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시 남성동 ·본성동에 있는 성. 사적 제118호이다.
진주는 삼국시대 백제의 땅으로 신라와 접경한 최전선에 위치하여 두 나라 간에 전략적인
요충지로 치열한 공방전이 일어났던 곳이다.
삼국이 통일 된 이후에도 진주는 중요한 거점으로 인식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를 섬멸하기 위한 기지로서 역할했다.
조선시대에도 진주는 그 중요성이 높았으며 경상도와 호남을 연결하는 요충지였다.
조선시대에는 도호부가 설치되었고 경상우병영의 역할을 담당했다.
진주성은 백제 때 건설되었으며 당시에는 거열성지(居烈城址)였다고 하며,
산성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강변 절벽 위에 성채가 만들어졌고 서쪽으로는 하천이 있어
천혜의 요새였다.
고려 말 공민왕(恭愍王) 때 7차례 중수되면서 남해안에 출몰하여 분탕질하는 왜구를 방비하는
기지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시민(金時敏) 장군이 성채를 보강하여
왜군의 공격을 대비하였다.
1592년 9월 왜군은 약 2만 5천 명의 병력으로 진주성으로 공격해 왔지만 김시민 장군에게
대패하여 임란 3대첩(壬亂三大捷) 중의 하나가 벌어진 곳이다.
1593년 6월 왜군은 곡창지대인 호남을 공략하여 군량미를 확보하고자 약 1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다.
진주성은 호남으로 가는 길목으로 진주성이 무너지면 호남을 잃게되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2차 전투에서는 군관민 6만이 최후까지 항쟁하여, 장렬한 최후를 마쳤고 왜군도 막대한 피해를
입어 호남으로 쳐들어갈 여력을 상실하였다.
이때 논개(論介)는 적장을 안고 남강(南江)에 투신한 일화가 유명하다.
1605년(선조 38)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이 진(鎭)을 성내로 옮기고 성이 너무 넓어 수비가
곤란하다 하여 내성을 구축하였다.
그뒤 병사 김태허(金太虛)가 1607년 포루(砲樓) 12개를 증축하였고, 1618년(광해군 10) 병사
남이홍(南以興)이 성 수축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지금의 진주성은 대략 이때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성의 둘레는 약 1.7km이고, 외성의 둘레는 약 4km이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서문으로 입장 우측으로 이동 촉석문까지 탐방>
진주성 봄 - 2023.05.03
진주성 겨울 - 2023.02.01
진주성 서장대(晉州城 西將臺)
진주성 서문의 지휘장대로 허물어진 것을 1934년 중건하였는데 음악분수에서 보는 야경은
천상에 떠있는 듯 아름답다.
국립진주박물관
1984년에 개관한 국립진주박물관은 경상남도 최초의 국립박물관으로서 임진왜란 최대
격전지 중 하나인 진주성晉州城 (사적 제118호)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개관 당시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성장 발전하였던 ‘가야加耶’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대표박물관으로 출발하였다가,1998년부터 경상남도 서부지역의 역사 문화와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전시 중심 주제로 하는 ‘임진왜란 특성화 박물관’으로 거듭났습니다.
국립진주박물관은 임진왜란과 지역에 관련된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존, 소개하기 위하여
자료 수집, 조사와 연구, 전시, 박물관교육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진주쌍충사적비(晉州雙忠事蹟碑)
일명 제씨 쌍충비(諸氏雙忠碑)로도 불리는 이 비는 본래 진주성 안에 있던 것을 일제시대에
관헌들에 의해 문산가도(文山街道)에 옮겨졌다가 1961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비각을 새로 지었다.
비의 형태는 조선시대 일반적인 비의 형태로 이수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엉키어 머리를 맞대고
중앙의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그 하단에 4개의 국화무늬를 조각하여 마무리하고 있다.
귀부(龜趺)는 이수의 조각이나 비의 규모와는 달리 등을 아무런 꾸밈이 없는 방형으로 처리하고,
돌출된 두 눈을 강조하여 토속적인 정감을 주고 있어 진주성 안의 다른 귀부들과 더불어
특징을 보이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임진왜란때 전공을 크게 세운 성주목사 제말(星州牧使 諸沫) 장군과
이순신 장군을 도와 큰 공을 세운 제홍록(諸弘祿) 장군의 충의를 기리고 있다.
제말 장군은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모아 웅천(熊川), 김해(金海), 의령(宜寧) 등지에서 전공을
세움으로써 곽재우(郭再祐)장군과 함께 조정에 알려지게 되어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임명되었으나 성주(星州)전투에서 전사한 인물이고 그의 조카가 되는 제홍록 장군은 숙부
제말 장군과 더불어 전공을 세웠으며, 이충무공(李忠武公) 휘하에서 싸우다가
정유재란 때에 전사하였다.
이에 정조(正祖)임금은 이들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이조판서 서유린(吏曹判書 徐有隣)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고 쌍충각(雙忠閣)이라 이름하여 진주성과 성주성에 각각 세우게 하였다.
두전(頭篆)은 송하 조윤형이 썼다.
진주 촉석루(晉州 矗石樓)
미국 CNN에서 한국 방문시 꼭 가봐야 할 곳 50선에 선정된 촉석루는 남강변 벼랑 위에
우아하고 위엄 있게 서있는 우리나라 3대 누각 중 하나로 고려 고종 28년(1241)에 창건하여
8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다.
남강과 의암, 진주성과 어우러져 천하의 절경을 연출하며 진주 8경 중 제1경을 자랑한다.
벼랑 위에 높이 솟았다하여 이름 붙여진 촉석루는 전쟁 시에는 지휘본부로, 평상시에는
향시(鄕試)를 치르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 지정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66호(6.25 불타기 전 국보 276호)
- 규모 : 정면 5칸, 측면 4칸
진주 의기사(晉州 義妓祠)
1593년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성이 함락되자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한 의기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다산 정약용의 중수기, 매천 황현 및 진주기생
산홍의 시판이 걸려있다.
진주 의암(晉州 義巖)
의암은 임진왜란 때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바위다.
당초 위험해 보여 위암(危巖)으로 불리다가 논개가 순국한 뒤 의암(義巖)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인조 7년(1629년)에 정대륭이 바위의 벽면에 의암이라고 새겼다.
- 규모 : 3.65m × 3.3m
진주 의암 사적비(晋州 義巖 事蹟碑)
의암사적비는 선조 26년(1593) 6월 29일,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논개의
사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진주의 사민(士民)들은 명암 정식(明庵 鄭拭:1683∼1746)이 지은 비문으로
경종 2년(1722)에 세웠다.
영조 16년(1740) 병사 남덕하(南德夏:1688∼1742)는 의기정포(義妓旌褒)를 계청하여 의기사를
창건하였고, 「의암사적비」에는 비각을 건립하여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라는
현판을 게시하였다.
이 비는 아래의 의암(義巖, 경상남도 기념물 제235호)과 마주하고 있어 의기 논개의 순국정신을
한층 더 흠모하게 하고 있다.
이 비의 비문에는 “그 바위 홀로 섰고, 그 여인 우뚝 섰네. 여인은 이 바위가 아닌들 어찌 죽을
곳을 찾았고, 바위는 이 여인이 아닌들 어찌 의로운 소리 들으랴.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해지리”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임진대첩계사순의단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임진년(1592년)진주대첩을 높이 받들고, 이듬해 계사년(1593년)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7만 민·관·군의 충혼을 위령하기 위하여 건립
김시민장군 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
김시민장군(金時敏將軍)의 전공을 기록한 이 석비는 일명
진주 전성각적비(晋州全城却敵碑)라고도 한다.
이 석비는 현재 진주성내(晋州城內)의 계사순의단 앞
<옛날에 충민사(忠愍祠)가 있었던 자리>에 단층맞배지붕의 비각을 마련하여 보존하고 있다.
김시민(金時敏 1554∼1592)은 조선(朝鮮) 중기의 무신으로 1578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입시하였으며, 1591년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되었다가 이듬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자
목사 이경(牧使 李璥)을 대신하여 목사직(牧使職)을 승계하였다.
먼저 공은 성안의 백성들을 위무(慰撫)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성을 수축하였으며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그해는 정식으로 진주목사(晋州牧使)에 취임하여 병기를 정비하는 등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구하였다.
또, 9월에는 진해로 출정하여 적을 물리치고 적장 다하라〔平小大〕를 사로잡는 등 전공을 세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慶尙右道 兵馬節度使)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6일 왜적은 진주성(晋州城)이 전라도로 통하는 경상우도(慶尙右道)의 요충이어서
경상우도의 주력이 이곳에 있음을 알고 공격하자 성중의 부녀자와 노약자까지 적과 대적하니
적군은 2만여 대군이었으나 아군은 3,800여 명에 불과하였다.
6일간의 악전고투 끝에 드디어 적을 물리쳤으나 이 전투에서 공은 적탄에 맞아 점차 상처가
깊어 갔지만 이를 비밀로 하여 최후까지 국사를 근심하는 등 충절을 다하다가 수일 후
진중(陣中)에서 순국하였다.
그 후 1604년에는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追錄)되었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비석의 형태는 조선시대 일반형 석비 형태이다.
성균관 진사 성여신(成汝信)이 글을 짓고 성균관 생원 한몽인(韓夢寅)이 글씨를 썼다.
진주촉석정충단비(晉州矗石旌忠壇碑)
이 비는 아래쪽이 판독 되지 않을 뿐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비를 세운 것은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히 순국한 장졸과 백성들의 충정과 전공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서다. 2만명의 왜군이 패배하였던 임진왜란 제1차 진주성 전투의
치욕을 씻고자 왜적은 다음 해 선조 26년(1593)에 진주성 공략을 하게 된다.
왜군은 12만 1천 6백여명의 대군으로 진주성을 세 겹으로 에워싸며 공격하자 중과부적으로
6월 29일 성이 무너졌다.
이러한 사실들을 전해주는 이 비는 진주성에서 싸우다 순국한 충절을 기린 비라고 하겠다.
비문에는 진주성에서 싸우다 순국한 인물에 대하여 기술하고 그 뜻을 기리고 있는데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고종후(高從厚)는 임진왜란 당시 부친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아버지와 아우가
전사하자 다시 의병을 일으켜 여러 곳에서 싸우다가 이곳 진주성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또한 비문은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등과 남강(南江)에 투신한 그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또 한 명은 황진(黃進 ?~1593)이다. 공은 황희의 5대손으로 1591년 통신사와 함께 일본을
다녀와서 그들의 침입을 예언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용인(龍仁)에서 왜군과 교전하다 패전하자 진안(鎭安)에서 왜적의 선봉장을
사살하고 적을 격퇴하는 전공을 올렸으며 진주성에서 마지막까지 성을 지키다 전사한 인물이다.
이 외에는 장윤(張潤) 등 진주성에서 순국한 인물을 비문에 기록하고 있어 임란의 전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이민서가 비문을 짓고 신익상이 글씨를 썼다.
촉석문
진주성의 동문인 촉석문은 1972년에 복원 진주성을 찾는 관람객을 맞이하는 관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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