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 이야기

['조선 여도공' 백파선의 궤적] ② 다시 정의 내리는 백파선

썬필이 2023. 10. 20. 08:12

['조선 여도공' 백파선의 궤적] ② 다시 정의 내리는 백파선 - 경남신문 : 2023-10-05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가 일본 도업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조선 여성이 있다. 
그녀의 본명은 역사에 새기지 못했지만, 백파선(百婆仙)이란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다. 
이전 기사에서는 백파선의 신화적 요소에 집중해 잘못 기록된 정보를 바로잡았다. 
이번 기사에는 기록된 사료를 토대로 백파선을 다시 정의 내리고 그만이 가진 가치를 재조명해본다.

백파선 사료 ‘고토가 공적 기록’
자손들이 세운 비문 등 2개뿐
임진왜란 때 사가현 다케오로 와 남편과 함께 도기 생산 일 시작
남편 사망 후 조선인들 이끌고 백토 발견된 아리타로 가 정착
도자업 부흥시키고 도공 양성
아리타 가마터의 시조로 불려
1656년 향년 96세로 사망
본명과 성은 알려지지 않아
◇현존하는 ‘1차 사료’는 단 2개= 백파선에 대한 ‘1차 사료’는 백파선 부부를 거느렸던 고토가(家)의 
공적을 기록한 ‘후등(고토)가어전공기(後藤家御戰功記), 1787 추정)’와 직계 자손들이 백파선을 
기리며 세운 ‘만료묘태도파(万了妙泰道婆)의 비(1705)’의 비문 등 2개만 현재 남아 있다.
‘후등가어전공기’는 1570년대부터 1700년대까지 다케오의 영주 고토가의 역사를 기술한 책이다. 
내용 중에는 조선 도공에 대해서도 상세히 적혀 있어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도공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주요한 사료가 된다.

아리타의 보은사 경내에 있는 ‘만료묘태도파(万了妙泰道婆)의 비’.

‘만료묘태도파의 비’는 1705년 백파선 50주기에 맞춰 증손이 세운 것으로 아리타의 보은사(호온지) 
경내에 있다. 
비석은 마모가 심해 해독이 힘들지만, 후등가어전공기에 그대로 수록돼 있다. 
후등가어전공기는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백파선의 행적을 다루고, 만료모태도파의 비는 조금 더 주관적으로 
백파선을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백파선과 관련된 사료가 적은 것은 1800년대 아리타에 큰 화재가 발생해 민간의 중요 문서들은 
모두 불탔기 때문이다. 
다행히 보은사 내 백파선 비는 오늘날까지 보존돼 있다.

◇‘조선여도공’ 백파선= ‘후등가어전공기’와 ‘만료묘태도파의 비’의 기록만으로 순수한 백파선의 궤적을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백파선 부부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어느해에 고토 이에노부에 의해 일본 사가현의 다케오로 향하게 된다. 
이들의 고향은 조선 ‘심해’. ‘심해’는 현재의 김해가 가장 유력하지만 아직까지는 어떠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백파선 부부는 다케오의 광복사(절) 앞에 살다가 우치다의 땅을 받아 도기 생산 일을 시작한다. 
백파선의 남편은 ‘신타로’라는 일본 이름을 썼는데, 그가 생산한 도기는 ‘신타로야키’라 불렸다. 
신타로는 1618년 10월 29일 사망한다. 
그의 법명은 천실종전(天室宗傳)이며 조선에서의 이름은 알려진 바 없다.
종전(신타로)이 죽은 이후 아내 백파선은 집에 있는 조선인들과 함께 백토가 산출되는
 아리타의 히에코바로 향한다. 
이삼평이 아리타의 이즈미산(泉山)에서 백토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고 몇년이 지났을 때의 일이다. 
백파선 일가가 몇년도에 아리타로 향했는지는 알 수 없다.
히에코바에 정착한 백파선은 그곳에서 도자 생산을 이어간다. 
이후 조선인들이 아리타로 몰려들어 도자업이 집중되면서 부흥하게 된다. 
훗날 백파선은 ‘사라야마(아리타 가마터)의 시조’로 불리게 된다.

이삼평이 발견한 아리타의 백토 생산지 ‘이즈미산(泉山)’,

백파선은 1656년 3월 10일 향년 96세 나이로 사망한다. 
이를 통해 그의 출생연도가 1560년이란 걸 파악할 수 있다. 
후손들은 백파선의 외형에 대해 ‘크게 웃고 특별히 눈썹이 빼어났으며, 귀가 어깨까지 늘어져 귀걸이를 
착용한 흔적이 있었다’고 기록을 남겼다. 
백파선이란 이름은 자손들이 그 덕을 기려 부른 애칭이다. 본명과 성은 알려지지 않았다. 
사후 받은 계명은 만료묘태도파다. 
그리고 백파선의 후손들은 후카우미(심해, 深海) 성을 이어오며 아리타를 비롯해 
일본 곳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일본 아리타 백파선갤러리에 설치된 ‘백파선평화기념상’.
백파선 부부가 도기 생산을 처음 시작한 우치다의 가마터.

◇본명 없이 기록된 여성의 역사, 기억해야 할 이유= 백파선은 2개의 1차 사료를 토대로 보수적으로 
정의 내려봐도 도예 역사에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인물로 해석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 ‘도공’이 아닌 ‘조선시대 여성’으로 그를 바라볼 경우, 그의 행적은 대단함을 넘어 위대한 
역사로 비치게 된다. 
백파선은 조선시대 여성사에 없었던 대규모 예술가(도공) 그룹을 이끈 리더였기 때문이다.
김선미 백파선연구소 전 소장은 “여성이 거의 보이지 않았던 우리 역사였지만, 오늘날 연구가 진행되면서 
역사 속 여성들의 활약과 그에 대한 가치와 의미가 점점 드러나고 있다”며 “유럽에 수출되면서 
일본 근대화의 태동이 됐다고 할 수 있는 아리타 도자기의 시작에 조선에서 온 여성 도공 백파선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노성환 울산대 일본어·일본학과 교수 또한 “예술가들은 각자의 고집이나 자존심이 강했을텐데 
그런 도공그룹을 이끌었다는 사실에서 백파선은 탁월한 지도력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조선시대 여성은 사회 진출이 어려웠다. 
역사에 기록되어도 본명보다는 호, 또는 ○○ 김씨, □□□부인 김씨 등으로 불렸다. 
백파선처럼 본명이 남아 있지 않은 여성 위인도 다수 있다. 신사임당과 이빙허각, 임윤지당 등이 그 예다.
조선시대 시인이자 화가였던 신사임당은 13세 때 직접 자신의 호를 ‘사임’이라 지었다. 
‘당’은 훗날 여성임을 알기 위해 붙은 칭호다. 생전에는 ‘사임 신씨’로 불렸을 것이고, 본명은 있었겠지만 
아직까지 기록된 문헌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살림을 체계화한 실학자인 이빙허각 또한 호가 ‘빙허각’일 뿐 본명은 기록되지 않았으며, 
조선 시대 최고의 여성 성리학자로 불리는 임윤지당도 본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백파선은 그동안 조선시대 여성사에 없었던 업적을 이루어낸 인물이다. 
여성들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시대에 타지인 아리타에 정착해 흩어진 조선 도공들을 끌어모았다. 
그러면서 오랫동안 살면서 인덕을 바탕으로 수많은 도공 후예들을 양성해냈다. 
평범한 리더십으론 불가능했을 이야기다. 우리가 백파선을 기억해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조선 여도공' 백파선의 궤적] ② 다시 정의 내리는 백파선 :: 경남신문 (knnews.co.kr)

 

['조선 여도공' 백파선의 궤적] ② 다시 정의 내리는 백파선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가 일본 도업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조선 여성이 있다. 그녀의 본명은 역사에 새기지 못했지만, 백파선(百婆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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