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4) 한국 차의 전래와 역사

썬필이 2020. 3. 8. 17:19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4) 한국 차의 전래와 역사

지난 초여름 일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일지암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마침 해남에서 농민운동을 하다 함께 차를 재배하고 제다를 하는 남천다회 식구들과 차 제다를 마친 후였다.

차를 가꾸고 차를 제다하는 차인들에게는 곡우 전부터 입하까지가 제일 바쁜 철이다.

차인들에게 차를 제다한 후의 충만함은 그 어떤 풍족함에도 비유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기쁨이다.

평소 존경하는 어른스님들, 선방의 수좌들, 그리고 가까운 지인들에게 한통씩 보내며 푸릇한 찻물이 든 뭉툭한

손을 바라보면 그저 한없는 우주를 담고 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즐거움과 충만함을 ‘확’깨버리는 전화였다.

전화의 주인공은 전남 지리산 화계에서 차를 재배하며 차를 만드는 젊은 차인이었다.

“스님! 스님께 차를 맛있게 해서 보냅니다.”“그래 고맙다. 무슨 차를 했니?”“구증구포로 해서 만든 차입니다.

” 순간 그 갸륵한 정성과 고마움보다는 안타까움이 스쳐갔다.

“찐차를 했니, 아니면 덖음차를 했니?”“예 스님 물론 덖음차로 했습니다.

”“구증구포를 했다면서 어떻게 한번도 찌지 않고 차를 제다할 수 있니?”

그 젊은 차인과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자생설·전래설·해양설 등 다양
‘구증구포’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얼마 전 일이다. 매달 발간되는 차(茶)잡지에 이런 글이 실렸다.

우리나라 전통적인 제다법은 구증구포(九烝九曝)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전통적인 제다를 복원하고 알리기 위해 섬진강변에서 제다학교를 만들어 우리 전통차

보급에 힘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외진 곳에서 우리 차문화 보급을 위해 애쓰는 모습은 높이 살 일이다.

그 글대로 하자면 좋은 일이며, 일견 매우 설득력 있는 말로 들린다.‘구증구포’의 전설적인 이야기가

떠도는 것은 차를 직접 제다하는 차인들에게는 어제 오늘 일처럼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구증구포’라는 말을 있는 그대로 풀이해 본다면 ‘아홉 번을 찌고 아홉 번을 말린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구증구포’로 만든 차는 우리 전통차인 덖음차가 아닐 뿐만 아니라 ‘찐차‘도 아닌 실체가 없는

제다(製茶)의 또 다른 ‘유령’인 것이다. 실제로 차를 제다해본 사람들은 잘 안다.

아홉 번 찌고 아홉 번을 말린다면 차 잎은 그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이 찢어지고 발겨질 수밖에 없다.

맛과 향도 마찬가지로 현저하게 감소될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구증구포’에 의한 제다법으로 만든 차는 극소수로 존재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시장’에 정식으로

출품되어 우리의 삶 속에서 오랫동안 내려오는 전통적인 제다법은 아닌 것이다.

‘구증구포’라는 말은 주역에서 최고의 양극수인 ‘九’를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이며 여러 가지 재료를 혼합하는

한약재를 달일 때나 필요한 것이다.

우리 차의 존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자생설’과 ‘전래설’ 그리고 ‘해양설’이 그것이다.

그러나 생태학적이고 역사학적인 측면에서 우리 차 이야기를 다루기 전에 먼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일은

문화는 다양한 교류에 의해 ‘전통’과 ‘변종’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어느 사회문화학자가 21세기 우리 문화코드의 사이클은 이제 ‘6개월’이라고 말할 정도로 짧아졌다.

광고 패션 노래 등 다양한 문화들이 뒤섞이며 빠르게 대중들의 기호를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문화적 현상은 과거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 신라 고려시대에도 문화적 ‘전이(轉移)´와 그에 따른 변종의 양상은 매우 빨랐을

것으로 보인다. 차도 마찬가지다.

가야 신라 고려시대에도 지배엘리트들은 우리차를 당시 문화중심국이었던 중국에 보내기도 하고

역수입하기도 했다.

정확하게 역사적 고증을 할 수 없는 우리차에 대한 ‘자생설’과 ‘전래설’역시 그런 점에서 파악돼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자생설의 핵심은 우리 고대국가인 가야국의 가야차에 대한 것이다.

우리차의 독자성과 관련이 있는 가야차의 존재는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언급되어 있다. 이능화는

“김해의 백월산에 죽로차가 있었다.

가야국의 수로왕비인 허씨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를 심어서 된 것이다.”고 적고 있다. 또 다른 기록은

‘삼국유사´에 보여진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서는 ‘김수로왕이 인도를 건너 가야국까지 오며 피곤해진 허왕후의 측근들에게

난액(蘭液:향기로운 음료, 즉 차)을 주어 쉬게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 ‘난액’을 차 연구가들은 바로 ‘차’라고 하는 것이다.

가야국 ‘죽로차’의 존재는 신라 흥덕왕 3년(828년)에 신라에 차씨를 가져와 심은 김대렴의 전래설보다 적게는

400년 많게는 600년 전으로 우리 차 역사를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 된다.

가야차의 존재는 우리나라에도 독자적인 차문화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고 이어 고구려 백제

신라에도 중국의 차문화뿐만 아니라 우리의 차문화가 나름대로 위치를 점하며 존재했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다.

현재 몇몇 차인들에 의해 가야차랄 수 있는 ‘장군차’‘황차’ 등의 실체가 조금씩 밝혀지고 있는 것은 차인으로서

매우 반가운 일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의 전래설에 따르면 ‘지난 12월 당나라 사신으로 간 김대렴이 차씨를

가져오니 왕은 지리산에 심게 했다.

차는 이미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성행했다.’고 밝히고 있다.

중국명차 ‘구화산차´ 신라서 가져가
우리차의 역사에서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중국의 명차라고 불리는 ‘구화산차’에 대한 것이다.

당시 신라에서는 많은 엘리트 스님들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신라왕자 출신인 김교각(704~803:지장) 스님이다.

김지장 스님은 신라를 떠날 때 신라의 차를 가져갔다.

당나라에서 공부를 끝낸 김지장 스님은 신라로 귀국하지 않고 중국의 구화산에서 많은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전했다. 그리고 그곳 구화산에 신라에서 가져간 차를 심어 보급했다.

중국의 팽정구가 쓴 개옹다사(介翁茶史:1703년)에는 “김지장이 신라차를 구화산에 심어 운경차(雲梗茶)를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역사 시간대별로 따진다면 김지장 스님이 중국에 신라차를 전한 것은 8세기이고

김대렴이 신라에 차를 가져와 심은 것은 9세기가 된다는 점에서 약 100년이란 시간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차의 역사는 다양한 편차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해양설’도 많은 타당성을 가진다.

해상왕 장보고는 그 당시 가장 귀중한 물품중 하나였던 차 무역을 전개했을 것으로 본다.

앞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 중 하나지만 중국의 차와 우리차에 대한 교환, 그리고 인근 대흥사 스님들과 교류를

통해 차를 적극적으로 보급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좀더 확실한 것은 ‘환경과 지정학적인 요건’에서 빚어질 수 있는 자생설이 가장 타당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차나무가 생장할 수 있는 최적지인,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화강암지대라는

지정학적 특징과 차나무가 지구상에 생긴 이래 새나 배, 바다의 조류, 지형의 변화 등으로 ‘차씨’가 계속 옮겨져

번식했으므로 백제와 가야지방에는 우리가 기록할 수 있는 역사이전부터 차나무가 이미 ‘자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좀더 주목할 것은 차나무의 존재에 대한 유무가 아니라 독자적으로 차를 ‘약용’이든

‘음료’든 직접 제다해서 마셨다는 점이다.

그런 시각에서 우리차의 역사를 새롭게 바라볼 때 우리차의 기원과 그 관련된 논쟁들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수 있을 것이다.

가야를 비롯한 우리고대국가에서는 차가 약용보다는 떡이나 술과 같이 귀족계급의 기호음료로 널리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가야의 종묘제사에서는 해마다 세시 때가 되면 술과 단술을 빚고 떡 밥 차 과일등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점에서 고대의 음다풍속은 중국과 다르게 일찍이 ‘기호음료’로서 대접을 받았던 것 같다.

고대국가 중 가장 선진적인 문화를 보유했던 고구려에서도 차는 기호음료로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애용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구려에서는 누구나 만들고 마실 수 있는 ‘단차(團茶)´가 유행했다.

그같은 사실은 일본의 유명한 사학자 아오키 박사가 고구려의 옛 무덤을 발굴하면서 3개의 단차를 발견해

우리차계에 많은 충격을 준 것에서 증명되고 있다.

‘구다국(句茶國)´이란 차 관련 지명이 있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알려진 우리나라 차 지명 중 가장 오래된 지명이랄 수 있는 ‘구다국’은 차가 당시 일반민중의

생활양식과 깊은 연관을 갖고 일상화되어 있음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야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백제도 그 문화의 섬세함과 우수성, 지형적 특성을 볼 때 음다풍속이 매우

발달했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그렇지만 차를 재배할 수 있는 대부분의 땅이 바로 백제였고 자연스럽게 자생차가 그 생명의 뿌리를

깊숙이 박고 있으면서 활발한 차 문화를 꽃피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 행기 스님 일본에 전래한 인물로
이같은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일본 ‘동대사요록´에 나오는 행기 스님의 존재다.

행기 스님이 일본에 차를 전래한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은 백제의 지도층과 스님들이 7세기

이전부터 차를 마셨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구산선문을 통한 남종선과 차의 유입을 통해 신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포용을 시작한다.

삼국 중 가장 후진국이었던 신라는 당시 최고의 문화로 꼽혔던 차문화를 보급 확산시키기 위해 국가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덕여왕이 지리산이라는 차의 최적지에 차나무를 생산 보급할 것을 명령한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신라시대에는 왕,승려,귀족층뿐만 아니라 일반백성까지 차를 마셨다는 다양한 기록이 보이고 있다.

차를 전문적으로 만들어 바치던 마을인 ‘다소마을(茶所村)´, 귀족들이 차를 마시며 즐겼던 강릉의 한송정,

휴대용 다구(茶具)를 지고 차공양을 가다 경덕왕과 만난 충담 스님의 이야기 등을 통해서 당시 차 문화가 얼마나

일반화되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원효 스님의 차방(茶房)이었던 ‘원효방’의 존재는 그 사실을 잘 입증하고 있다.

이규보는 ‘남행월일기´에서 전북 부안군 상서면에 있는 2.4m크기의 ‘원효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2.4m의 공간을 반으로 갈라 내실에는 불상과 원효 스님의 초상화, 외실에는 병하나, 찻잔과 불경을 놓는

책상만 존재하는 매우 작은 차방이다.

이같은 사실로 미루어 신라시대에도 다채로운 형태의 다방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차의 전성기는 이어진다. 당시 차는 치국(治國)의 도구로 사용됐다.

망국의 한을 달래고 있는 신라귀족들과 승려들에게 통치자의 ‘격려금’으로 차를 하사했다.

또한 차를 준비하고 베푸는 의례를 담당하는 관청인 다방과 다원이 존재했다.

다방은 다방시랑(정3품)에서부터 다방별감까지 있었고 직급에 따라 모자, 옷, 허리띠등이 달랐다.

각 지역의 중심부에 존재하며 아름다운 정원과 정자를 소유해 차를 마실 수 있었던 다원은 경북다방원,

경남다견원, 황해다정원, 충남·경북다정원 등이 있었다.

고려 때는 또 궁중 밖에서 왕족에게 차를 올리거나 준비하는 일을 위해 다구와 그에 필요한 짐을 담당했던

다군사(茶軍士)가 존재했고 차를 통해 부를 축적했던 차 상인까지 존재했다.

뿐만 아니라 명전(茗錢) 즉 투다(鬪茶:차의 맛을 겨루는 것)를 할 정도로 사치스러운 행다(行茶)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새로운 왕조의 차 문화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소박한

형태로 변화하게 된다. 수없이 밀려드는 전란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차문화를 주도했던 사찰의

급격한 몰락은 조선시대 차산지의 폐쇄를 불러왔고 차문화를 소박한 형태로 변형시킨다.

과중한 차세와 차 공납의 심화는 어려운 백성들을 수탈하는 도구로 이용됐다.

稅茶 등 백성들 수탈 도구로 이용도
세차(稅茶)를 내기 위해 15세기에는 차 한홉과 쌀 한말,17세기에는 차 한말과 무명 30필을 바꾸었을 정도로 차의

 폐해는 심각해졌다. 김종직은 그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관청용 차밭을 일구고 차 공납을 자체적으로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도 다양한 음다풍속이 존재했다.

궁궐이나 사신의 숙소인 태평관에서 차를 주관하는 다방, 관청에서 제대로된 판결이나 회의를 하기 위한

다시(茶時:차 마시는 시간)가 있었다.
그중 ‘야다시’는 매우 특이한 경우이기도 하다.

야다시(夜茶時)는 밤중에 관리들이 다시를 갖는 것으로 파렴치한 치부나 도덕적 패륜을 저지른 관리들을 골라

그 죄상을 흰 널빤지에 써서 그 집 문위에 걸고 가시나무로 문을 봉한 뒤 서명을 하고 돌아갔다.

야다시를 받게 된 사람은 그집에 평생 유폐되어 다시는 세상출입을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얼마전 안방극장에 등장했던 ‘다모(茶母)´는 조선시대 각 관청에서 차심부름을 하기 위해 서민계층에서

선발된 격이 낮은 여성을 말했다.

그러나 중엽 이후 포도청에서 선발한 여자 비밀형사로 변질되기도 했다.

아직도 한국 차 문화사에 대한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거의 백가쟁명의 시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차는 군자와 같아서 품성에 삿됨이 없다.”는 말이 있다.

차가 역사속에서 다양한 편린에도 불구하고 당시대의 정신적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해온 고고한 정신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어둡고 후미진 곳에도 우리생은 늘 피어나듯 하얀 황금의 꽃술을 머금은 차꽃도 찬바람과 눈을

맞으며 여기저기 가없이 피어난다. 수없는 역사의 핍박과 수탈 속에서도 느껴지는 차의 힘이다.

우리가 오늘 이 시대에 배워야 할 차의 또 다른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