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피아골로 774 <지번>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1017
T. 061-782-7412
화엄사와 함께 지리산에 가장 먼저 들어선 절로 알려지고 있는 연곡사(鷰谷寺)는 현대사의
질곡을 간직한 사연 많은 피아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직전리 조금 못미처 자리잡고 있다.
섬진강을 따라 하동 쪽으로 오다가 외곡리에서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요동치듯 흐르는
연곡천과 산비탈을 가득 메우고 있는 계단식 논들을 볼 수 있다.
좁은 산비탈을 억척스럽게 일궈 만든 계단논은 평지를 놔두고 이 깊은 지리산 속에까지 들어와
살아야 했던 고달픈 사람들의 삶에 대한 애착과 건강함을 느끼게 해준다.
피아골은 한국전쟁 직후 빨치산의 아지트였기에, 이들을 토벌하려는 군경과의 치열한
격전이 벌어진 곳이었다.
피아골의 이름도 그렇게 죽어간 이들의 피가 골짜기를 붉게 물들였기에 붙여진 것이라는 말이
있으며, 당시 죽은 이들의 넋이 나무에 스며들어 피아골 단풍이 여느 단풍보다
유난스레 붉다고도 한다.
그러나 실제 피아골이라는 지명은 옛날 이곳에서 오곡의 하나인 식용 피[稷]를 많이 가꾸었기
때문에 피밭골이라 하였다가 바뀐 이름이며, 피아골 입구의 직전리(稷田里)가 그런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연곡사가 8세기 중엽 통일신라 경덕왕 때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유적들로 보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창건된 절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인조 5년(1627)에 소요대사 태능(逍遙大師 太能, 1562~1649)이
복구하였다.
영조 21년(1745) 무렵의 연곡사는 왕가에 신주목(神主木, 위패를 만드는 나무)으로 쓰이는
밤나무를 내는 율목봉산지소(栗木封山之所)로 지정돼 있었다.
1895년쯤에도 여전히 왕가에 신주목을 봉납하였는데, 밤나무의 남용으로 문제가 생겨 망할
지경에 이르자 승려들이 절을 떠나 결국 절이 폐쇄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구한말과 한국전쟁 때 다시 파괴되었다가 근래 들어 중창불사가 크게 이루어졌다.
삼층석탑
대웅전 남쪽의 채마밭에 서 있다.
한때 삼층석탑이 있는 곳까지 건물이 들어서 있었을 것을 상상해보면 옛 연곡사의
규모가 그려진다.
탑신부는 전형적인 삼층석탑이나 이중기단이 아니라 여러 개의 석재가 3중으로
기단부를 이루고 있는 점이 독특하다. 각 기단에는 우주와 탱주가 있다.
기단부에 비해 탑신부가 소홀한 느낌마저 든다.
3층 지붕돌이 떨어져 뒹굴던 것을 1967년 복원하였는데, 이때 상층기단에서 높이 23.5㎝ 되는
금동여래입상이 나왔다. 현재 동국대학교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몸돌과 지붕돌은 각기 다른 돌로 이루어졌으며, 각 몸돌에는 우주가 표시되어 있을 뿐 다른
장식은 없고, 2층과 3층 몸돌이 1층 몸돌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지붕돌은 각 층마다 받침이 4단이고, 추녀 밑은 수평이다.
지붕돌의 경사는 경쾌한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네 귀의 반전도 우아하다. 상륜부는 전부 없어졌다.
동부도
‘부도 중의 부도’라 할 만큼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기품을 간직한 동부도는
대웅전의 북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신라 말기에 만들어졌으며, 누구의 탑인지는 알 수 없으나(도선국사[827~898]의 부도라는
말이 있긴 하다), 원형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다.
지대석 위에 기단부와 탑신부, 그리고 상륜부를 쌓은 팔각원당형의 부도이며,
경내에 있는 세 기의 부도 가운데 조각솜씨가 가장 정교하다.
네모난 지대석 위에 팔각 2단의 하대석이 놓이고, 하단에는 운룡문이 얕게 조각되었다.
상단에는 둥근 윤곽선을 돌린 각 면에 자세를 달리 하는 사자가 양각되었다.
하대석 윗면에는 각형으로 된 3단의 굄이 중대석을 받고 있다.
중대석은 낮은 편이며, 중대석 각 면에는 안상과 그 안쪽에 팔부중상이 조각되었다.
상대석을 받치고 있는 3단의 굄대는 중대석을 받치고 있는 굄대와 대칭을 이룬다.
상대석은 두 겹 앙련으로 연잎마다 국화 같은 꽃무늬가 돋을새김되어 있으며,
그 위에 몸돌받침이 있다.
동부도비
동부도 앞 한쪽에 자리잡고 있다. 비신 없이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어 주인을 알 수가 없다.
동부도비의 조각에서 독특한 것은 거북등에 표현된 날개이다.
귀갑문을 얕게 조각한 거북 등 위에 전체를 덮을 정도로 양쪽에 날개가 조각되어 있는데,
매우 드문 장식이다.
거북에게 신성(神性)을 부여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거북은 네 다리를 사방으로 쭉 뻗고
납작하게 엎드린 모습인데, 그런 중에도 오른쪽 앞발을 살짝 들어 전진하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이에 비하면 용머리 조각수법은 뒤떨어져 있으며, 목이 짧아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현재 똑바로 서 있는 용머리는 떨어져 나간 것을 다시 붙여놓은 것이다.
북부도
동부도에서 북쪽으로 150m 올라가면 북부도를 볼 수 있다.
구조, 형태, 크기, 조각에 담긴 내용 등이 동부도와 거의 같다.
동부도의 양식을 모방하긴 했으나 나름대로의 멋이 뚜렷하여 우위를 가리기 어렵다.
네모난 지대석 위에 놓인 팔각하대석에는 입체감이 부족한 운룡문이 조각되었고,
그 위에 귀꽃이 있는 복련석이 얹혀 있다.
중대석에는 팔부중상이 조각된 동부도와 달리 안상이 조각되었을 뿐이고, 상대석은
두 겹의 앙련석인데 꽃잎의 장식 조각에 긴장감이 없다. 앙련 안에 또 다른 꽃무늬가 있다.
상대석 위에 놓인 몸돌받침은 난간처럼 생긴 고복형 우주로 장식돼 있으나 동부도처럼
몸체와 떨어지지는 않았고, 면마다 안상 안에 가릉빈가 1구씩이 조각되어 있다.
현각선사 부도비
고광순 순절비 아래쪽에 귀부와 이수만 남은 현각선사 부도비가 있다.
이 부도비는 남아 있는 옛 탁본에 따르면 고려 초 경종 4년(979)에 세워졌다.
나라를 새로 연 시기의 포부와 힘을 담고 있는 듯 귀부의 조형이 매우 거대하고 당당한 모습이다.
거북은 네 다리를 사방으로 뻗쳐 납작 엎드린 형상으로 동부도비와는 반대로 왼쪽 앞발을 살짝
들어 앞으로 나서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몸체에 비해 큰 머리와 비석받침 네 면에 새긴 안상과 귀꽃이 인상적이다.
부리부리한 두 눈과 큼직한 입, 입 주변에 수염까지 새겼다.
이수 앞면 가운데에는 ‘현각왕사비명’(玄覺王師碑銘)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전액(篆額)이 있다.
용의 형상 또한 거침없는데, 좀 해학적으로 보인다.
서부도
북부도에서 약 100m 내려온 경내의 서쪽에 있다.
주인을 모르는 동부도·북부도처럼 경내에 놓인 위치로 따져 서부도라 불리고 있지만, 서부도의
경우는 주인이 명확한, 소요대사 부도비이다.
몸돌 한 면에 ‘소요대사지탑 순치육년 경인’(消遙大師之塔 順治六年 庚寅)이라는 글씨가 2줄로
뚜렷이 남아 있어 소요대사가 입적한 순치 5년(1648) 다음해인 순치 6년(1649)년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부도비를 별도로 세우지 않고 부도의 몸돌이나 다른 부분에 글자를 새기는 예는 조선 시대에
이르러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양상으로, 서부도가 그런 예의 하나이다.
'여행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직전마을 - 전남 구례군 토지면 (0) | 2022.11.21 |
---|---|
피아골 - 전남 구례군 토지면 (0) | 2022.11.20 |
반선주차장 - 남원시 산내면 (0) | 2022.11.07 |
뱀사골계곡 - 남원시 산내면 (0) | 2022.11.06 |
와운생태마을 - 남원시 산내면 (0) | 2022.1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