 당시의 부풍과 무장, 고부, 흥덕 등은

차산지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운해는 부풍과 무장을 차의 최적의 입지조건이라고 판단하여 부임하고 바로

실행에 옮긴 것이다.

이운해는 선운사에 명차가 난다는 소문에 실험적 정신으로 향차를 만들었다.
더불어 부안 일대 사람들의 차에 대한 인식과 본인의 실행 그리고 상음할 수 있는
일곱 가지 차를 만든 정황 등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것을 글로 옮겨《부풍보》라 이름 하였다.
서문에서는 이운해가 부풍향차를 만들게 된 이유․ 원인과 차를 만든 시도의 과정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리고《부풍향차보》를 쓰게 된 경위에 대해서도 정리하고 있다.
우리 차문화사에서 특정 지역에서 생산되었던 차의 기록은 많지만 특정 지역이 차명으로
거론된 
록이 드문 현실로 볼 때 지역 차문화의 연구 성과를 기대할 만하다.
차의 종류별 차명 앞에 지명을 구분하여 사용하는 중국의 예는 흔하게 찾을 수 있는데,
우리 차문화사에서는 전례前例가 없다.
부안은 당시의 정황을 고려해 볼 때 차나무 재배의 북방한계선이기도 하여,
전북 지역의 차문화사 정립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본다.

2. 차본茶本, 차의 기본적인 기능과 작용

自十月至月臘日 連採而早採爲佳苦茶一名雀舌 微寒無毒 樹少似桅 冬生葉 早採爲茶 晩爲茗

曰茶曰檟曰設曰茗曰荈 以採早晩名 臘茶謂麥顆 採嫩芽搗作餠 並得火良 葉老曰荈 宜熱

冷則聚痰 久服去人脂 令人瘦

찻잎은 시월에서 동지달 납일까지도 채취한다. 일찍 채취할수록 좋다. 차는 쓰다. 부르기를 작설이라 한다.

성질은 약간 차고 독은 없다. 나무는 작고 치자나무를 닮았다. 겨울에 나는 생엽을 일찍 채취하면 차라하고

늦게 따면 명이라 한다.

 茶(荼)․檟․設․茗․荈 등은 채다 시기에 따라 이른차와 늦차로 구분하여 부른다. 납차는 맥과라 한다.

어린 싹을 채취해서 찧어서 떡 모양으로 만들어 꿰어(並) 적당하게 불에 쬔다.

쇤 잎은 천이라고 하는데 응당 뜨겁게 마셔야 좋고, 차갑게 마시면 가래나 천식을 청한다.

오래 복용하면 사람이 기름기가 없어지고 마르게 된다.

차본은 차茶의 기본적本인 기능과 작용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야말로 기초적인 당대의 차에 대한 상식선常識線이다.

차본은《동의보감東醫寶鑑》탕액湯液편 고다苦茶조의 내용을 인용하였다.

(탕액편)은 당약唐藥과 향약鄕藥을 명백하게 구별하여 기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운해는 10월에 부임하여 무장 선운사의 차 소문을 들었다.

작설은 차의 채취시기를 말하는 것으로 이를수록 좋다는 것은 작설인 상태일 때 채취하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이운해가 말한 것은 찻잎의 상태인데 ‘백십월지월납일自十月至月臘日’의 해석이 다양하다.
시월과 동짓달 납일을 찻잎 채취의 시점으로 보는 시각이 많으나 채다의 종결점을 말한다.
찻잎나기 시기로 보면 맥과의 형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채다
시기로써 이른 시기이지만 흔히 제다 기준으로 보면 곡우 전후를 시점으로 삼는다.
그리고 찻잎은 시월이나 동짓달까지도 채취해서 떡차를 만들었던 민속전승의 제다법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 ‘백십월지월납일自十月至月臘日’은 ‘찻잎은 시월에서 동지달 납일까지도 채취한다.
’로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부풍향차보》에서 만든 차는 그냥 차가 아니라 증상에 따라 주치의 약재 성분이 더해진
이른바 약용향차다.

향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향차의 본체에 해당하는 차가 있어야 하므로
그 차에 대해 
우선 설명한 것이 차본이다.
그런데 ‘茶時冬靑 十月間液氣方盛, 將以禦冬. 故葉面之甘, 尤顯然-차는 겨울에도 푸르다.
10월 사이에는 수분이 아주 많아져서 장차 이것으로 추위를 막는다.
그래서 잎 표면의 단 맛이 더욱 강해진다.’는 차문화사의 기록으로 인용한 것이 기존
연구이다. 
그러나 찻잎은 여름을 지나면 수분이 점차 줄어든다. 차나무의 피해가 가장
심한 것이 동․냉해인데, 
찻잎에 수분이 10월부터 많아진다고 하면 바로 다가올
겨울을 대비하는데 큰 어려움이 따른다.

그래서 10월부터 수분이 많은 찻잎을 따서 향차를 만들었다는 해석은 실증적인
분석이 아니다.

비非현실적, 반反환경적, 초超생태적 해석에 가깝다. 경험적 현실성이 배제되었다.

예컨대 실증을 통한 차문화의 기록이 매우 무색해지는 경향이 생긴다.

차나무의 겨울 생장에 큰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차나무의 생육은 기상요인(온도, 강수량, 햇빛)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는다.

보통 생육 정체기는 12월 상순부터 다음해 2․3월까지를 말하는데 품종에 따라 다르다.

차는 동절기에 생장을 일시적으로 정지하고 저온이나 건조 등에 대하여 보호기능을 갖는

동아冬芽를 형성한다.

첫물차의 새싹은 3월 하순경부터 싹트기 시작하여 4월 하순에서 5월 중․하순까지 수확한다.

움에서부터 수확까지의 적산온도는 380~480℃가 필요하다.

움이 트는 시기에서 수확까지의 일수는 32.5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연구는 동짓달 맥과를 채취했다느니, 겨울에 나는 생엽을 일찍 채취하였다느니,

찻잎을 증제했다느니, 떡차로 만들어졌다느니 설왕설래다.

이운해가 말한 ‘방제신方製新’의 개념에 논전이 상당하다.

필자는‘쇤 잎은 천이라고 하는데 응당 뜨겁게 마셔야 한다’는 것에서 단서를 찾았다.

이운해는 음다법에서 부풍향차를 뜨겁게 마시라고 주문한다.

늦봄이나 여름에 차를 만들었다는 확실한 제보다. 겨울에 제다하여 음다를 말할 때는 굳이 뜨겁게 마시라는

주문이 필요 없을 것이다.

《부풍향차보》는 한국차문화사에서 특정 지명을 내세운 최초의 작명에 해당한다는 큰 의미와 더불어‘맥과인

차의 싹을 따서 차를 만든 기록은 부풍향차의 특성을 규정하는데 있어 가장 특징적인 요소가 된다’며 그

의의를 크게 두지만 납차를 따서 찌지 않고 떡차로 제다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혀 찻잎이 서로 엉겨 붙지 않아 차의 형태를 갖추지 못한다.

위의 인용 글(차茶 재배)을 빌려오면,‘차는 동절기에 생장을 일시적으로 정지하고

(생육정체기, 12월 상순부터 다음해 2․3월까지) 저온이나 건조 등에 대하여 보호기능을 갖는다’고 했다.

즉 동아冬芽를 이용하여 일반적인 떡차 제다법으로 쪄서 만들었다고 부적절한 해석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 억탁으로 헤아려 억지로 만든 것인데. 맛이 써서 단지 약용으로나 쓸 수 있다’고 한

이덕리(李德履, 1728~?)의《기다記茶》도 참고할 일이다.

▲ 찻잎이 싹트는 시기. 찻 잎이 피는 시기. 찻잎이 피는 진행과정

차본은 부풍향차를 설명하는 것이라기보다 차의 일반적인 상식으로 서두에 얹은 것이다.

이운해는 차에 대한 인식이, 당대 편찬된 의서나 전문서를 통하여 상당 부분 섭렵하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이 부분을 두고 부풍향차의 제법으로 해석하는 것은 부풍향차의 특성 즉 특정지역의 제다법을 드러내지 못한

결과를 초래했다. 맥과 상태의 찻잎을 따 떡차를 만들었다는 자의적 해석인데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부풍향차보》는 제법을 따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차본에서 말하는, 차가 생엽을 찧었다느니? 떡차라느니?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풍향차는 차에 약재의 향을 가미한 약용의 향차이다.

현대의 개념으로 말하면 블렌딩차Blending tea를 가리킨다.

차의 형태를 떡차로 고정하고 있기 때문에 부풍향차의 정리가 어려워진다.

차본을 제법, 즉 제다법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부풍향차는 찐다蒸製라는 개념은 전혀 없다.

그런데 기존 연구에서는 차를 쪄서 떡차로 만들었다고 단정하고 있다.

부풍향차는 차의 형태보다 향차의 제법에 집중하고 약용차의 효능을 강조한 기록이다.

이것을 차를 만드는 제법으로 구분하여 작설의 형태가 떡차라고 단정하는 것은 분별력의 오류이다.

우리가 흔히 떡차하면 청태전에서 밝혀진 것처럼 둥글고 납작한 형태만 떠올리기 쉬우나 의약서에 약차

활용면에서 보면 환丸의 형태등 다양성을 추구하고 있다.

둥근 것에서부터 둥글납작한 것, 크고 작은 모양과 형태 등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채롭다.

작설은 완성된 차의 형태가 아니라 찻잎의 상태가 작설인 것이다.

제다의 방법론은 4) 제법製法에서 논의하겠다. 또 고전을 해석할 때 차를 세는 단위가 냥兩이나 전錢,

근斤의 표기를 표고 냥兩이나 錢(돈)이면 덩이차고, 斤(근)이면 산차散茶라고 해석하는 연구논문들이 상당하다.

그러나 兩(냥)이나 錢(돈) 모두 무게를 나타내는 단위이다. 떡차를 세는 단위만은 아니다.

제법製法에서 차 여섯 냥(兩)의 냥(兩)을 보면 저울추 두 개가 나란히 매달려 있는 모양을 본뜬 글자다.

떡차든 산차든 무게를 재는 단위로써의 용어일 뿐이다.

이운해는 4)제법에서 ‘우료매명일전右料每各一錢-오른쪽 재료 매양(늘, 언제나) 각 한 돈씩’이라고

제다를 설명한다. 여기에서 약재도‘錢’이라고 하였는데 이것도 덩이로 보아야 하는지 의문이다.

일반적으로 약재는 채썰기나 어슷썰기를 많이 하는 경향을 고려하였을 때 ‘錢’이라고 해서 덩이차 즉 떡차로

해석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

이운해도 참고하였을 <동의보감>의 기록에서 차나 약재의 도량형을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특히 약의 용량은 당시 우리나라 사람의 체질을 바탕으로 중국에서 통일된 명대의 도량형을 기준으로 삼았다.

<동의보감> 집례集例에 “<득효방得效方>과 <의학정전醫學正傳>에서는 모두 5돈을 표준으로

삼았는데 매우 경솔한 일이다.

대개 한 처방이 단지 4~5종이라면 5돈도 가당하지만 20~30종의 약에 이르면 한 약재가 겨우 1~2푼 들어가서

성미性味가 미소微小할 것이니 어찌 효과를 바랄 수 있겠는가! 오직 근래의 <고금의방古今醫鑑>과

<만병회춘萬病回春>의 약은 한 첩이 7~8돈이거나 혹은 1량에 이르러 약의 성미性味가 온전하고 多寡가

적당하여 금인今人의 기품에 부합하기 때문에 이제 모두 이 법도를 따라서 다 절충하여 한 첩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 점은 허준(許浚, 1539~1615)이 약의 운용을 객관적으로 실제 임상에서 실행한 것이다.

<동의보감>에서 실증을 바탕으로 우리의 체질에 맞도록 약의 용량을 가감한 것이다.
목포대학교 인문학부 연구전임교수 정서경

 

- 《부풍향차보》 상투법 이용 차를 우렸다 - 정서경 논문 < 영.정조시대 부안 현감 이운해의

<<부풍향차보>>연구 2 :차와문화 :2018.07.16

3. 차명茶名, 일상에서 발병하기 쉬운 증세와 약재의 효능

부풍향차보>에 수록된 차명편

風 甘菊′ 蒼耳子 寒 桂′皮 茴香 暑 白檀香 烏梅′ 熱 黃連′ 龍腦 感 香薷′ 藿香 楸 桑白皮 橘′皮 滯

紫檀香 山査′肉 取點字 爲七香茶 各有主治
 풍증에 감국․창이자, 한증에 계피․회향, 더위에 백단향․오매, 발열에 황련․용뇌,
감기에 향유․곽향, 기침에 상백피․ 귤피, 체증(얹힘)에 자단향․산사육(이 좋다.)
점자를 취한 일곱 가지 향차를 만든다. 각기 주된 치료 효과가 있다.
생활 속에서 가장 흔하게 발병하기 쉬운 풍증(중풍), 한증(오한),
더위(일사병), 발열, 감기, 기침, 체증 등에 효능이 좋은 향차를 만들었다.
주재료는 차이고 부재료가 향약재다.
이운해는 부임지의 차를 채취해 향차를 만들고, 건강을 지키면서 차를 잘 모르는
관민들을 계도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일상의 즐거움을 얻고자 상음할 수 있는 차를 만드는데 의서인
<동의보감> 을 보고 일곱 가지 증세에 좋은 약재(菊․桂․梅․連․薷․橘․査)를 찾아
점자를 
취하고 구분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조선 초기 향약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던 시대적 영향도 크다.

세종대는 의토성宜土性이 강조되었고 향약(우리나라 고유 약재)들의 실태를 조사하였다.

《향약채취월령》,《향약집성방》,《향약본초》가 차례로 편찬되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자주적인 의학으로 크게 발전한 향약을 토대로 <동의보감> 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동의보감> 과 같은 의서들의 등장은 향약을 중심으로 약용차인 약차를 널리 보급하였고, 왕실, 유학자, 서민,

승려 등 다양한 계층에서 약차를 이용하였다.

<동의보감>은 정精, 기氣, 신神을 바탕으로 새로운 질병 분류의 체계를 세웠으며, 양생법養生法을 강조하여

질병의 치료보다 예방을 중시하였고, 실증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사람의 체질에 맞는 맞춤의학을 도입하였으며,

또한 애민사상을 구현하여 의학의 범주를 서민들을 위한 민중의학으로 확대하였다.

<동의보감>이 실용적인 것은 일정한 체계와 풍부한 내용으로도 이를 알 수 있다.

우리의 풍토에 맞는 조선의 의학으로 정착되었다는 신념과 기술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향약집성방에는 여러 가지 질병을 치료하는 데 차가 처방된 것이 20여 가지가 기록되어 있다.

주로 풍증風症, 열병熱病, 두통頭痛, 중독中毒, 곽란霍亂 등의 질병에 처방되었으며, 처방 형태는 환丸, 가루,

차탕茶湯 등이다. 환이나 가루약은 단독으로 또는 복합으로 처방되었고, 차탕茶湯은 다른 약재로 만들어진

환이나 가루약을 복용하는데 용매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차탕이 약을 삼키기 위한 기능만 했던 것은 아니라 생각된다.

즉 다른 약재를 차탕과 함께 복용하여 치료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처방으로 짐작된다.

또한 물 대신 차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많은 처방에 차가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약은 대체로 여러 가지 증상에 통용하여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앞서 우황청심원의 경우를 살펴보더라도 크게 중품中風과 담痰으로 인한 열증熱症, 또한 상한傷寒으로 인한

열증 이외에도 심기心氣가 부족한 경우에 사용할 수 있는 약이었다.

그리고 ?납약증치방?에 소개되고 있는 약들은 우황청심원牛黃淸心元, 소합원蘇合元, 지보단至寶丹 등은

구급약으로서 대표적으로 사용되던 처방으로 조선 초부터 널리 사용되었으며, 또한 고가의 약이었다.

우황청심원牛黃淸心元의 경우 山藥․甘草․人參․防風․朱砂․水飛․牛黃․麝香․龍腦․雄黃 등 30가지 이상

들어갔으며, 그 중에는 인삼․사향․용뇌․우황 등 고가의 약물이 필요하였다.

이운해는《동의보감》을 참고하여 거기에 차와 향약재 한 가지를 더 섞어 차의 맛과 향을 가미하였다.

7종 향차는 국향차菊香茶, 계향차桂皮茶, 매향차烏梅茶, 연향차黃連茶, 유향차香薷茶, 귤향차橘皮茶,

사향차山査肉茶라 하였다.

흔히 글을 쓰는 약속에서 주主 대신 방점傍點을 찍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봐서 이것이 향을 주로 한다거나

하는 것보다 내용에서 언급하였듯이 주된 치료효과 즉 효능이나 효험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증세에 따른 효능도 중요하지만 상음한다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마시기 좋게 향이나 효능을 높이기

위하여 향약재 두 가지를 첨가한 것으로 사료된다.

4. 제법製法, 향차를 만들고 보관하고 마시는 요령

▲ <부풍향차보>에&nbsp; 수록된 제법편

茶六兩 右料每各一錢 水二盞煎半 拌茶焙乾 入布帒 置燥處 凈水二鍾 罐內先烹 數沸注缶 入茶一錢 蓋(盖)
定濃熟熱服 차 여섯 냥에 오른쪽 재료 매양(늘, 언제나) 각 한 돈씩, 물 두 잔을 붓고,
반으로 줄어들 때까지 끓이다가 휘저어 뒤섞어주면서 불에 바짝 말린다.
이것을 베자루에 담고 건조하고 서늘한 곳에 놓아둔다. 마실 때는 정갈한 물 두 종을 탕관에 붓고 먼저 끓인다.
몇 차례 끓고 나면 (탕관의 물을)다관에 따르고 차 한 돈을 넣는다.
뚜껑을 덮고 진하게 우러나면 뜨겁게 복용한다.
제법에서는 차를 만드는 공정을 꼼꼼히 기록하였다.
차 여섯 량에 차명에서 말한 재료 각 한 돈이라고 했으니 한 가지 증상에 차와 두 가지
약재를 각각(各) 넣었다는 말이다.
게다가 이운해는 바로 매每(字)라는 글자를 넣어 매양, 늘, 언제나를 강조하고 주지시키고 있다.
점자를 찍은 것은 그 증상에 큰 효험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두 가지 약재를 넣고 차를 만들고 차에 이러한 약재를 흡수시킨 것이 이운해가 말하는 새로운 방법이다.
점자를 취한 것은 이미 동의보감에 밝혀진 바 있다.
그것을 표시하기 위해 점자를 취한 것이다.
두 가지 약재 중 점자를 취한 것만 넣고 차를 만들었다는 것은 아니다.
쓰지도 않은 약재를 굳이 기록할 이유가 없다.

반拌은 반차拌茶라는 차명이 아니라 차를 만드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다.

차에 향약재가 흡수되도록 섞는다는 제다 공정의 방법론이다.

《부풍향차보》는 차명과 제법을 달리하여 기술하였다. 각각의 내용을 중시한 현명함이 돋보인다.

차와 향약재를 섞어 만든다는 개념이 여기에 있다.

이운해가 말한 ‘방제신명유주치方製新各有主治’라고 했던 것도 몇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첫 번째는 차에 향약재를 가미했다는 것이다. ‘모든 꽃의 향기가 온전할 때 따서 섞어 만든다.-

諸花香氣全時 摘拌’라는 기록도 반차의 기술적 방증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응당 뜨겁게 마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전통 음다법의 일탕법이다.

당시 남방의 각 사찰에는 차나무가 많으니 칠불암 선객들과 같이 나물죽처럼 끓여서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오직 해남 대흥사에 있어서는 초의스님이 차를 달이는 법과 제다법에 의하여 차의 진수가 이어져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하여간 이런 공정을 거쳐 만든 차는 좌선할 때나 손님이 왔을 때 그리고 대중의 공양 후에 음용했다.

차를 침출하는 방법은 이렇다.

먼저 무쇠로 만든 다관에 물을 끓인 후 물이 완숙이 되면 다관에 직접 차를 넣고 조금 있다가 찻잔에 따른다.

지금 시중에서 흔히 사용하는 것처럼 물 식힘그릇熟盂을 사용한 적은 없다.

아예 물식힘 그릇 자체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본래 우리나라 차의 침출에는 물 식힘 그릇이 사용되지 않는다.

요즘 찻물의 온도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한 것 같다.

그러나 필자가 강조하는 것은 찻물은 뜨겁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옛말에도‘차는 (그 발음은) 찬데 뜨거운 것이 차이다.’ 라는 말이 있다.

따라서 차는 뜨겁게 마시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야 차의 효과가 크게 드러난다는 것을 언급한 것이다. 차를 넣는 방식은 상투법이다.

‘凈水二鍾 罐內先烹 數沸注缶 入茶一錢 蓋(盖)定濃熟熱服-마실 때는 정갈한 물 두 종을 탕관에

붓고 먼저 끓인다.

몇 차례 끓고 나면 (탕관의 물을)다관에 따르고 차 한 돈을 넣는다.

뚜껑을 덮고 진하게 우러나면 뜨겁게 복용한다.’는 기록은 물을 먼저 다관에 넣고 차를 나중에 넣었다는 음다

방법으로 상투법을 썼다. 향차이기 때문에 마실 때 향을 먼저 즐기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한편 이운해가《부풍향차보》를 기록한 때가 여름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원전에 이운해가《부풍향차보》를 쓴 시기는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만약 여름이었다면 이운해는

<茶經>까지도 섭렵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리 차문화사를 살펴보면 사찰에서는 흔히 일탕하투법을 주로 썼지만《부풍향차보》에서는 상투법을

이용하여 차를 우렸다.

여기에서 필자는 부풍향차가 여름에 만들어졌을 개연성을 시사한다고 본 것이다.
목포대학교 인문학부 연구전임교수 정서경

 

- 부풍향차보 다구 해석과 재현에 오류 - 정서경 < 영.정조시대 부안 현감 이운해의

<<부풍향차보>>연구 3 - 차와문화 : 2018.07.23

5. 다구茶具, 6종의 차도구와 기능

▲ <사진 10> 茶具

炉可安罐 罐入二缶 缶入二鍾 鍾入二盞 盞入ㅡ合 盤容置缶鍾盞.
찻잔은 한 홉 들이이고, 다동(찻종)은 두 잔 들이이며,
다관은 다동(찻종) 두 개 들이이고, 탕관은 다관 두 개 들이다.
화덕에 탕관을 편하게 앉히고,
다반에는 다관과 찻잔 찻종을 놓(고 차를 마신다.)는다.
위에서 제다법과 음다법을 말한 이운해는 차를 마시는 자리를 실증을 바탕으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각각의 찻그릇들의 이름과 용량, 형태를 그림으로 표현해 상세히 표기하였다.
이는 차를 마실 때 어느 정도의 기준과 표준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함이었다.
 ?동의보감?에서도 우리의 체질에 맞도록 용량을 조정한 처방의 예가 보인다.
그림 위에서부터 첫 번째는 화덕의 모양을 그대로 그려 넣었다.
그리고 아래로는 다구茶具인데 炉․ 罐․ 缶․ 鍾․盞 ․ 盤(탕관, 다관, 찻종(다동의 역할),
찻잔, 다반)의 순서이다.

이것은 가장 간소화한 차구의 기본 차림setting이다.

혼자 마실 때나 여럿이 모여 차를 마실 때도 최소한 필요한 찻그릇들을 정리하였다.

노炉는 화로라기보다 화덕의 형태이다.

화구火口와 배기구排氣口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 화덕은 나무를 넣어 불을 땔 수 있는 구조와 기능을 가지고 있다.

화로는 화구가 따로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배기구도 없다.

그저 숯을 담아 쓰임에 따라 불씨를 보존(열원)하거나 보온을 위한 것으로 사용되었다.

찻자리를 위한 화로로는 물을 끓이거나 끓인 물을 보온하는 기능, 즉 온도를 유지하기 위한 차도구이다.

화로는 차를 달이는 것, 난방을 위한 것,

여행 때 가마 안에서 쓰던 수로手爐 따위로 나눌 수 있으나 몇 가지 구실을 함께 하는 것이 보통이다.

▲ <사진 11> 화로의 일반적인 형태와 기능

《부풍향차보》에 그림으로 남긴 화덕의 배기구를 손잡이로 보는 논문도 있으나 화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배기구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배기구가 손잡이였다면 돌출된 부분만 그리면 된다.

굳이 동그라미로 그려 넣은 것은 구멍이라는 상징적 표현이다.

배기구를 손잡이로 본다면 화구가 없어야 하고 맞은편에 손잡이가 하나 더 있어야 한다.

이 그림상으로는 손잡이가 없다. (배기구가 손잡이라면)손잡이가 있어야 할 자리가 화구이기 때문이다.

있다고 한다면 화구와 배기구 사이 양쪽에 손잡이가 있어야 맞다.

(<그림 12> 화구와 배기구를 갖춘 화덕, 우 윤제홍의 석매도) 현재까지 일반적인 화덕의 형태가 그렇다.

손잡이가 한 쪽만 있는 화덕, 또 정민의 해석처럼 뒤쪽에 손잡이가 있는 것은 화덕의 제작 역사상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화로는 대체로 손잡이가 없는 것이 많다.

물론 문 돌쩌귀 같은 것이 양쪽에 달려 있는 청동화로나 놋쇠 화로 등이 있지만 화로 주둥이가 넓은 면面이

손잡이 역할을 대신 하기 때문이다.

▲ <그림 12> 화구와 배기구를 갖춘 화덕 (좌 부풍향차보, 우 윤제홍의 석매도)

정민은‘다로 위에 난 구멍은 불기운이 밖으로 새지 않도록 다관과 꼭 맞는 크기여야 한다’고 분석하였다.

배기구를 손잡이로 보고 이렇게 분석한 것이다. 불의 성질만 이해해도 이 문제는 간단히 풀린다.

화구와 탕관을 얹는 위쪽만 터진 상태인데, 뒷쪽 구멍이 배기구가 아니고 손잡이로 해석하면

불기운은 어디로 갈까?

더욱이 ‘불기운이 밖으로 새지 않도록 다관과 꼭 맞는 크기여야 한다’면 화구 앞에서 불을 때는 사람의

앞머리는 모두 꼬실라지고 말 것이다.

화구와 배기구를 전후로 하고 좌우에 손잡이를 하고 있는 형태는 매우 일반적인 형태로 남아 있다.

조선 영조 때의 화가 학산 윤제홍(鶴山 尹濟弘, 1764(영조40)~?)의 석매도에는 그 형태가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기물 도록이나 박물관 도록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이다.

불을 때면 재가 남기 때문에 손잡이를 양쪽에 만들어야 한다.

물론 기존의 화덕의 구조를 살펴보면 바닥 자체면이 없는 것도 있다.

화덕만 들어내면 재가 그대로 땅(바닥) 표면에 남게 되는 구조를 말하는데 이런 경우에도 손잡이는

좌․우 양쪽에 있었다.

화덕이 ①화구가 있어 뜨겁다는 점, 그리고 ②재가 남는다는 점, 또 ③화덕의 표면이 열전도율이 높다는 점을

고려하면 손잡이는 양쪽에 있어야 하고

뒷쪽에 있는 것은 배기구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화로는 주로 실내에서 사용되었고, 화덕은 대부분 실외에서 사용되었다는 논점도 숨어 있다.

구조와 기능면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다화茶畵를 예例로 들고 있지만 모두 화로의 형태가 아니라

실외에서 사용하는 화덕의 모양과 기능을 갖추고 있다.

김홍도(金弘道, 1745~?)의 <煎茶閒話圖>, <醉後看花圖> <蕉園試茗圖>와 이재관(李在寬, 1783~1837)의

山靜日長(병풍)에 나오는 <煎茶>나

<午睡(오수초족도)>에 나오는 화덕 역시 모두 같은 모양이다.

<高士閑日圖>에 나오는 것도 화덕의 모양을 그대로 갖추었다. 더구나 실외에서 사용하고 있다.

사진으로 첨부하지 않았지만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의 <松下飮茶圖> 등 차를 끓이고 있는

그림 모두가 마찬가지다.

이재관 筆 芭蕉題詩圖까지도 동일하다. 이들 김홍도, 심사정은 영조 때 사람이고 이재관은 정조 때 화가이다.

당대의 화덕의 형태를 자세히 알 수 있다.

그 형태가 바로《부풍향차보》의 화덕과 모두 흡사하다는 점이 더 흥미롭다.

▲ <사진 13> 조선시대 화덕의 예, 김홍도<煎茶閒話, 醉後看花, 蕉園試茗> 이재관<煎茶, 午睡, 高士閑日圖>

정민은《부풍향차보》에 제시된 각종 다구의 표준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진행사항을 점검해 보았다.

2016년 12월 21일 부안 청자박물관에서 ‘부안청자협회’가 진행한 사업으로‘천년 전통 도자다기 복원사업

결과 보고회’가 있었다.

복원은《부풍향차보》에 나오는 차도구를 3D로 시뮬레이션하여 복원하였다고 한다.

(사진 14) 화덕의 모양새가《부풍향차보》의 화덕의 형태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어 보인다.

솥을 거는 위쪽 주둥이가 터져 있다.

▲ <사진 14> 부안청자박물관에서 재현한 《부풍향차보》의 다구

재현이나 복원이라는 용어가 매우 무색하다.

이런 작업은 거의 같은 형태로 만들어서 실증을 목적으로 하고 그 실용성을 검증하기 위함인데,

탕관을 얹어야 하는 화덕의 주둥이 앞쪽을 터(언청이화덕) 탕관의 앉음새가 매우 불안정해 보인다.

물을 끓이다가 자칫 잘못하면 앞으로 쏟아질 우려가 있다.

이운해가 말한 ‘차를 우릴 때는 화덕에 탕관을 편하게 앉히고(爐可安罐)’이 부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다구의 표준화는《부풍향차보》 연구에서 지향할 바가 아니다.

차문화의 실용적 발전을 저해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시대에 따라 용기와 재질은 그 시대의 요구에 따라 변용되는 것이다.

실제로 부안 청자박물관에서 재현한 찻그릇을 보면 화덕의 경우《부풍향차보》의 다구와 흡사하지 않다.

관罐은 항아리 형태의 주전자를 말한다. 귀때는 없다.

다만 물을 뜨는 기구(표주박, 조롱박, 표자)를 사용하기 때문에 주둥이가 크고 뚜껑을 장착하고 있다.

찻자리에서는 탕관을 이르는 명칭이다.

그런데《부풍향차보》에서는 <朝鮮陶磁名考>에서 말하는 관罐의 형태와 주전자의 중간 형태를 띤다.

물을 떠서 사용하기 위한 주둥이가 크고 항아리 형태의 주전자를 연상하게 한다.

주둥이가 있고 뚜껑이 있는 상층부는 오늘날 사용하는 탕관의 형태이고, 하층부는 허리가 잘록하고 엉덩이가

펑퍼짐하지 않은 주전자의 형태를 닮아 있다.

손잡이는 가로형이 아니고 세로형이어서 탕관 손잡이보다 주전자의 손잡이에 가깝지만《부풍향차보》에서는

화덕 위에 올려놓고 물을 끓인 탕관의 역할과 용도로 사용되었다.

▲ <사진 15> 영조의 태항아리

관缶는 액체를 담는 그릇이라는 뜻이다. 배가 불룩하고 목 좁은 아가리가 있는 질그릇이다.

그래서 찻그릇으로써는 다관을 말한다.《부풍향차보》에서도 다관의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용량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4斛, 16斗들이이다.

《부풍향차보》에서의 缶의 형태는 오늘날 차 주전자로 쓰는 다관의 형태와는 매우 거리감이 있다.

그 형태가 마치 태항아리를 닮았다.

부안 청자박물관에서 복원한 缶 <사진 14>도 조선시대 태항아리와 흡사하다.

<사진 15>는 당시에 왕가에서 사용한 영조의 태항아리이다.

이운해나 황윤석이 활동했던 시기도 영․정조 시기이기 때문에 기능은 다르지만 형태면에서 상호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단지 태항아리와의 다른 점은 손잡이처럼 보이는 고리(뚜껑과 같이 묶어 고정하기 위한 장치)가 2개와 4개라는

차이이고, 그 고리의 크기 차이가 있을 뿐이다.

도자 전문가들의 면밀한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종鍾은 잔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곡식을 되는 양의 한 단위이기도 하지만 흔히 찻잔보다 큰 형태를 말한다.

차종茶鍾은 소위 탕탄湯呑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종자鍾字가 붙은 그릇은 종상鍾狀 소형小形의 완으로써 종자를 쓰는 수도 있다.

이상의 그릇에 뚜껑이 있는 것은 그 이름 위에 합자盒字를 붙여 부른다.

여기서의 종鍾은 잔盞을 따로 두고 있기 때문에 茶童(공도배)의 역할이 필요했을 것이다.

다동은 물식힘사발이 없는 우리 찻자리에서 罐․缶와 盞 사이에서 차를 나르는 역할을 담당했다.

차를 나르는 역할은 사찰에서 다동(다각)이 담당하였기 때문에 그 역할의 그릇을 아이 동(童)字를 써

다동이라고 한다.

그래서 한쪽에 손잡이가 있고, 뜨겁게 마시는 차의 온도와 향을 유지하기 위한 뚜껑을 장착하고 있는 것이다.

▲ <사진 16> 탁잔과 찻잔의 비교(朝鮮陶磁名考)

盞은 차를 따라 마시는 도구인데,《부풍향차보》의 盞은 일반적인 잔의 형태보다 독특하다.

해석이 분분하지만 탁잔으로 사용되는 잔의 형태를 띠고 있다.

<사진 16>와 같이 탁잔의 형태와 매우 흡사한데, 뚜껑 위에 엄지와 검지로 잡는 뚜껑꼭지(손잡이)가

없는 형태이다.

<朝鮮陶磁名考>에서도 종鍾과 잔盞의 높이와 깊이의 차이가 확연하게 다르다.

종鍾은 손잡이는 없지만 주둥이 쪽과 밑구덩 쪽이 거의 차이가 없이 반지름의 길이가 동일해 보인다.

▲ <사진 17>《부풍향차보》의 다반

盤(다반)은 개다리를 한 원형 소반(狗足盤)이다.

일상에서 쓰는 소반을 잔상으로 사용한 용례이다.《부풍향차보》의 소반은 상판에 다리만 붙인 형태이다.

여염집에서 일반적으로 쓰인 소반의 모습 그대로다.

<사진 18>과 매우 흡사하다. 장식이 적고 단조로우며 다리에 중대가 없는 개다리 형태를 하고 있다.

호족반은 소반 다리가 호랑이 다리같이 날렵하게 생겼다하여 호족반이라 불린다.

다리의 높이가 일반적이면서 반이 넓은 것은 식사용이지만 반이 넓으면서 다리가 훤칠하게 높은 것은 식사용보다는

집안의 혼례나 고사 등 각종 예식에 사용되었다.

떡이 담긴 시루를 올려놓고 고사를 지낸다하여 시루반이라고도 부른다.

▲ <사진 18>, <사진 17>과 닮은 소반

개다리소반(구족반)은 상다리 모양이 개의 뒷다리처럼 구부러진 막치 소반을 일컫는다.

옛 기물은 명칭이나 용도를 정확하게 서술해야 한다.

<朝鮮陶磁名考>를 쓴 아사가와 다쿠미(淺川 巧, 1891~1931)는 일찍이 이것을 걱정하였다.

이운해는 찻그릇의 바른 이름을 찾아주고 용도와 기능에도 맞는 찻그릇 규명究明에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 <사진 19> 해주반, 통영반(竹節盤), 호족반, 나주반

추기

右 李弼善運海知扶安縣 與其季前正言重海及從叔 曾游寒泉門下者 商確譜製者也 余亦爲其有用

錄來今二十年 尙在巾衍 而弼善兄弟 俱作古人 哀哉 姑志下方 以示兒輩 丙申五月十四日 頤翁

其從叔之子一海進士 與趙裕叔同硯云.

이 茶譜는 필선 이운해가 부안현을 다스릴 때 막내아우 전 正言 이중해 및 한천 문하에서 유학한 종숙과 함께

의논하여 보를 만들었다.

나도 유용할 것 같아 기록하여 가져온 지 2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보따리를 풀지 못했다.

그러나 이운해 형제는 모두 고인이 되었으니 슬프다. 우선 아래 방법을 기록하여 자손들에게 보인다.

병신년(1771) 5월 14일 이옹. 종숙의 아들 진사 일해와 조유숙과는 동문이라고 한다.
목포대학교 인문학부 연구전임교수 정서경 

 

- 부풍향차보 떡차 아닌 산차였을 수 도 있다 - 정서경 < 영.정조시대 부안 현감 이운해의

<<부풍향차보>>연구 4 - 차와문화 : 2018.07.30

Ⅲ. 조선 차문화사의 향차문화 전승과 미래가치

향차는 고려말엽인 1200년부터 1400년경까지 문헌에 나타나는데, 충렬왕 18년(1292)에는 원나라에 예물로

보내기도 했던 고급단차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원나라에 귀화한 고려인의 후손으로 요양행성평장정사遼陽行省平章政事인

홍군상洪君祥이 원나라로 돌아갈 때 고려의 홍선洪詵장군을 원나라에 함께 보내어 향차香茶와

목과木果(모과)등을 바쳤다.

진감국사眞覺國師는 ‘정신이 가물가물하여 잠 이룰까 두려우니, 향차香茶를 부지런히 끓여야겠네’라고 했고,

이규보李奎報도 ‘일곱 잔의 향차香茶는 겨드랑이에서 바람을 일으킨다’고 했다.

조선 초에도 향차香茶를 볼 수 있다.

향차를 만드는 법은 1330년에 지은 원나라의 ?음선정요飮膳正要?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을 참고하면,

향차는 차와 여러 가지 향기 나는 약재를 갈아 멥쌀로 쑨 죽과 섞어 떡 모양으로 박아낸 단차였던 것 같다.

만드는 방법이 번거롭고 잎차가 성행됨에 따라 계승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향기로운 차를 뜻할 때는 방차芳茶․ 방명芳茗이란 말을 썼으며 향차香茶라고 한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정황은 부풍향차가 단차(떡차)가 아니었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제법에서 차의 제다법이 아니라 차에 향약재를 가미하는 단계의 제다법만 남은 상황에서 떡차로 단정하는 것은

부풍향차의 특수성이나 다양성을 배제할 우려가 짙다.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차인이었던 변계량卞季良(1369~1430)이 남긴 시에도 향차香茶가 보인다.

<西京使相容軒李公惠石銚以詩答之ㅡ서경사인 상용헌 이공이 주신 돌남비에 시詩로써 화답하다>라는

시詩인데, ‘향차활화팽산천香茶活火煮山泉  불꽃이 솟는 불과 산의 샘물로 향차香茶를 달여서

일완재경골욕선一椀才傾骨欲仙 한 주발에 조금 기울이니 몸은 신선이 될 것 같네.’라고 읊고 있다.

향차는 1292년보다 200년 전인《동문선》에 기록이 남아 있는데, 고려 문종(1046~1089) 때

혜소국사(慧炤國師, 972~1054)에게 드리는 제문에 향차가 등장한다.

‘모년 모월 모일 계족산 정혜사 사문은 삼가 향차와 서수의 전으로서 공경히 당산개창 시 혜소국사

영령에 제사 드리나이다.’라고 되어 있다.

약용차란 질병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것을 목적으로 차를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차는 음료이기 이전에 오랜 기간 질병을 치료하는 약재로 이용되었으며, 그 이유는 차가 가지는 성분의 대부분이

건강에 유익하고 독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 널리 이용되었던 약용차의 문화가 창의적으로 계승되지 못한 것은 차를 이용하는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차문화를 연구함에 있어 음차飮茶와 다례茶禮 위주의

문화만이 중요시되어 왔기 때문이다.

약용의 차는 탕湯, 환丸․고膏, 차음茶飮 등 다양한 형태로 질병치료로 이용되었다.

차 처방 이외에도, 필요에 따라 단방單方 약물 한두 가지를 달여서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경우에는 개별

약물 뒤에 ‘煎湯’, ‘煎’을 붙여서 칭하였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서 확인되는 차는 중요한 치료수단의 하나로서, 가벼운 질환을 다스리거나

湯劑의 효과를 보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차음茶飮을 달여 올리는 방식에는 湯劑와 마찬가지로 劑入과 煎入이 있는데, 이는 왕의 하교에 따라 정하였다.

이렇듯 ?승정원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향약을 중심으로 하는 많은 의서들이 발간․보급되었고, 이러한 의서의 보급은 약용차의

보급에도 기여하였다.

당시 약용차는 환, 가루, 탕 등 매우 다양한 형태로 이용되었다.

처방 부위로는 내용內用과 외용外用에 모두 쓰였고, 특히 일상에서 자주 발생하는 감기나 체증, 두통, 설사 등의

질병에 주로 처방되었다.

또한 단방으로 처방되는 경우도 다수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응급처치용으로도 많이 이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은 약용차가 왕실뿐만 아니라 일반서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이용된 이유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의서들은 일반백성들도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향약중심으로 편찬되었다.

특히 향약의 하나인 차는 감기나 두통, 체기, 열병, 중독 등 일상생활에서 자주 일어나는 질병에 이용되었고,

또 단방으로 처방되는 경우도 많아 일반백성들에게 널리 이용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차는 감기, 설사병, 추위나 더위로 오는 병, 체증, 가슴앓이, 고기의 독, 임질, 학질, 두통, 염병 등 여러 가지

질병을 치료한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떫은 것은 임질에 효과가 있다고 하였으며, 여기서 떫은 것은 늦게 채취한 노차老茶를 의미한다.

또 마지막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여기에서 언급한 효능은 모두 직접 경험을 통하여 터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차에 인삼이나 생강, 복령을 넣어서 약으로 마시기도 하고

渴思茶鼎煮蔘笭, 예로부터 약효가 알려진 뽕잎을 넣어서 약용으로 마시기도 했다.

(桑茶香潤更搜腸) 또한 “병후에 메마른 창자 우레 소리 들리니, 생강과 인삼을 차에 잘라 넣어 끓여 마신다

(枯腸病後如雷吼 手切薑蔘點小茶-(夜吟))고 했다.

이 밖에도 약 처방에 차가 들어 있는 경우를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단차는 신선들이 먹는 불로장생의 만병통치약이라든가, 비싼 약재를 구하기 힘든 일반 백성들에게 차는

가정상비약 또는 응급처치용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차를 약으로 마신 흔적은 근․현대로 이어지는 전승적 맥락도 파악된다.

이와 관련하여 지리산에서 70년째 차를 만들고 있는 정재연 할머니(경남 산청군 시천면 동당리) 역시

차를 약용으로 마셨던 기억을 구술했다.

▲ 정재연할머니.

친정은 현재 살고 있는 동당리에서 약 5리 정도 떨어져 있는 내대(거리미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신천리 보안마을이다. 자연부락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그렇지만 거의 한동네나 마찬가지이다.
친정 마을인 보안에는 신천국민학교가 있다.
지금 동당리의 아이들은 친정 마을의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할머니는 신천국민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친정어머니의 찻일과 가사를 돕다가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 박종숙(朴鍾淑, 1934~2004)씨와 혼인하고
 현재 살고 있는 시댁 마을인 동당마을로 들어와서 현재까지 살고 있다.
당시에는 얼굴도 보지 않고 부모들이 정혼하면 시키는 대로 했던 시대라
사랑이 군대에 갔다가 휴가를 받아 집에 온 틈을 이용해 결혼해서 살았다.
6남매 중에 사랑은 장남에 장손이었다.
며칠 만에 사랑은 군대로 귀대하고 혼자서 시집살이를 시작한 것이다.
그때부터 봄이 되면 시어머니의 찻일을 도왔는데 고된 시집살이에 병이 나면 늘 작살차를 마셨다.

약으로 복용한 것이다. 당시에는 대대적으로 제다를 많이 했던 때는 아니고 그저 식구들
약으로 만들어 먹는 것이 목적이었다.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 이거 달이라, 배가 아프다고 해도 이거 달이라, 고마 몸살이 나도 이거 달이라 해서

약으로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다시 찻일하고 밭 매고 그렇게 고된 시집살이였다.

차를 뜨겁게 푹 끓여 마시고 땀을 내고 나면 몸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아 만병통치약쯤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땀을 빼고 몸을 갱신했다. 또 설탕을 큰 숟가락으로 하나 타서 마시면 맛있는 음료였다.

모든 병에 오로지 약은 한 가지 작살차였다.

설탕도 나중에 말이지 시집가서 당시에는 사카리라고 단맛을 내는 재료를 넣고 마셨다고 한다.

또 토종벌꿀을 한 숟가락 떠 넣고 휘 저어서 마시기도 했다.

이렇듯 고려시대부터 향차는 조선시대, 근․현대까지 전승되고 있다.

오히려 오늘날에는 블렌딩티(Blending tea)라든가 플레이버리티(Flavory tea)라는 용어로

일반인들에게 더 친숙하다.

전통적으로 향차는 일반백성에 이르기까지 널리 이용된 약용차 중의 하나였고, 음료로서의 기능보다

약재로서의 기능이 더 크게 작용했다.

또한 약차는 조선시대 향약의 전통위에 치료 경험이 축적되면서 간단한 단방약에서부터

일상상음용으로까지 발전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부풍향차는 지역 차문화의 기준을 설정하고 있다.

 

Ⅳ.《부풍향차보》의 음․장다법과 역사문화적 의의

부풍향차는 차 여섯 냥에(茶六兩) 약재 한 돈을 매양 각각 넣고(每各一錢) 물 두 잔을 붓고(水二盞) 반이

될 때까지 끓이다가(煎半) 차를 휘저어 섞어 주면서 불에 건조한다.(拌茶焙乾) 여기까지가

부풍향차의 제다법이다. 완성된 차를 베자루에 담고(入布帒) 건조하고 서늘한 곳에 둔다.

(置燥處) 이 대목은 부풍향차의 장다법이다. 마실 때는 깨끗한 물 두 종을(淨水二鍾) 먼저 탕관에 붓고 끓인다.

(罐內先烹) 탕관의 물이 여러 차례 끓어오르면 다관에 따른다.

(數沸注缶) 다관에 차 한 냥을 넣고(入茶一錢) 뚜껑을 닫고 차가 진하게 우러나면(蓋定濃熟) 뜨겁게 마신다.

(熱服) 여기까지는 부풍향차의 음다법이다.

차를 우릴 때는 화덕에 탕관을 편하게 앉히고(爐可安罐), 다반에는 다관과 찻잔 찻종을 놓(고 차를 마신다.)는다.

(盤容置缶鍾盞) 여기는 찻그릇과 찻자리를 고스란히 정리한 부분이다.

제다에서 찻자리까지 차를 세는 단위는 두 번 나온다.

냥兩(茶六兩-차)과 전錢(入茶一錢-차)이 그것이다.

향약재를 가미하기 위하여 차를 넣을 때는 냥兩이고 약재랑 섞어 만든 차를 음다할 때는 錢이다.

 또 차에 향약재를 넣을 때 향약의 단위도 전錢(每各一錢-약재)으로 쓰고 있다.

 단위의 기준이 애매모호하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부풍향차가 떡차로 추정되는 단서로 이상의 자字를 들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단위들이 부풍향차의 형태를 단정하는 결정요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제다에서 장다,

음다를 포함한 찻자리까지를 정리하면 다음 <표 1>과 같다.

방법    순서  공정                                                                   원문                    재료와단위(방법)    비고       

제다    (1)    차 여섯 냥에                                                        茶六兩                   차/여섯 냥

          (2)    약재 한 돈을 매양 각각 넣고                                   每各一錢                약재/한 돈

          (3)    물 두 잔을 붓고                                                    水二盞                   물/두 잔

          (4)    반이 될 때까지 끓이다가                                        (煎半)                    차와 약재/반, 湯

          (5)    차를 휘저어 섞어 주면서 불에 건조                          拌茶焙乾                차․불(휘저어 섞음)

          (6)    완성된 차를 베자루에 담고                                     入布帒                   차․베자루/베자루

장다    (7)    건조하고 서늘한 곳에 보관                                     置燥處                   습기배제, 청량유지

          (8)    마실 때는 깨끗한 물 두 종을                                   淨水二鍾                물/두 종

          (9)    먼저 탕관에 붓고 끓이기                                        罐內先烹                탕관/일탕법

         (10)    탕관의 물이 여러 차례 끓어오르면 다관에 따르고       數沸注缶               탕관․다관(상투법)

음다   (11)   다관에 차 한 냥을 넣고                                           入茶一錢               차․다관/한 냥

         (12)   뚜껑을 닫고 차가 진하게 우러나면                            蓋定濃熟               차․뚜껑

         (13)   뜨겁게 마신다.                                                      熱服                     (일탕상투법)

         (14)   차를 우릴 때는 화덕에 탕관을 편하게 앉히고              爐可安罐               차․화덕․탕관

다석   (15)   다반에는 다관과 찻종 찻잔을 놓(고 마시)기.              盤容置缶鍾盞          다반․다관․찻종․찻잔

<표 1>과 같이 제다에서 찻자리문화까지를 정리하면 매우 일목요연하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운해가 2) 차본(茶本)에서 서술한 내용을 제다로 볼 것인가?

차의 기본적인 상식선으로 볼 것인가의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기 발표된《부풍향차보》의 연구에서는 2) 차본(茶本)을 제다법으로 인식하여 부풍향차를 떡차로 해석하였다.

(각주 4), 5)) 그러나 필자의 견해는 다르다.

이운해는 차의 제법을 따로 기술하였다.

만약에 떡차로 제다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면 제법에 차를 만드는 방법부터 기술하였을 것이다.그러나

이운해는 제법에서 차에 향약재를 섞어 흡수되도록 하여 가향의 향차 만드는 법만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방법은 섞어 끓이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흡착이나 착향은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다.

필자가 분류한 ‘2) 차본(茶本), 차의 기본적인 기능과 작용’에서 ‘自十月至月臘日-찻잎은 시월에서

동지달 납일까지도 채취한다.’를 보면 이운해는 부풍향차를 늦봄이나 여름에 만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래서 음다법도 여름에 주로 사용하는 상투법을 썼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운해는 산차를 만들었을 개연성도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4) 제법에서 말하는 제다법이 산차의 상태일 때 차의 향을 가미할 수 있는 반차의 공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전에서는 떡차의 형태라는 것을 찾을 수 없다.

차 여섯 냥(茶六兩)이라는 도량형도 산차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운해는 늦봄이나 여름에 찻잎을 따서 산차를 만들었지만 차의 상식선에서는 ‘

흔히 自十月至月臘日-찻잎은 시월에서 동지달 납일까지도 채취한다.’라고 덧붙였다.

<표 1> ①에서 ⑤까지를 보면 부풍향차를 떡차로 만들었다는 언급은 전혀 하지 않았다.

제법에서의 차와 음다법에서의 차가 동일한 차가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완성된 차를 장다할 때의 방법론에도 차와 약재를 따로 분리한다는 말도 없다.

향차를 만들기 이전의 제다법이 기술되지 않았기 때문에《부풍향차보》에서는 차의 형태를 논하기보다

향약재를 첨가한 제다법과 차의 효능에 핵심이 있다.

더욱이 장다법에서 이운해는 ‘入布帒-건조한 차를 베자루에 담고’라 기술하였다.

우리 차문화사에서 떡차를 베자루에 담은 기록은 거의 없다.

꼬챙이나 끈에 꿰어서 시렁에 걸거나 처마 밑에 꿰미로 보관하여 상온에 자연(후)발효를 위한

장다법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정황은 이운해의 부풍향차의 원형을 그대로 드러낸다.

기존의 연구가 2)의 차본(茶本), 즉 차의 기본적인 상식을 제다법으로 해석하고 부풍향차를 떡차로 보기

때문에 부풍향차의 기존 연구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던 것이다.

부풍향차는 음다법과 장다법에서 이미 2) 차본(茶本)이 제다법이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이것이 이운해가 말하는‘方製新’이다.

부풍향차를 떡차로 볼 수 있다는 것은 ‘入茶一錢-다관에 차 한 냥(돈)을 넣고’인데, 이것 역시 차의 부피나

무게를 재는 하나의 단위이고 방법일 뿐이다.

그렇다면 향차 제다 이전의 제다법이 없어 茶本을 제다로 본다면 이‘方製新’에는 ①생엽을 사용했다는 점

②차를 찌지 않았다는 점 ③향약재를 사용하였다는

점까지를 포함한다. 이운해의 원본《부풍향차보》의 발굴이 시급하다.

《이재난고》의 필사에는 필적이 다소 차이가 있어 보이고, 다구를 표현한 그림 역시 덧붙인 흔적이 있다.

원본 훼손 가능성도 있어 보이지만 이운해의 원본은 또 다른 연구분석으로 부풍향차를 재조명하게 될 것이다.

첨언하자면 부풍향차는 향을 가미한 향약차다. 향약재를 휘저어 섞어 흡수되도록 하여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향차의 역사는 아주 오래 되었지만 부풍향차는 그 제다법 자체가 매우 독특하다.

전남 해안지역의 청태전이나 강진으로 유배 와서 다산(丁若鏞, 1762~1836)이 만든 다산의 떡차와도

그 제다법이 다르다.

오늘날 함평(부루다원) 등에서 생산되고 있는 떡차의 형태와도 많은 차이가 있다.

과연 부풍향차가 떡차였을까? 지역 차산업의 발전방향을 견인하여 부안․고창의 지역적 향토성이 짙은 차로

복원하는 이․과학적 연구가 절실하다.

향차의 제다․음다법의 고찰로 이운해가 제안하는 찻자리도 복원 가능하다.

부안을 중심으로 지역 차문화의 독창성을 발휘할 때다.

 

Ⅴ. 마치며

《부풍향차보》는 지역성이 짙은 부풍․무장의 향차를 기록하였다.

이운해(李運海, 1710~?)가 부안 현감으로 부임한 翌年 1755년에 남긴 차에 대한 기록이다.

조선시대 차의 기록으로는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다.

당시 무장의 선운사 일대 찻잎을 채취하여 차를 만들고 지명을 부쳐《부풍보》라 제하고 묶은 책이다.

제다법과 마시는 방법, 차의 명칭과 도구까지 상세히 계량하여 기술하였다.

길지 않은 전문에 차의 생산 환경에서부터 가공․제다․장다․

음다의 방법과 찻자리에서 쓰이는 다도구를 실측하여 그림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

실증적 토대를 중심으로 한 유례없는 독자성이 돋보인다 하겠다.

그러나 그 원본이 현존하지 않고 황윤석이 필사하여《이재난고》에 일기 형식으로 남아 있다.

차 여섯 량에 차명에서 말한 재료 각 한 돈이라고 했으니, 일상에서 발병하기 쉬운 한 가지 증상에 차와

두 가지 약재를 각각(各) 넣어 상음할 수 있는 향차로 만들었다.

부풍향차는 향을 가미한 향약차다. 향약재를 휘저어 섞어 흡수되도록 하여 만들었기 때문이다.

완성된 차는 7종의 향차다.

국향차菊香茶, 계향차桂皮茶, 매향차烏梅茶, 연향차黃連茶, 유향차香薷茶, 귤향차橘皮茶,

사향차山査肉茶라 하였다.

그림으로 첨부한 찻그릇의 조명은 통시적 상황 전달이 매우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당시에는 물식힘사발을 사용하지 않았고, 차는 상투하여 뜨겁게, 一湯上投法으로 마셨음을 알 수 있다.

炉․罐․缶․鍾․盞․盤(화덕, 탕관, 다관, 찻종, 찻잔, 다반) 6종의 찻그릇 그림을 통하여 영․정조 시대의 지역

차문화의 실상을 면밀히 밝혀냈다.

본 연구는 우리 차의 보편성을 이해하고 개별적․지역적 차문화의 특수성을 밝혀내는데 그 의의와 가치가 있다.

이렇게 차에 다른 향을 가미하여 마시는 역사는 중국 당대(唐代) 육우의《다경》에서도 발견된다.

그래서 흔히 香茶, 香藥茶로 정의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차의 음다문화가 내밀해지는 경향이 있었으나 면면히 이어져 온 역사를 반복한다.

해안지역이나 변방에서는 향약을 중심으로 하는 많은 의서들의 편찬으로 향약의 하나였던 약용차의 이용과

보급은 더욱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시대적 흐름으로 이운해는 향차 문화의 단편으로 《부풍향차보》를 기록으로 남겼다.

 ‘1755년에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다서’라 하지만 필자의 소견은 조금 다르다.

그렇게 단정하면《부풍향차보》이전의 우리 차문화사는 무엇으로 말할 것인가가 의문이다.

《부풍향차보》이전에 이목의 <茶賦>가 있고, 다서는 아니지만 분량이 비슷한 차시 기록 역시 다양하다.

자료를 면밀히 살펴보면 제다뿐 아니라 찻일 전체를 분석할 수 있는 자료들이 상당하다.

문예성을 띤 작품이든 역사성을 띤 작품이든 차문화사를 고구할 수 있는 자료로써 충분하다.

《다경》은 六之飮에서 파, 생강, 대추, 귤껍질, 수유, 박하 등을 넣고 마시는 것은 도랑에 물을 버리는 것과

같은데 세상은 이런 습속이 그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차의 진성을 빼앗는다는 염려에서이다.

초의는《다신전茶神傳》에서 ‘차에는 스스로 가지고 있는 본래의 색, 향, 미가 있으므로 과실이나 향기가

있는 풀을 쓰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소제小題를 ‘점염실진(點染失眞)’이라 붙였다. 풀이하면 잡것이 섞이면 진을 잃는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해석으로 차의 변용적 음다문화를 천시하는 풍조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우리 차문화사에서 향차나 약차의 제다 의도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부풍향차보》는 ‘우리 차문화사의 편년을 앞당기는 중요한 자료’라기보다 영․정조 시대의 지역 차문화의

특수성이 강조된 다서다.

조선 전기의 이목의 <다부>가 우선 우리 차문화사에서 우선되는 기록이다.

문예성을 띈 작품이기 때문에 다서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견해는 매우 위험하다.

실제 제다나 차생활의 실상이 없는 점을 생각하면 이운해의《부풍향차보》는 실제상 최초의 다서로 보아

큰 문제가 없다고 분석하고 있지만 우리 차문화사에서

조선 전기를 위시한 제반 기록들의 우수성을 묵과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김시습․서거정의 차시자료에서부터 차문화의 일상이나 의례의 기록들을 폄하할 수는 없다.

기존 연구에서는《부풍향차보》에 제시된 각종 다구의 표준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고,

《부풍향차보》가 한국 차문화사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인식 제고에도 기여한다고 하였다.

그러나《부풍향차보》의 위상은 고민되는 부분이 있다.

《부풍향차보》는 순수하게 차를 이용하여 만든 제다 방법이 아니고 제다법 자체 역시 전통이라든가

역사적 의의에서 매우 벗어나 있다.

더욱이 단방약 정도로 제다되어 사용된 흔적으로 봐서 우리 차문화사를 대변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부풍향차보》 이전의 우리 차문화사의 면밀한 고구가 필요하다.

제다법의 역사성, 전승성 그리고 다구의 기능이나 재해석이 필요할 것이다.

무엇보다도《부풍향차보》는 추론이 강한 고고학적 자료가 아니다.

인문학적 연구가 상상력을 기반하기도 하지만 실증적 차문화의 기록을 상상이나 추정으로 해석하는 데는

몇 가지 오류가 발견된다.

가장 큰 것은 ① 떡차라는 점 ② 맥과 즉 겨울에 보리알 같은 차를 따서 만들었다는 점

③ 香茶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차를 뜻한다는 鄕茶라는 점

④ 찻잎을 쪄서 떡차로 뭉쳐 만들었다는 점

⑤ 향약재를 한 가지만 넣었다는 점 이외에 다기를 분석하는 몇 가지 오류들이다.

부풍향차는 역사성과 시대성이 반영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매우 실효성을 띤다는 점이다.

부풍향차는 지역적 특수성을 띠고 있는데 떡차의 보편적인 제다법으로 부풍향차를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분석의 오류가 발생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부풍향차가 가진 ‘方製新’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핵심을 상실하게 된다.

《이재난고》는 1757년 6월 26일자 일기 끝에 실려 있다.

한국 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탈초본으로는 제1책 172쪽과 173쪽에 해당된다.

《이재난고》에 기록된《부풍향차보》의 남은 분량은 단 두 쪽이다.

우리 차문화사에서 바라는 것은 이운해의《부풍향차보》와 상확보(商確譜)의 발굴이다.

원전의 발굴 확인․연구분석이 간절하다.

이운해의 원본은 또 다른 연구분석으로 면밀한 천착이 가능하게 할 것이다.

 2005년부터 저관세 티백류와 발효차의 수입 증가와 국내 과잉생산 등으로 국산 녹차의 재고가 쌓이고 있고,

차의 안전성 문제로 소비가 더욱 위축되고 있어 3600여 농가(2015년 차 생산실적현황)들의 고민과 한숨은

갈수록 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 차문화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차 산업의 절대적 대안이 필요할 때다.

외국 차 수입을 억제하는 길은 우리 차산업의 국가경쟁력을 시급히 높이는 길 뿐이다.

생산자단체와 연구기관의 협업으로 차종 및 제품의 다양화, 차별화, 소비의 대중화, 세계화를 이룩하도록

기술개발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지역의 차문화를 연구하고 지역 중심의 차문화산업의 경쟁력을 한 단계 높이는 발판을 마련하고 활용적

모색을 꾀할 시점이다.

이러한 연구의 확산이 절실하다는 것은 이미 학계와 문화계, 산업계에서 숙제가 된지 오래다.

더욱이 작금의 음료시장에서는 향을 가미한 가향차(Flavory tea)나 두 종류의 차를 섞어 만든

블렌딩차(Blending tea)가 젊은층 사이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시장의 수요에 부합하고 우리차 산업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차원에서 가향차의 연구는 시급하다 할 것이다.
목포대학교 인문학부 연구전임교수 정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