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차 이야기’] (3) 언제부터 차를 마셨는지 아시나요? - 이코노미 - 2020.12.23
중국에서 ‘현대의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이가 오각농 선생이다.
‘다성’이라 불리는 당나라 사람 육우가 쓴 ‘다경’을 최초의 차 전문 서적으로 일컫는다.
오각농 선생은 다경을 해설한 ‘다경술평’이라는 책을 썼다.
오각농은 1897년에 태어났다.
농업에 헌신함으로써 애국하겠다고 결심한 그는 평생 중국 현대 차 산업 발전을 위해 분투했다.
오각농은 젊은 시절 일본으로 유학 갔다 일본 사람들이 차의 시조가 달마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
달마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가 선종을 알린 이로 7년간 벽을 마주 보고 수행했다고 알려졌다.
그가 7년간 수행할 때 졸음을 쫓아내려고 자신의 눈썹을 뜯어 마당에 던졌는데,
그 눈썹이 차나무가 되었다는(혹은 그 눈썹이 떨어진 곳에서 차나무가 올라왔다는) 설이다.
오각농은 이 설을 싫어했다. 달마의 국적 때문이다. 달마는 인도 사람 아닌가.
당시 인도는 영국 식민지였다.
영국은 중국에 아편을 팔아 수많은 중국인을 폐인으로 만들었고, 아편전쟁을 일으켜 청나라를
패망의 길로 내몰은 주역이다.
게다가 1823년 인도에서 야생 차나무를 발견한 영국 사람들은
“영국령 인도에서 야생 차나무가 발견되었다.
그동안은 중국이 차나무 원산지로 알려져왔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영국령 인도야말로 차나무의 원산지다”라고 주장하며 몇 천 년 동안 세계에서 유일하게 차를
만들고, 차를 팔아 전 세계 은을 긁어모았던 중국의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내고 있었다.
이런 판국에 인도 국적 달마가 차의 시조라는 주장은 차의 원산지가 인도라는 주장과
아귀가 맞는 것이라 애국 청년 오각농은 몹시 분노했다.
중국 사람들이 차의 시조라고 믿은 이는 따로 있다. 신농이다.
옛 문헌에 신농이 사람들에게 불 쓰는 법, 그릇 만드는 법, 농사짓는 법을 알려주었다고 나와 있다.
중국인이 신농의 시대라고 믿는 때는 신석기 시대다. 신농은 6세기 인물인 달마보다
몇 천 년 앞선 사람이다.
신농은 세상 모든 식물의 맛을 봤다. 당시 사람들은 독풀을 먹고 죽는 일이 많았다.
신농이 그들을 가엾게 여겨 모든 풀을 맛보고 먹어도 되는 풀과 먹으면 죽는 풀을
구분해 알려주었다.
그런 신농이 어느 날 이 풀 저 풀 맛보다 72가지 독에 중독돼 죽기 직전, 우연히 옆에 있는
나무의 잎을 먹고 살아났다.
그 나무가 바로 차나무였다.
신농의 예를 들어 차 전문가들은 차가 해독 작용을 하고 그래서 최초에는 차가 약으로
쓰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이 역사인지 그저 내려오는 전설 같은 설화인지 입증할 길은 전혀 없다.
신농이 살았던 시대에는 문자가 없었다.
그에 대한 기록은 모두 훗날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젊은 시절 차의 시조는 달마가 아니라 신농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오각농조차 죽음을
앞두고는 “이제 와서 말인데 사실 신농이 차의 시조라는 것이 늘 의심스러웠다”고 고백했다.
중국 사람들은 언제부터 차를 마셨을까? 차에 관한 신빙성 높아 보이는 글이
등장한 것은 한나라 때다.
쓰촨성에 살던 왕포라는 사람이 쓴 ‘동약’에 관련 내용이 나온다.
왕포가 남편을 잃은 양혜의 집에 가서 그 집 종 편료에게 술을 받아 오라고 시켰다.
"돌아가신 나를 사올 때 외간 남자를 위해 술을 받아 오라 하지 않았습니다"라며
술 심부름을 거절했다
왕포는 화가 나서 “내가 네 주인이 되면 술을 사 올 테냐?” 하고 으르렁댔다.
사람을 사고파는 것이 합법인 시대였다.
편료는 그래도 끝까지 결기를 보였다. “어르신 그럼 계약서를 하나 씁시다.
내가 어르신 종이 되면 할 일을 전부 적으시오.
계약서에 없는 일을 시키면 난 하지 않겠소.” 왕포는 글솜씨가 좋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황제가 그의 글을 보고는 두말 않고 벼슬을 내릴 정도였다.
왕포는 황제도 감탄한 글솜씨로 편료가 해야 할 일을 줄줄이 적어 내려갔다.
새벽에 일어나 마당을 쓸고, 밥 먹고 나면 그릇을 깨끗이 씻는다.
평소에 방아를 찧고, 빗자루를 맨다.
우물을 파고 도랑을 치고, 울타리를 고치고 밭의 김을 맨다.
밭고랑 사이에 길을 내고, 움푹 패인 길을 메운다. 탈곡하고 대나무를 구부려 갈퀴를 만든다.
낫을 만들어 풀을 베고, 갈대를 엮어 돗자리를 만들고, 모시를 삼는다.
각종 신발을 짓고, 참새를 잡는다….
이는 ‘동약’에 열거된 내용의 10분의 1도 채 안 된다.
이 글을 보고 편료는 “그냥 아까 술 받으러 갈 걸” 하고 눈물 콧물 흘리며 울었다고 전해진다.
‘동약’에 이런 구절도 나온다. “무양에 가서 좋은 차를 사온다.” 무양은 쓰촨성에 있는 지명이다.
이미 상품으로 사고팔던 차가 존재했다는 의미다.
‘동약’이 쓰여진 때가 기원전 59년,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이다.
한나라 왕포가 쓴 ‘동약’에 “무양에 가서 좋은 차를 사온다” 문장 있어
그러나 오각농은 이 글도 전적으로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의 입장은 이렇다.
“ ‘동약’은 너무 해학적으로 쓰여 있어 진실성을 믿기 어렵다.
또 이 글을 정말 왕포가 썼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일리 있는 분석이다.
오각농은 왕포가 썼다고 알려진 글보다 더 확실한 증거를 찾고 싶었다.
그런데 그 증거가 갑자기 무덤에서 나왔다.
1971년 어느 날, 후난성 장사의 한 병원에서 방공호를 만드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한순간 땅에서 지독한 냄새가 나는 가스가 분출돼 나왔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살펴보는 와중에 한 명이 담배를 피우겠다고 성냥을 긋자 가스에
시퍼런 불이 붙었다.
그때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가 예전에 도굴 일을 하셨는데, 손 안 탄 무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고. 이게 귀신불이야.” 그의 말이 맞았다.
기원전 168년에 만들어진 후 1971년까지 2000년 넘게 도굴되지 않은 무덤이 발견됐다.
후난성 장사의 무덤은 열에 아홉은 이미 도굴됐다는데, 도굴되지 않은 채로 발견된
것만으로도 큰 뉴스감이었다.
무덤 주인은 ‘신추’라는 여성으로 밝혀졌다. 신추는 장사국 재상 리창의 아내였다.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신추 자신이었다.
액체에 보존된 시신은 여전히 말랑거렸다.
눈이 조금 튀어나오고 혀가 조금 부풀어 올랐을 뿐, 마치 잠자는 사람 같았다나.
신추의 위에서 참외씨가 많이 나왔다.
여러 종류 기생충도 발견됐다.
신추의 무덤은 그녀가 살아 있을 때 좋아했을 수많은 물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어제 만든 것처럼 붉게 빛나는 옻칠한 그릇이 쏟아져 나왔다.
(중국 사람들은 신석기 시대부터 옻을 썼고 한나라 때 옻칠 기술이 매우 발달했다.)
무게가 49g밖에 되지 않는, 잠자리 날개처럼 가볍고 화사한 실크 카디건도 있었다.
현재 박물관에서 49.5g짜리 복제본을 만들어서 전시 중이다.
현대의 기술로는 아무리 애를 써도 49g짜리 실크 카디건은 만들 수 없다고 한다.
이 무덤에서 차와 관련된 것이 나왔다.
대나무를 잘게 쪼개어 엮은 상자 앞에 ‘차 상자’라는 나무 이름표가 있었다.
오각농은 신추의 무덤에서 나온 대나무 ‘차 상자’야말로 중국인이 2000년 전에 차를
마셨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완성된 차의 시작에 관한 역사는 지금까지 굳건하다.
신정현 죽로재 대표 -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89호 (2020.12.23~12.29일자) 기사입니다.
'"차"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순한 "음료" 에서 "도"의 반열에 오른 "차" (0) | 2021.05.29 |
---|---|
티베트에 차를 전해준 당나라 문성공주는 누구 (0) | 2021.05.28 |
[신정현의 ‘인물로 보는 차 이야기’] (2) ‘천목 다완’ 대중화 주역 ‘송나라 휘종’ 탕색 안 보이는데…검은색 찻잔 쓴 까닭은 (0) | 2021.05.26 |
[신정현의 ‘인물로 보는 차 이야기’] (1) 차 사랑 지극했던 예술가 황제 ‘송나라 휘종’ -‘말차’ 기원은…백성의 고혈 짜낸 ‘용봉단차’ (0) | 2021.05.26 |
커피와 물, 함께 잘 마시는 습관 9가지 (0) | 2021.0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