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문인의 ‘평생의 벗’ 반열 오른 ‘茶’···초가집 화로 위 물 끓는 주전자 ‘최고의 풍류’

썬필이 2021. 6. 1. 09:39

[신정현의 ‘인물로 보는 차 이야기’] (8) 문인의 ‘평생의 벗’ 반열 오른 ‘茶’···

초가집 화로 위 물 끓는 주전자 ‘최고의 풍류’

명나라 초대 황제 주원장은 재임 기간 중 개국 공신과 부패한 관리 등 수십만 명을 죽였다.

한편으로는 백성의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원나라 통치 아래 미천하고 가난한 한족 집안에서 태어나 식구들이 배곯고 병들어 죽는 것을 직접 지켜본

처지라 백성에게 애틋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용봉단차를 폐지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용봉단차는 송나라 때부터 황실에 진상했던 차. 찻잎을 갈아 용과 봉황이 새겨진 틀에 찍어냈다.

송나라 책에 용과 봉황이 살아서 날아갈 것 같다고 기록돼 있다.

그 정도로 정교한 차를 만들려면 찻잎을 최대한 곱게 갈아야 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정이 매달려도 하루에 고급 용봉단차 한 편 만들기도 쉽지 않았다.
주원장은 이 또한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라 생각하고 용봉단차를 황실에 진상하는 전통을 혁파했다.

대신 싹을 따서 만든 차를 진상하라고 했다. 이때부터 용봉단차는 중국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좌) 명나라를 대표하는 문인 화가 문징명 (우) 문징명의 품차도 제자가 찾아와 함께 차를 마시는 모습을 그렸다.

차 생산자들은 잎차에 집중했고, 전 시대보다 맛과 향이 좋은 차를 만들어냈다.

당나라 사람들은 차를 마시기 전 차를 숯불에 굽고 갈고 끓였다.

차를 끓일 때도 물이 적당하게 끓어오르는 때를 놓치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송나라 때는 말차가 유행했다. 일본 사람들이 마시는 말차는 송나라에서 건너간 것이다.

송나라 사람들은 말차 거품이 빽빽하게 올라오는 것을 좋아해서 팔이 아플 때까지 대나무 거품기로 차를 저었다.
잎차를 마신 명나라 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차를 굽지도 않고 거품을 올리지도 않았다.

뜨거운 물만 부으면 차가 숨겨뒀던 향기를 내뿜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탕색도 곱고 맛도 좋은 차가 우러났다.
명나라 때 문인들이 특히 차를 사랑했다.

차를 마시고, 글씨를 감상하고, 그림을 보는 것이 문인의 고상한 취미 생활로 여겨졌다.

여럿이 모여 시끌벅적한 연회를 벌이며 차를 마시기보다는 한두 명 벗과 모여, 혹은 혼자서 조용히 전원 속에서

차를 즐기는 것을 더욱 선호했다.
문징명이 대표적이다. 명나라 최고 문인 화가 문징명은 말문도 늦게 텄고 서고 걷는 것도 또래보다 늦었다.

당시 선비 집안 남자는 글공부를 하고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나가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삶이라고 여겼다.

문징명도 일찍부터 과거를 준비했으나 평생 시험에 아홉 번 떨어졌고, 끝내 한 번도 급제하지 못했다.
54세 때 한림원 시조라는 미관말직에 특별 케이스로 채용됐지만 관직이 적성에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동료들의 따돌림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다. 동료들은 그림을 그리는 그를 못마땅해했다.

그토록 나가려 애쓰던 관직이었건만 3년 만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어떤 의미에서 이때부터 그의 인생이 제대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고즈넉한 곳에 초가집을 짓고 차를 마시고 책을 보고 그림을 그렸다.

특히 차 마시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림 속 문징명은 자연 속에서 혹은 삘기를 얹은 초가집에서 책을 보거나 벗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옆에는 시동이 화로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물을 끓인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그의 그림은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문징명은 큰 부자나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그림을 파는 법이 없었다.

대신 친한 벗이 원하면 쌀 한 포대를 받고도 그림을 그려줬다.

그 시절 문징명 그림이라고 유통되는 것 중에 20%는 가짜였다고 한다.

한번은 친구가 가짜 문징명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잡아들였다.

그러나 문징명은 “이 사람이 나보다 재능이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저 사람보다 좀 더 유명할 뿐이다”라며 추궁하지 않았다.

풀려난 가짜 화가는 담이 커져 다음에는 문징명에게 자기가 그린 그림을 가져가 서명을 해달라고 했다.

문징명은 흔쾌히 그의 말을 들어줬다.

누가 가짜 그림을 사서 봐달라고 들고 오면 언제나 진품이라고 말해줬다.

제자들이 이유를 묻자 “저 사람은 돈이 궁해 내 이름을 걸고 그림을 파는데 내가 아니라고 하면 돈을 못 벌지

않겠느냐. 그림을 사는 쪽은 본래 돈이 많은 사람이니 괜찮다”고 대답했다.

(좌) 당인이 그린 事茗圖 소나무 그늘 밑에 자리한 방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남자는 당인 (우) 당인의 초상화.

▶단차를 폐지한 주원장···명나라 때 잎차 대유행
문징명은 노력하는 타입이었다. 어릴 때 글씨를 잘 못 썼다.

글씨를 잘 쓰겠다고 결심한 후 하루에 천자문을 열 번씩 베껴 썼다.

한동안 이렇게 하니 명나라에서 손꼽히는 서예가가 됐고 80세에는 자신만의 풍격을 갖춘 서체를

개발할 수 있었다.

90세의 어느 날, 문징명은 부탁받은 묘비명을 썼다. 묘비명을 다 쓴 후 붓을 내려놓고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잇단 좌절을 겪다 불운하게 인생을 마친 사람도 차의 위로를 받았다.

그의 이름은 당인, 문징명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

두 사람은 16살에 처음 만나 당인이 54세로 먼저 죽을 때까지 평생 좋은 친구로 지냈다.
당인은 재기가 넘쳐났다. 수재라고 불릴 만큼 머리가 좋았지만 경박하고 운이 나빴다.

과거 시험을 보러 갔다 인생이 크게 어긋났다.

과거야 어차피 붙을 것이니 미리 선이나 대놓자 생각하고 관리들을 찾아다닌 것이 화근이었다.

시험지를 미리 빼냈다는 오해를 받아 시험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붙잡혀 감옥살이를 했다.

풀려나기는 했지만 관리로 성공할 가능성은 모두 사라졌다.

아내도 이혼을 요구하고 재산을 분할해 떠나버렸다.
희망 없는 삶에서 벗어나보겠다고 들어간 곳이 주신호 휘하였다.

주신호는 명나라 초대 황제 주원장의 17째 아들 4대손이었다.

주원장은 자신과 성이 다른 개국 공신은 모두 죽였지만 아들들은 죽이지 않고 전국 여러 곳에 땅을 나눠주고

왕으로 봉했다.

그 후 오랜 세월 동안 주원장 후손들은 황위를 빼앗으려고 여기저기서 군사를 일으켰다.

그중에는 성공해 황제가 된 사람도 있고 실패한 사람도 있었다. 주신호는 역모에 실패한 사람이었다.
당인이 주신호 밑에 가서 일한 것은 그의 역모가 실패하기 몇 년 전이다.

그런 곳이 아니면 좋은 대우를 해주겠다며 당인을 불러갈 곳이 없었다.

그러나 주신호의 야망을 꿰뚫어 본 문징명이 당인에게 서둘러 빠져나오라고 조언했다.

당인도 정신을 차리고 주신호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알코올 중독자 흉내를 내고 바지에 오줌을 싸는 연극까지 한 끝에 겨우 벗어났다.
당인은 고향에 돌아가 무너져가는 장원을 사들였다. 소박하고 아담한 집을 짓고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차를 무척 좋아했다. 그가 그린 ‘事茗圖’에는 창문을 열고 앉아 글을 읽는 사람이 나온다. 본인일 것이다.

책상 위에는 큼직한 주전자가 놓여 있다. 그림 속 당인은 평온해 보인다.

성공하고 싶다는 야망도, 인생을 실패로 몰아갔던 불운도, 목숨까지 잃을 뻔했던 일도 모두 지나간 후 조용히

살아가는 그에게 차가 큰 위로가 됐을 것이 분명하다.

- 신정현 죽로재 대표 -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99호 (2021.03.10~2021.03.16일자) 기사입니다

https://news.mk.co.kr/v2/economy/view.php?year=2021&no=229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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