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조선시대의 지성이었던 다산(茶山)은 ‘차를 마시는 민족은 흥하고,
마시지 않는 민족은 망한다’고 했습니다.
‘차를 마신다’는 말은 ‘차를 아는’ 것으로 바꿔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다산의 시대는 깊은 모순과 부패로 인해 조선왕조의 붕괴조짐이 현저하던 때였는데,
그런 상황에서 너무나 하찮게 보이는 차 마시는 일을 들고 나와 민족흥망이 차와 관련 있다고 한 까닭이
무엇이었을까요?
차는 다산의 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국과 우리나라는 대략 2천여 년 정도의 역사를 지녀왔고
일본도 1천여 년 전부터 차를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답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 해남 대둔사 승려 초의(草衣)의 ‘동다송(東茶頌)’이었던 것 같습니다.
‘동다’라는 말을 중화론적 세계관 또는 중화사대주의 폐습대로 해석한다면 조선을 동이(東夷)로 보아 중국
동쪽에 있는 조선의 차 이야기 쯤으로 볼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해석은 중국을 모방하고 맹종해온 자들의 부끄러운 고백 그 자체입니다.
중국에서도 ‘동(東)’을 동쪽, 오른쪽, 봄, 태양, 젊은 황제 등 고전적 뜻과 다른 의미로 쓰인 경우가 많습니다.
‘동가(東家)’란 (객이) 머물고 있는 집의 주인을 뜻하며, ‘동도주(東道主)’란 길손을 유숙시키고 대접하는
주인이며,‘동인(東人)’을 주인으로 읽거든요.
약재를 설명하는 문헌인 ‘동군채약록(桐君埰藥錄)’에 ‘진릉인들은 차를 즐기는데 주인들이(東人) 손수 차를
마련하여 대접한다’는 뜻의 문장이 있습니다.
주인이 직접 차 농사 짓고, 찻잎 따서 차를 만들고, 그 차를 손수 달여서 손님 대접하는데 이를 ‘동인’이라
부른다는 말입니다.
다산과 초의의 시대는 불평등이 극에 닿아 가장 낮은 계층이 고통으로 신음하면서 국가가 붕괴되기
시작하던 때였지요.
상류 지배계층은 대개 중국과 일본을 따르거나 기회주의적이었고, 국가 기초를 형성하는 하층민들은 고통뿐인
삶을 살았지요.
그때 다산이 차 문화론을 내놓았고, 초의가 ‘동다’라는 말을 처음 썼습니다.
당시 지배계층도 차를 마셨습니다. 다만 차 농사 짓는 일, 차 만드는 일, 심지어 차 달이는 것까지 하인들을
시켰고, 찻잔에 차를 담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면 그제야 제 손으로 마시는 것이 전부였지요.
그러다가 차 맛이 제대로 안나면 차를 준비한 하인들은 또 고초를 겪었고요.
다산과 초의는 지배계층의 중국과 일본 사대주의와 위선적, 관념적인 태도가 나라를 어렵게 하는 원인이라고
본 것 같습니다.
다산도 유배생활 하기 이전에는 조선시대의 양반 유학자이며 유학의 본고장 중국의 우월성을 배운 인물이었지요.
그런 그가 강진땅에서의 오랜 유배생활을 통하여 대둔사 승려 혜장(惠藏), 초의를 만나 제대로 차를 배워 민족의
운명과 차의 연관성을 깨닫게 되었지요.
다산과 초의는 차농사를 짓고, 차를 만들고, 차를 달여 손님을 대접하는 사람의 마음이 곧 실사구시이며,
세상을 따뜻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힘이라고 여긴 것 같습니다.
‘동다’란 곧 실사구시 철학의 실천 방법이지요. 모든 사람은 모든 것과 관계 있고, 그 관계는 평등하며,
상생(相生)이어야 한다는 것을 차로 실현시키려 했던 셈입니다.
우리 역사 최초의 소리나지 않는 혁명을 꿈꾸었던 증거가 다름 아닌 동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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