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꽃 속에서의 만남

썬필이 2019. 9. 6. 10:38

꽃 속에서의 만남

사람과 사람의 어울림, 즉 차실에 마주앉은 주인과 손님은 각기 타고난 성품으로 저마다의 개성을 지녔지요.

각기 다른 두 성품이 불심(佛心)이라는 공통된 정신으로 하나가 되기를 소망하는 것이 꽃 한송이입니다.
몸은 둘이면서 마음은 하나가 되는 불이일여(不二一如)를 뜻하는데, 이때 불심은 차(茶)를 매개로 하여

표현된다고 보았지요.

차실에서 만났다는 것은 곧 주인과 손님이 불성(佛性)을 공유하는 평등하고 존엄한 인격체임을 확인한 것입니다.
이제는 서로를 존경하며 합장으로 맞아야지요. 그리하여 한송이 꽃이 되어야지요. 주인은 먼저 꽃이 되었습니다.
손님을 맞이하는 눈빛, 합장하는 모습, 차살림 펴는 모든 몸짓이 물을 뿌린 듯 고요하여 자연스럽습니다.

아무 말이 필요 없습니다.
사치, 허세, 세속적 자랑거리와 권력 따위는 꽃 속으로 들어가는데 큰 방해물입니다.

오직 청정한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꽃은 우주의 화신이지요. 그래서 세계일화(世界一花)라고도 하지요.
주인과 손님이 꽃 속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석가가 영취산에서 들어보였던 연꽃 한송이와 그 의미를 깨달은

가섭존자와의 법희선열(法喜禪悅)의 경지를 흠모하는 종교적 소망의 징표입니다.

이를 창안한 센노 리큐는 꽃 한송이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했습니다.
꽃병에 꽂는 꽃은 ‘들판에 피어 있는 것과 같이’ 하라고 했지요.

한송이 꽃을 통하여 살아있는 자연의 생명성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차실 안에 자연의 한 부분을 고스란히 들여 앉힘으로써 차실이 살아 숨쉬는 자연과 한 몸임을 느끼게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 큰 바위덩어리나 무성한 나뭇가지 또는 한 다발의 꽃보다는 잘 선택한 꽃 한송이면

충분하다는 것이었지요.축소지향의 일본 미학이 생겨나게 된 근원이기도 합니다.
꽃 한송이의 모습이 자연스러울수록 주인의 마음이 온전히 투영된 것이어서 손님은 그 꽃을 보는 순간 주인과의

일체가 보다 쉽게 이뤄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일지라도 친절과 정중한 예의를 다하는 일본인의 태도는 차실의 꽃 한송이 미학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입니다.

센노 리큐는 꽃의 자연스러움과 생명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계절마다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피는 들꽃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이렇듯 ‘꽃 한송이’는 15~16세기 일본 사회에 만연해있던 사치와 낭비 풍조, 난세에 지친 무사들과 삶의 의욕을

상실한 서민들을 달래고 병폐를 치유시켜 분열된 일본을 통일시키기 위한 이념이었습니다.
선불교의 유행과 더불어 시작된 초암차는 극단적 사치와 낭비 풍조를 부채질하는 서원차를 대신하여 등장한 뒤,

소박하고 자연스런 차실과 단순 고요한 행다.법을 생활화 했습니다.

그 중에서 ‘꽃 한송이’ 의식은 혼란에 빠진 일본 사회에 신선하고 충격적인 활력소를 불어 넣었지요.

꽃 속에 들어가서 주인과 손님이 만난다는 미학체계는 시기와 모함, 적대감으로 분열된 일본사회를 응집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무사들은 ‘단 한 번의 칼’이 지닌 단순성과 혼신을 다하는 충성과 맹세를, 크고 화려한 집보다는 작고 소박한

집에서 다도를 즐기며  사는 삶이 행복하다는 것을 말없이 가르쳤습니다.

‘꽃 한송이’ 안에서 일본은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