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현의 ‘인물로 보는 차 이야기’] (9) 공춘이 만든 ‘공춘호’…보랏빛 모래 ‘자사’로 만든 자사호의 시조
오이산은 중국 명나라 때 장쑤성 이싱에 살던 선비였다.
젊을 때 진사 시험을 준비하려고 절에 들어가 공부에 매진했는데 자잘한 시중을 들게 할 셈으로 공춘이라는
하인을 데려갔다.
오이산이 공부하는 동안 공춘은 스님이 직접 그릇을 만들어 쓰는 것을 보고 스님에게 그릇 만드는 법을
배우며 시간을 보냈다.
하루는 공춘이 흙을 만지다 절 마당가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봤다.
나무는 오래돼 기괴하다 할 정도로 껍질이 울퉁불퉁했다.
하지만 공춘은 매끈하지 않은 나무껍질에 오히려 매력을 느꼈다.
나무옹이를 형상화해서 찻주전자를 만들면 어떨까 궁리를 해봤다.
공춘은 이 주전자를 자신이 사는 이싱 흙으로 만들었다. 이싱의 흙은 매우 특별했다.
사람들은 이 흙을 보랏빛 모래라는 의미의 ‘자사’라고 불렀지만 사실은 보랏빛뿐 아니라 갈색, 붉은색,
노란색 등등 다양한 색이 났다.
이런 색색의 흙은 그 넓은 중국에서도 오직 이싱에만 있었는데 색도 곱고 조소성도 좋아서 얼마든지 원하는
모양대로 그릇을 만들 수 있었다.
공춘은 나무껍질 색깔에 가까운 노란색 흙을 스님에게 얻어 열심히 주전자를 만들었다.
공춘은 오래된 나무를 관찰하고 머릿속에서 새롭게 해석해 주전자의 각 부위로 만들어냈다.
그에게는 머릿속에 그린 것을 재현해낼 수 있는 재능이 있었다.
주전자 몸통을 울퉁불퉁하게 만들고 흙을 나뭇가지처럼 꼬아서 손잡이로 달았다.
찻물이 나오는 주둥이도 신경 써서 날렵하게 붙였다.
주전자를 굽기 전에 오이산에게 보여주니 몹시 놀라며 좋아했다.
오이산이 꼬챙이를 가져오라 해서 손잡이 아래 공춘의 이름을 새겨줬다.
명나라 때 선비들이 다 그렇듯 오이산과 그의 친구들도 차를 좋아했다.
오이산은 친구들에게 공춘이 만든 주전자를 선물했다.
‘공춘호’라 불린 공춘의 주전자는 명나라 선비들 취향을 저격했다.
이렇게 공춘의 주전자는 엄청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공춘은 대략 1506년에 나서 1566년쯤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기록이 없다.
공춘에 대해 처음 기록을 남긴 사람은 명나라 때 허차서였다.
그는 공춘이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때에서 약 30년 후인 1597년에 ‘다소’라는 책을 썼다.
책에서 ‘과거에는 공춘의 호를, 최근에는 시대빈의 호를 이 시대 사람들이 특히 귀히 여기는데 둘 다 거친
흙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비슷한 시기에 원굉도는 ‘시상’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자사 주전자는 공춘과 시대빈이 있는데 그들이 만든 찻주전자 가격이 2000~3000전이나 한다.
특히 공춘의 찻주전자는 얻기가 힘들다.”
공춘이 죽고 360년이 지난 1926년 어느 날, 저남강이라는 남자가 쑤저우 거리를 걷고 있었다.
이싱 출신이었던 그는 비교적 순탄한 관직 생활을 50살에 마치고 일찌감치 귀향한 참이었다.
옛 물건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어 이미 상당한 컬렉션을 갖추고 있던 터였다.
그런 그가 무언가에 끌리듯 갑자기 멈춰서 좌판을 헤집고 무엇인가 집어 들었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희끄무레한 찻주전자였다. 주전자를 앞뒤로 뒤집어 보던 저남강은 손잡이 아래쪽을 봤다.
공춘이라는 두 글자가 보였다. 그는 순간 이 찻주전자가 자사호의 비조로 알려진 공춘이 만든 호라고 확신했다.
찻주전자를 판 사람에게 내력을 물었다.
판매자는 과거 오대징이라는 사람이 이 호를 소유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오대징이 이 주전자를 손에 넣었을 때 뚜껑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청나라 말의 유명한 자사호 작가 황옥린에게
뚜껑을 만들어줄 것을 부탁했다는 얘기도 들려줬다.
황옥린은 이 호를 나무껍질로 보지 않고 펑퍼짐한 늙은 호박으로 봤다. 해서 호박 꼭지 모양의 뚜껑을 만들었다.
저남강은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을 초청했다.
서화가 황빈홍, 서비홍 등 당대 유명 인사들이 함께 모여 공춘호를 감상했다. 모두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공춘호를 유심히 관찰하던 황빈홍이 말했다.
“공춘이 이 주전자를 만들 때 오래된 나무껍질을 본떴다고 했는데 이 주전자는 호박 꼭지 뚜껑을 하고 있으니
이는 황옥린이 잘못 해석했기 때문인 듯하오. 공춘 의도에 맞게 뚜껑을 새로 만들어주는 것이 맞을 듯싶소.”
저남강은 황빈홍 의견을 받아들여 배석민이라는 자사호 작가에게 새 뚜껑을 만들어줄 것을 부탁했다.
배석민은 궁리 끝에 앙증맞은 영지버섯 모양 뚜껑을 만들었다.
이렇게 되니 공춘의 의도와 딱 맞아떨어져 보였다.
저남강은 새로 만든 뚜껑을 굽기 전에 뚜껑 가장자리에 글자를 새겨 넣었다.
“주전자를 만든 사람은 공춘, 황옥린이 호박이라고 생각했으나, 500년 후 황빈홍이 나무옹이인 것을 알았고,
배석민이 새로 뚜껑을 만들었다.”
▶울퉁불퉁한 몸통에 나뭇가지처럼 꼬아서 만든 손잡이
유명 인사들 극찬 속에 재탄생한 공춘호는 곧 세상의 주목을 끌었다.
영국박물관에서 3만5000파운드라는 거금을 주고 구입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해왔으나 저남강은 웃기만 했다.
중일전쟁 기간 동안 일본이 구입하겠다고 나섰을 때는 그들이 강제로 빼앗아 갈 것을 걱정해 깊은 산 한구석에
주전자를 묻어뒀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사회가 여전히 어지러웠기 때문에 저남강은 장소를 옮겨 다른 곳에 주전자를
묻어놓고 때를 기다렸다.
국민당과 공산당 내전에 패배한 국민당이 대만으로 물러가고 1949년 신중국이 세워졌다.
드디어 저남강은 10여년간 땅속에 묻어놨던 주전자를 파내 쑤저우 졸정원으로 갔다.
졸정원은 명나라 때 만든 아름다운 정원으로 당시에는 임시 문물관리소로 쓰이고 있었다.
저남강은 공춘호와 함께 그동안 모아뒀던 옛 물건 30점과 애써 수집한 공춘호에 관한 수십만 자에 달하는
자료를 나라에 기증할 뜻을 밝혔다.
말년에 저남강은 산속 낡은 절에 살았다. 혼자서 솔방울을 물에 끓여 차를 우렸다. 그는 이렇게 읊조렸다.
“옛 절에 혼자 살며 홀로 향 피우고 홀로 종을 치니, 문이 부서져도 고칠 필요가 없고, 밤새 차 끓이는 화로만
붉게 달아오르는구나.”
그렇게 소박하게 살다 1959년 세상을 떠났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으면 참 아름다울 텐데, 그렇지가 않다.
저남강이 수십만 자에 이르는 기록을 수집하며 이 공춘호가 진품인 것을 입증하려 했으나 세간에는 이
주전자가 진품이 아니라고 의심하는 이가 많다.
그들은 이 찻주전자가 어린 하인이 독창적으로 만든 것이라 하기에는 기술이 너무 발달했고, 명나라 때 그릇
치고는 흙도 너무 정교하게 손질됐으며, 노란색 흙은 명나라 때는 아직 쓰지 않았다는 점 등을 들어 아무래도
이 주전자는 공춘이 아니라 호박 꼭지 뚜껑을 만들었다고 전해오는 황옥린의 작품이 아닌가 의심한다.
실제 황옥린은 오대징 집에 머물며 수없이 많은 공춘호를 만든 이력이 있다.
저남강이 구입했던 공춘호도 오대징이 소유했던 것이라 했으니 대충 스토리가 맞아떨어진다.
어쨌거나 저남강이 찾아낸 그 공춘호는 난징박물원을 거쳐 현재는 베이징의 중국국가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공춘호의 매력적인 스토리에 끌린 것일까, 최초의 자사호라는 타이틀에 끌린 것일까.
이후 수많은 자사호 작가들이 공춘호를 해석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했다.
성공한 자사호 작가 치고 공춘호를 만들지 않은 사람이 없다.
[신정현 죽로재 대표] -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01호 (2021.03.24~2021.03.30일자) 기사입니다]
https://news.mk.co.kr/v2/economy/view.php?year=2021&no=280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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