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여도공'백파선의 궤적] ① 신화·실화 사이 미완의 역사 - 경남신문 - 2023-10-03
임진왜란(정유재란)은 ‘도자기 전쟁’으로도 불린다.
일본이 납치해 간 조선 도공들은 일본 도자 기술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일본 도자의 시조’라 불리는 이삼평. 그다음으로 ‘아리타 도업의
어머니’ 백파선이 있다.
이에 경남신문은 백파선의 삶의 여정을 9회에 걸쳐 다룬다.
첫 순서는 정확한 사실과 과장된 내용을 구분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어 한국과 일본에서 백파선을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양국 도예가들의 작품활동을 살핀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추구해야 할 백파선 연구 방안과 문화교류 방안을 모색해 본다.
왜란 때 끌려가 도업 발전 일군
일본 아리타 도자기의 어머니
역사적 사료 적어 ‘미완의 역사’
실화 아닌 신화적 내용 알려져
국내 기록 왜곡된 부분 많아
‘조선사기장 960명 이끈 인물’
지식백과 정보 사실 확인 불가
오늘날 백파선은 콘텐츠 측면에서 활용 가치가 높다.
여성 도공이자 100년 가까이 살 정도로 장수했으며, 뛰어난 지도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묘사되기 때문이다.
백파선의 고향으로 추측되는 김해를 포함해 전국에서 백파선 알리기에 집중하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백파선은 너무 적은 실화(實話)와 너무 많은 신화(神話)로 구축돼 있다.
실화와 신화 사이 백파선의 미완의 역사가 이어지는 중이다.
백파선을 기억하고 기록하기 위한 올곧은 방향을 고민할 때다. 우선적으로 실화와 신화를 구분해 본다.
◇백파선은 960명을 이끌었을까?
‘1623년경 심해종전(深海宗傳)의 미망인 백파선(百婆仙)이
동족인 조선 사기장 960명을 이끌고 아리타의 히에고바에 가마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제공한 문화원형백과(2002~2010)에 기록된 백파선에 대한 내용이다.
네이버에 백파선을 검색하면 지식백과란에 뜨는 정보이기도 하다.
이 중 ‘조선 사기장 960명을 이끌었다’는 내용은 백파선이 도공집단의 리더였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
주요하게 활용된다.
이는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연구논문에 수차례 게재되면서 오늘날까지 백파선과 관련된
서적·인쇄물, 기사 등에 빠지지 않고 쓰이고 있다.
도공의 수는 900여명부터 906명, 960명 등 제각각 표현된다.
문화원형백과 정보의 근원은 일본 역사학자 나카지마 히로키가 1936년 지은 ‘히젠도자사고
(肥前陶磁史考)’ 등에 있다. 이 책에 적힌 백파선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종전(백파선의 남편)은 고토의 보호 아래 사가현 다케오에서 도자기를 만들었는데 1618년 69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백파선이 그 뒤를 이어 가마소를 번영시켜 영주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1616년 이삼평이 아리타 이즈미야마(泉山)에서 도자백석을 처음 발견해 고급 백자를 생산하자
백파선도 영주의 허락을 받아 식솔 960여명을 이끌고 아리타의 히에코바로 이주했다.
그 수가 엄청난 만큼 이들은 곧 아리타를 대표하는 도공들이 됐다.”
하지만 이 책의 기록을 온전히 믿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역사적 사건이 있고 나서 훗날 편찬된 역사책은 ‘2차 사료’로 사실이 왜곡됐을 가능성을 반드시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히젠도자사고’는 백파선 시대와는 300여년의 차이를 두고 편찬됐다.
저자는 출처 등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이를 증명할 추가 사료도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960명 설’은 사실로 단정해선 안 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이는 최근 일본과 한국 두 나라 학계에서 공통되게 제기되고 있는 주장이다.
2020년 논문을 통해 이를 지적한 노성환 울산대 일본어·일본학과 교수는 “(잘못된) 담론은 원자료를
해독하지 않고 진행된 미숙한 연구에 의해 생성된 것”이라며 “960명을 이끌고 아리타로
이주했다는 것 외에도 대중에게 알려진 내용들 중 사료의 내용과 다른 것들이 있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문화원형백과에 기록된 ‘1923년경 아리타로 이동했다’는 내용 또한 사료적 가치가
인정되는 원자료에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와 관련 백파선 연구를 하고 있는 일본의 노무라 이쿠요 학자는 지난 2017년 서울대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종전과 백파선이 다케오에 처음 자리 잡은 해도, 아리타로 이주한 시기도 알 수 없다”며
“최근 연구에서 이삼평이 1628년께 아리타에서 처음 그릇을 제작했다고 밝혀졌기에 그 무렵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백파선은 후손들이 붙인 애칭
본명에 대해 알려진 바 없어
남편 이름도 억측으로 붙여져
고향 ‘심해’는 김해가 유력할 뿐
김선미 백파선연구소 전 소장
“오류 정보 바로잡는 작업 필요
학자들도 궤적 좇고 있을 뿐”
◇백파선·김태도는 본명이 아니다
가볍게 접근해 봐도 백파선을 잘못 표현한 내용은 심심찮게 발견된다.
일부 단체나 언론에서 백파선을 ‘머리가 희다’는 의미로 소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본지도 2017년 백파선을 ‘머리가 흰 노파’로 소개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는 한자만 봐도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백파선(百婆仙)의 백은 ‘白(흰 백)’이 아니라
百(일백 백)이다.
이외 한자도 婆(할미 파), 仙(신선 선)으로 직역하면 ‘백살을 산 할머니 신선’이 된다.
백파선은 후손들이 붙인 애칭으로 본명이 아니다. 본명에 대해선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창작물에서 어린 시절 그를 ‘백파선’, ‘파선’이라 칭한다면 재현 오류가 되는 이유다.
백파선 남편의 이름을 ‘김태도’로 칭하는 문제는 조금 더 깊게 들어가 봐야 한다.
널리 알려진 ‘태도’라는 이름은 백파선의 계명인 ‘만료묘태도파(万了妙泰道婆)’에서 따왔다.
한국의 한 학자가 ‘만료묘’를 계명(우리나라의 법명)으로,
‘태도파’를 태도의 파(할머니, 아내)로 해석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일본 계명의 형식을 알지 못해 발생한 오류다.
종파마다 다르지만 계명은 원호, 도호, 계명, 위호로 구성되는데, 백파선의 경우 원호 없이
‘만료(도호)/묘태(계명)/도파(위호)’로 계명을 받았다.
결국, ‘태도’는 백파선의 계명과 위호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에 불과하며,
남편의 이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백파선의 남편은 사후 ‘천실종전’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이는 백파선이 죽고 50년 뒤인 1705년 후손들이 세운 ‘만료묘태도파의 비’에 명시돼 있다.
그의 일본 이름은 후카우미 신타로(深海 新太郞). 조선에서의 이름과 성은 알려지지 않았다.
◇고향은 ‘심해’… 김해가 유력할 뿐
백파선의 후손들은 후카우미(深海) 성을 이어오고 있다.
후카우미의 뜻은 ‘심해’인데, 백파선 부부의 고향인 곳이다.
이는 여러 사료에서 확인돼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심해는 오늘날 김해로 추측하는 게 정론이다.
발음의 유사성부터, 김해에 도요지(자기생산지)가 있었고 임진왜란 당시 백파선 부부를 일본으로
데리고 간 고토 이에노부가 김해에 주둔했다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유추한 결과다.
하지만 심해가 김해라는 명확한 사료는 아직까지 단 한 건도 발견되지 않았다.
최근에는 진해라는 의견도 조심스럽게 나온 상황이다.
물론 임진왜란 당시 ‘진해’는 ‘웅천’으로 불렸다는 반박 주장도 존재한다.
종합해 보면, ‘백파선은 김해 출신이다’라는 확신보다는 ‘백파선은 김해로 추정되는
조선 심해 출신이다’가 지금까지의 올바른 역사인 것이다.
이런 흐름에서 종전(김태도)의 성이 김해 김씨라고 하는 것은 신뢰도가 더욱 떨어진다.
김해의 성씨를 가지고 있었더라도, 김해 김씨 외에도 김해 허씨가 존재한다.
이런 전제를 떠나서라도 명백하게 역사적 사료로 인정된 원자료에는 종전의 성은 불상(不詳),
즉 알 수 없다고 명시돼 있다.
김선미 백파선연구소 전 소장(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은 “잘못된 정보들을 바로잡는
작업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현재 사료 연구가 부족한 상황에서 백파선의 일대기를
명확하게 말할 사람은 없다고 본다.
학자들도 백파선의 궤적을 좇고 있을 뿐이다.
알 수 없는 궤적이 하나씩 파악될 때마다 우리 역사의 잊혀진 인물이 빛나게 될 거라 본다”고 말했다.
※ 참고문헌= 노성환(2020) ‘일본의 조선 여성 도공 백파선’, 노무라 이쿠요(2021) ‘아리타
도자기의 창시자 백파선에 대한 기초 연구’
['조선여도공'백파선의 궤적] ① 신화·실화 사이 미완의 역사 :: 경남신문 (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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