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현의 ‘인물로 보는 차 이야기’] (2) ‘천목 다완’ 대중화 주역 ‘송나라 휘종’
탕색 안 보이는데…검은색 찻잔 쓴 까닭은
중국 차 문화와 역사가 가장 화려했던 시기는 송나라 때다.
송나라에서도 정점을 찍은 시절이 송나라 마지막 황제나 다름없는 휘종 때다.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만든 ‘용봉단차(龍鳳團茶·찻잎을 곱게 갈아 용과 봉황 무늬를 새긴 차)’가 유행했고,
그렇게 형식에만 치중하던 왕조는 결국 이민족 침입에 힘없이 무너졌다.
어느 날 휘종이 잠깐 낮잠을 잤다. 꿈속에서는 비가 내렸다. 비가 그쳤을 때 그는 먼 하늘 한곳에서 검은
구름이 걷히는 것을 봤다.
두꺼운 구름이 흩어진 자리에 하늘빛이 보였다. 쨍하게 짙푸른 색이 아니라 흐릿한 하늘색이었다.
그 아름다움에 탄식을 내뱉고 잠에서 깬 휘종은 붓을 찾아 몇 글자를 적었다.
‘날이 갠 뒤 구름이 흩어진 곳에서 나오는 하늘색’ 그리고 자기공에게 이 하늘색 그릇을 만들어오라고 시켰다.
자기공은 온갖 노력을 기울인 끝에 날이 갠 후 흐릿한 하늘색의 그릇을 만들어냈다.
유약에 마노를 갈아 넣은 결과였다.
휘종은 매우 만족해했다. 이 그릇이 송나라 5대 명요에 속하는 여요다.
여요는 휘종 때 만들어져 북송이 망할 때까지 약 20년간 생산됐다.
그 20년 동안에도 그릇 10개 중 9개는 깨버리고 정말 완벽하다 싶은 1개만 황제에게 진상했다.
그래서 현재 남아 있는 여요는 매우 적다.
그러나 정작 휘종 황제는 차를 마실 때 검은색 유약을 바른 흑유 그릇을 썼다.
송나라 사람들은 왜 검은색 그릇을 썼을까?
탕색이 예쁘게 보이는 백자나 청자를 두고 굳이 검은색 그릇을 쓴 이유가 뭘까?
와인을 마실 때 투명한 잔에 따라 색을 관찰하는 것처럼, 차를 마실 때도 탕색을 관찰한다.
그런데 왜 휘종은 탕색이 보이지도 않는 검은색 잔을 썼을까?
용봉단차는 만들 때 잎을 압착기에 넣고 즙이 다 빠져나올 때까지 짜냈다.
즙과 기름을 다 짜내고 허연 섬유질만 남은 차를 이번에는 절구에 찧어 먼지같이 고운 가루로 만들었다.
이것을 용과 봉황이 새겨진 틀로 찍어냈다.
먼지처럼 고운 가루를 뭉쳐 만든 용봉단차는 우려 마시는 차가 아니다. 우선 차를 맷돌로 간다.
어찌나 고운지 차를 갈면 안개가 피어나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이 고운 가루를 잔에 넣고 물을 부은 후 대나무를 잘게 쪼개서 만든 솔로 저었다.
열심히 오래 저으면 하얀 거품이 생긴다. 어느 정도 거품이 올라왔다고 멈추면 안 된다.
거품이 단단하고 치밀하게 올라올 때까지 쉬지 않고 빠른 속도로 솔질을 계속해야 했다.
마침내 거품이 빡빡하게 올라오면 솔질을 멈췄다. 검은 잔과 단단하게 올라온 흰색 거품이 선명한 대조를 이뤘다.
이것을 송나라 사람들은 ‘거품이 잔을 물고 있다’고 표현했다.
송나라는 푸젠성에 있는 북원이라는 곳에 황실에 진상할 차만 만드는 특별 기구를 뒀다.
여기서는 차가 완성되면 먼저 테스트를 했다.
위에서 설명한 방법대로 차를 곱게 갈아 찻잔에 넣고 대나무 솔로 저어 빽빽한 거품이 올라오게 했다.
대개 여러 개 샘플을 동시에 테스트했는데 그중에서도 거품이 가장 늦게까지 꺼지지 않은 차를
제일로 치고 그 차를 진상했다.
이런 독특한 선별 업무가 나중에는 백성 사이에서 유명했다.
사람들은 누가 차 거품을 빽빽하게 올리나 내기를 했다.
백성들이 마신차는 물론 용봉단차가 아니었다.
그들이 내기에 쓴 차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잎을 찌고 말려 바로 갈아버린 가루차였다.
공정이 간단하니 가격도 저렴해 백성도 즐길 수 있었다. 이를 투차(鬪茶)라고 했다.
‘투’가 ‘싸우다’ ‘투쟁하다’라는 의미라 ‘투차’라 하면 차 때문에 일어난 전투로 오해할 수도 있겠으나
전쟁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 식으로 바꾸면 ‘내기’ 정도가 적당하겠다.
▶‘누가 차 거품을 빽빽하게 올리나’ 내기하는 ‘투차’ 유행
‘송나라 사람들이 차 거품 올리는 것이 일본 사람들 다도와 흡사하다’는 생각을 하는 독자도 있을 테다.
일본 사람들도 고운 가루차를 다완에 담고 물을 부은 다음 대나무 솔로 저어 거품을 낸다.
둘이 유사한 것은 송나라 다법이 통째로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송나라로 불교 유학을 갔던 스님들이 이 다법을 들여갔다.
그들은 검은색 찻잔도 같이 가져갔다. 일본 사람들은 이 검은색 찻잔을 천목 다완이라고 불렀다.
천목이라는 용어는 중국에서는 쓰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검은색 유약을 발랐다 해서 흑유 다완이라 하거나 검은 그릇을 만든 요의 이름을 따서
건요 혹은 길주요, 자주요라고 부른다. 천목산은 중국 저장성 항저우시에 있는 불교 명산이다.
일본에서 유학 온 스님들이 이곳에서 주로 공부했다.
그들은 일본으로 돌아가 검은 찻잔을 천목에서 가져온 것이라 소개했다. 천목 다완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나왔다.
용봉단차 전통은 중국에서는 오래가지 않았다.
송나라 다음 원나라 때는 오직 황실에 진상하는 용도로 조금 생산됐고, 명나라 들어서는 초대 황제 주원장이
용봉단차를 만드는 백성의 고생이 심하다 하여 전면 폐지해버렸다. 민간에서도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송나라 다법을 통째로 가져간 일본에서는 계속 말차 다법이 살아남았다.
1323년, 원나라가 망하기 25년 전, 중국 저장성 닝보시에서 출발해 일본 하카타항으로 향하던 거대한 상업선이
우리나라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그로부터 600여년이 지나 이 배가 인양됐고 또 몇 십 년의 연구와 분류 작업을 진행한 끝에 2016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가 열렸다. 신안 배에서 나온 그릇은 대개는 용천요라는 청자였지만,
한구석에 검은 천목 다완 몇 개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전시돼 있었다.
수작이라 할 수는 없는 그릇이었지만 일본에서는 중국과 달리 말차 다법이 유행했고 여전히 중국으로부터
천목 다완을 수입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보여준다.
송나라에서 가져간 천목 다완 중 특별히 빼어난 몇몇 수작은 일본에서 국보로 지정돼 있다.
검은색 유약에 토끼털 같은 무늬가 촘촘히 새겨진 그릇이나 자고새의 얼룩덜룩한 무늬를 빼다 박은
검은색 자고 무늬 그릇 등이다. 이 두 가지 종류의 천목 다완은 현재는 완벽하게 재현돼 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검은 바탕에 푸른색 무늬가 영롱하게 새겨진 천목만은 아직 재현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휘종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송나라에서 행복하게 살던 시절의 휘종은 신하들을 위해서
종종 차 거품을 올렸다. 황제는 본래 몸을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오직 밥 먹을 때 숟가락 드는 일과 글씨 쓸 때 붓을 잡는 일만 자기 손으로 했다.
그런 황제가 팔이 아플 때까지 대나무 솔을 저어 빽빽하게 거품이 올라온 차를 신하에게 대접했다.
상상만으로도 낭만적이지 않은가! - 매경이코노미 제2087호 - 2020.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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