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쇠퇴기의 초암차
그동안 주로 일본의 연구자들에 의하여 초암차의 근원이 조선시대 사찰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거나(한반도 설),
사카이와 교토 지역 상공업자 계층들이 즐겨 사용했던 암실(庵室)이라는 두 가지 설로 나뉘어 제기되어 왔지요.
그러나 그럴지도 모른다는 개연성만 언급했을 뿐 구체적인 과정과 증거를 찾아내지는 못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한국의 차인들이 일본 다도를 배우기 위해 시간과 경제력을 쏟고 있으며, 한국의 현대 차살림이 일본
다도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여서 한국 차살림의 역사성과 정통성에 대한 때늦은 반성과 연구가 뒤따르고
있기도 합니다.
일본 다도를 이끌고 있는 지도자들과 연구자들은 끊임없는 한국 여행을 통하여 일본 초암차의 근원을 비밀리에
찾고 있습니다.
문헌에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초암차의 비밀처럼 전해지는 몇 가지 한국적인 특징들로부터 느껴지는
정서 때문이지요.
그같은 특징을 골격으로 삼고 일본인의 역사와 마음을 옷으로 입혀 다듬은 것이 일본 다도임을
그들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적지 않은 한국 차인들이 일본 다도에 지나치다 싶도록 기울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거나,
일본 차인들도 생각하지 않는 일본적인 것에 함몰에 있기도 합니다. 걱정 되는 일이지요.
한국의 15세기는 불교 억압 정책으로 사찰의 형편이 매우 어려웠고 승려로 출가하는 것도 쉽지 않아서 불교 세력은
크게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신라와 고려 때 세운 크고 작은 유서깊은 절들이 오랜 풍상을 겪으면서 낡고 기울어져 갔지만 제대로 손볼 수 없어
허물어지거나 오래되고 아름다운 믿음의 전통이 폐절되기도 했지요.
불교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견해 중에는 이런 예도 있습니다.
중종 32년 대사헌 유세린(柳世麟), 대사간 윤풍형(尹豊亨)이 왕에게 올린 상소에서, ‘중들이 거리를 마구
돌아다니고 백성이 절을 찾아가며 향, 떡, 차, 과일을 부처 앞의 탁자에 벌여놓고 번당(幡幢)의
그림이 절에서 밝게 빛납니다.
재물을 다 없애어 백성에게는 한 끼의 저녁거리가 없는데 놀고 먹는 중에게는 앉아서 누리는 즐거움이 있는 것이….
사책(史冊)에 적혀 천년토록 씻지 못할 부끄러움을…’이라는 기록을 왕조실록에 남겨 놓았습니다.
결국 신라, 고려 때부터 사찰 문화의 근간으로 자리잡아 내려오던 차살림도 크게 위축될 수 밖에 없었지요.
그래도 차는 수행의 일부여서 완전히 단절될 수는 없었지만 옛처럼 넉넉하지는 못했습니다.
민간의 차 문화는 차츰 술로 바뀌었습니다. 차 대신 술이 등장한 것이지요.
그리하여 신라적부터 아름다운 풍속으로 전해져 오던 ‘차례(茶禮)’도 그 이름만 남고, 정작 차례를 모실 때는 차가
술로 바뀌는 민망함으로 풍속이 거칠어졌습니다.
그런 변화 속에서 민간의 차 문화 명맥을 간신히 이은 것은 영남사림파로 불리는 몇몇 유학자들과
청빈을 덕목으로 삼은 선비들에 의해서였습니다.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잇고 주자학적 실천윤리를 강조하던 신진사류들이었지요.
그들은 주된 생활기반을 향촌사회에다 둔 중소지주로서 비록 한때 상경하여 관직에 봉사하더라도 마음은 항상
처사적(處士的)인 취향을 가져서 농촌 실정과 민중의 애환을 직접 보고 느끼며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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