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소식

《표면짓기- Profound Surfaces》

썬필이 2024. 2. 8. 09:48

전시제목 : 《표면짓기- Profound Surfaces》
전시기간 : 2024. 02. 07(수) ~ 2024. 03. 13(수)
전시장소 : 수애뇨339(서울 종로구 평창길 339)
관람시간 : 화 - 일요일 11:00 ~ 18:00 (매주 월요일 휴관) 무료관람
참여작가:김원진, 이은경, 장윤경, 정관 / 기획:하진

예술공간 수애뇨339는 《표면짓기- Profound Surfaces》로 2024년 전시를 시작합니다.
이번 전시는 하진의 기획으로, 작품의 뼈와 살을 이루는 물질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는 
김원진, 이은경, 장윤경, 정관이 참여합니다.

장윤경

- 전시서문 -
<눈과 마음의 깊이로 만나는 우주적 표면들>
얼마나 오랫동안 진심으로 아쉬워하며,
눈길의 깊이로 간청했던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전환(Wendung)>
나일민(국민대학교 교수, 문화예술비평)

꿈은 소망의 실현이다. 
심층심리학자들은 꿈을 의식하지 못한 생각이나 기억이 불현듯 그 모습을 위장하여 드러내는 
표상이라고 본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을 빙산이라는 자연물에 비유하기도 했다. 
수면 위로 보이는 얕은 일각(一角)이 의식이라면, 그 아래 잠긴 거대한 방하의 심층에는 심원한 
기억의 저장고인 무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꿈은 의식과 언어에 의해 억압당한 감정이나 상상, 바램이 무의식에 숨어 있다가, 
의식의 검열이 물러나는 시간에 그 모습을 드러내며 안전하게 실현되는 해방적 공간인 것이다.
<표면짓기>는 마치 꿈에서 본 아득한 장면처럼, 뭐라 규정하거나 이름 지을 수 없는 낯선 
표면의 사물들이 공존하는 전시이다. 
참여 작가인 김원진, 이은경, 장윤경, 정관은 우주와 생명, 그리고 예술의 근원인 물질 고유의 
성정(性情)과 그 관계성에 몰두하며 눈과 마음의 깊이를 되새기게 한다.
근대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 체제는 사물(자연)을 오직 나(인간)의 인식과 관계하는 객체이자 
하나의 특수한 필요, 즉 이윤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했다. 
사물은 그 자체의 고유한 삶과 욕망, 무게를 지닌 것이라기보다는 무한한 힘(부)을 쫓는 
‘경제’를 보전하고 안정화하는, 채굴되고 가공되어 사용가능한 금융화된 개념으로 존재했다. 
태고의 생명과 신비를 간직한 이끼, 모래, 바위는 건축과 조경 상품이 되어 곳곳으로 흩어져 
표류하고, 수십억 년 세월의 지질변동으로 우뚝 솟은 장엄한 산맥과 고원은 거대한 광물 자원의 
매장지로, 아니면 깨끗한 공기와 맑은 광천수와 함께하는 온갖 체험 관광지로 환원되어 
광산과 요양소, 골프장과 리조트 개발지로 변형된다. 
이때 사물(혹은 동물이나 식물)에게는 야생이나 원시 상태에서와 같은 분별없는 상호작용이나 
교감, 균형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의 예술은 그러한 도구화되고 상품화된 사물 개념과 질서로부터 ‘미끄러지는’ 
물 자체의 본성과 다양한 관계 및 존재 가능성에 주목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과 사물의 관계 자체를 근저에서부터 새롭게 질문하고 있다. 
이는 더 이상 자본으로 포섭할 수 없는 ‘자연과 인간 본성의 반란’인 전지구적 차원의 사회생태 
위기 앞에서, 또 변이와 변종을 거듭하는 바이러스나 일상 깊이 침투한 데이터와 인공지능과 
같은 비인간의 관점에서 본 사물의 면모들이나 실재에 대한 기묘하고도 시급한 관심에 
다름 아닐 것이다.
여기 모인 작가들도 회화와 조각, 공예라는 “전통적 [미술] 재료와 단절”하지 않고, 
더욱 내밀하고 감각적으로 재료와 관계 맺으며 고유한 표현법을 찾았다.
그리하여 그 어떤 개념이나 척도, 양식과 쓰임에도 포섭되지 않는 특이한 사물을 출현시킨다. 
김원진은 의식에도 무의식에도 저장되지 않지만 존속하는 ’순수 본질 기억‘을 찾아, 
버려진 책과 편지, 일기나 드로잉 같은 일상의 사물을 해체, 변형, 재조합하여 새롭고 모호한 
용모로 둔갑시킨다. 
그렇게 작가는 아무리 의심해도 의심할 수 없는, 지금 여기에서 기억을 소환하는 
’존재의 순간들‘을 물질화하며 시공을 유유히 거스른다. 이은경은 억겁의 시간 속 풍해(風解)한 
유기물의 흔적인 템페라 안료 가루에 깃든 시공간의 밀도와 깊이를, 분쇄하고 모아 뿌리고 
쌓은 뒤 다시 긁고 지워내기를 반복하며-회화도 조각도, 안도 밖도 아닌-미세한 색채적 감각의 
다층 표면으로 가시화한다. 
장윤경은 도자의 뼈대라 할 수 있는 흙이 아닌 유약으로 형태를 만든다. 
온도와 압력에 따라 융해하고 응고하는 유약(광물) 가루 본연의 성질과 관계, 상태 변화에 따라 
생성될, 예기치 못한 형태와 질감, 휘광(輝光)을 기다리며 작가는 이어짐과 결속에의 
소망을 투영한다. 
정관은 전통 도예의 기법으로 관습적 패턴과 형태, 상징과 기능을 의도적으로 비켜나가며
그 어디에도 귀속을 거부하는 ‘실패한’ 도상을 제시한다. 이는 공예와 예술, 좋은 취향과 가치를 
규정짓는 위계나 기준을 향해 펼치는 역공(力攻)과 같다.
이처럼 여기 모인 사물들은 모두 자연이라는 근원적 생명에서 출발한, 그러나 결코 한 가지 
상태로 머물지 않고 변화하고 움직이는 물질의 특질을 체화하고 노동하며 인내하는, 작가의 
신체와 정신이 혼연한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렇게 ‘지어진’ 표면은, 마치 점성 높은 공업용 페인트 유체의 성질을 이해하고 캔버스 
위를 홀연히 거닐며 프랙털 패턴을 흩뿌려 나간 폴록(Pollock) 회화의 순수한 색면처럼, 
재료(물질)와 작가, 보는 이의 시공간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저마다의 내밀한 무한과의 
만남을 일으키는 장(場)이다.
그러니 이 고요한 공생을 지지하는 전시대와 전시를 기획한 하진이 꿈꾼 것은 아마도 
보이는 것 너머의 심연, 아니 그 바깥에 머무는 이름없는 것들이, 그들 좋을 대로 교섭하다 
흩어져 사라지도록 물러나 있는 우주적 공간이 아닐까. 
인간 없던 세계의 시작, 인간 없는 세계의 끝에서와 같이 무한한 사물이 서로의 얼굴과 신비를 
드러내며 공명하는 비옥한 영토로서의 예술 공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