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6) 초의·추사 그리고 정약용
이맘때면 생각나는 차가 있다.
바로 ‘눈물차’다.‘눈물차’에 대한 사연은 이렇다.1996년의 일이다.
별이 하늘에서 내려온 듯 자우홍련사 작은 연못에 둥둥 떠내려오고 달빛은 풀벌레들의 합창에
일그러지던 날이었다.
초의스님이 ‘동다송´에서 말했듯이 깊은 밤 대자연의 품속에 빨려드는 풍광을 벗삼아 한잔의 차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스님 계십니까” 밤중에 절을 찾는 나그네는 드물다.
아주 친한 도반이나 절 식구만이 늦은 밤 사찰을 찾을 수 있는 법인데 연락도 없이 찾아든 사람은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해남의 신문사, 농민회 등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지역활동가들이었다.
낯익은 얼굴들이었고 10여명 가까이 되는 대식구였다.
●새로운 茶문화 생산공동체 구성
자우홍련사 툇마루는 때아닌 손님들로 꽉찼다. 한잔의 차를 돌리고 대뜸 찾아온 연유부터 물었다.
“스님 저희들이 차 공부를 좀 하고 싶습니다. 저희들을 가르쳐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뜻은 간단했다.
향후 환경과 생명에 대해 관심을 갖고 농촌지역에 어울리는 새로운 차문화 생산공동체를 구성하겠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어이가 없고 당돌한 제안이었다.
생산과 소비가 연결된 차문화공동체 구성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생각보다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제안에 망설여졌다. 생각해보겠다며 그들을 돌려보냈지만 못내 마음이 아팠다.
그들은 그후로 대여섯차례 방문하며 자신들의 뜻을 전했다. 결국 승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작명을 했다.
남쪽에서 늦게 차를 시작한다는 뜻을 가진 ‘남천다회’라고 명명했다.
어떤 농사든 어떤 계획이든 서둘러서 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아주 천천히 시작하라는 뜻에서 지어준 이름이었다.
한달에 두 번씩 공부를 하기로 했다.‘동다송´‘다신전´, 그리고 행다와 차에 대한 것들도 공부를 했다.
젊은 그들에게는 열정이 있었다.1997년부터 놀고 있던 땅 8000평에 차밭을 가꾸기 시작했다.
우리가 택한 농법은 철저하게 친환경농법이었다.
화학비료 등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순수한 자연의 기운으로만 차밭을 조성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10년까지는 수확을 바라지 않을 작정으로 자연에서 나오는 부엽토만 퇴비로 사용했다.
조금 느리지만 인간과 호흡하는 차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주경야독이란 말을 그들을 보며 실감할 수 있었다.
낮에는 차밭을 가꾸고 밤에는 차 공부를 늦게까지 하느라 모두들 열심이었다.
차밭은 4000평,5000평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일본과 중국의 차 생산지와 다창들 그리고 국내외 유명 다원들을 둘러본 그들의 안목은 점차 넓어지고 깊어졌다.
7년째 되던 해인 2002년 4만여평의 차밭에서 생엽 200㎏을 채취했다.
그리고 제다한 가공량은 40㎏.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작은 양이었다. 차브랜드는 ‘손덖음 첫물차’로 했다.
기계적인 영농이 아닌 손으로 덖는 첫물차만을 만들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
첫차를 제다해 일지암에서 초의스님에게 제사를 지낸 후 모두 모여 차를 마시며 기뻐했다.
그날의 가장 아름다운 사연은 3000평의 차밭을 가꾼 남천다회 부부 이야기다.
차농사를 시작한 지 5년만에 젊은 부부는 고작 4통의 차를 손수 만들었다.
너무 기쁜 나머지 그 차들을 이불속에 넣고 눈물을 훔치며 밤을 꼬박 샜다고 한다.
참으로 눈물나는 눈물차 이야기인 것이다.
이같은 사연이 담긴 첫물차 이름을 남천다회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눈물차’로 명명한 것이다.
그날도 바로 오늘같은 밤이었다. 그때의 기쁨은 차인으로서 또 하나 기억할 만한 역사로 남아 있다.
이렇듯 ‘인연’은 모든 것을 바꾼다.
18세기 최고의 개혁적인 지식인들이었던 초의스님,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의 인연은 당대 조선사회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 이시대까지 많은 지식인들에게 그 영향을 끼치고 있다.
●다산에 유서와 시학 배워
초의스님은 24세 때인 1809년 강진 다산초당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다산 정약용을 아암 혜장스님을
통해 먼저 만났다.
아암 혜장과 정약용은 혜장이 40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6년 동안 교류했다.
정약용이 아암 혜장에 보낸, 차를 청하는 편지인 ‘걸명소(乞茗疏)’는 지금까지도 차인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걸명소´에는 “을축년(1805년)겨울 아암선사에게 보냄.
나그네는 요즘 차만 탐식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약으로도 마십니다. 글 중의 묘함은 육우의 ‘다경´삼편이요,
병든 몸은 누에인 양 노동의 칠완다를 들이킨다오” ‘소’의 형식을 빌린 다산의 ‘걸명소´는 노동의 시와 육우의
다경 등에서 보여지듯 차에 대한 해박한 지식뿐만 아니라 다도에도 깊은 경지에 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암 혜장이 세상을 떠난후 초의는 다산을 스승으로 모시며 유서(儒書)와 시학(詩學)을 배웠다.
초의스님은 다산을 스승으로 극진하게 모셨다. 초의스님은 1813년 다산의 초대를 받았다.
그러나 때 마침 내린 비로 인해 장삼자락이 젖어 다산초당을 방문하지 못했다.
다산에게 가지 못한 초의는 안타까운 마음에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슬프도다.
이 적은 몸 하나 나에게 선인의 경거술이라도 지었더라면 빗속으로 산넘어 날아갔을 텐데.
” 초의스님이 정약용을 얼마나 극진히 모셨는지를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시가 있다.
‘탁옹(정약용의 별호)선생에게 드림’이란 시다.“부자는 재물로 사람을 떠나보내고, 어진이는 말로써
떠나보내네. 지금 선생께 하직하려 하지만, 저는 마땅히 드릴게 없습니다.
먼저 공경하게 누추한 마음 펼쳐 은자의 책상앞에서 말씀드리리라. 하늘이 맹자 어머니같은 이웃을 내려주셨네.
덕성과 학업이 나라의 으뜸이요. 문장과 자질이 함께 빛나시네.
편안히 머물 때도 항시 의로움을 생각하고 실천에 나서면 어짊을 보였네.
이미 넉넉하면서도 모자란 듯 하였고 항시 비우고 남을 포용하였네.
내 이런 도를 구하기 위해 멀리 와서 정성을 드립니다.
이제 또 헤어지는 자리에 종아리를 걷고 가르침을 청합니다.
수레가 떠나갈 때 주신 말씀은 가슴에 깊이 새기고 또 띠에다 써두렵니다.”라며 감사하고 있다.
훗날 초의가 조선의 신진사대부들과 활발하게 교류할 수 있었던 유학적 터전은 정약용에게 받은 것이다.
초의스님과 다산은 많은 교류를 했다.1812년 가을 초의선사와 정약용은 월출산 백운동에서
월출산 외경을 그렸다.
초의스님은 백운도(白雲圖)를 그렸고, 다산은 청산도(靑山圖)를 그렸다.
그리고 그 그림의 말미에 시를 지어 붙였다.
1823년 대둔사지 편찬에도 함께 참여했다.
초의스님은 수룡스님과 함께 편집을 담당했고, 호의와 기어스님이 교정을 보았고, 완호와 아암스님이
감정했으며 정약용이 필사를 했다. 정약용이 해배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교류는 지속되었다.
초의스님은 한양을 방문할 때면 늘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수종사에 머물렀다.
수종사 인근 마현마을에는 그의 평생 스승 정약용과 정학연이 살고 있었다.
●스승과 제자관계 떠나 수행자로
다산과 그의 아들은 수종사의 샘물로 늘 차를 달여마셨다.
한양에 온 초의스님은 수종사에 머물며 다산과 교류했던 것이다.
이렇듯 다산은 평생 초의스님의 스승 노릇을 하며 그의 안목을 더욱 깊고 넓게 해주었다.
다산 정약용은 차인으로 차를 직접 제다했을 뿐만 아니라 주민들에게 제다법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18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강진을 떠날 때 제자들에게 차를 만들어 마시며 신의를 지켜나가도록
‘다신계’(茶信契)를 만들었을 정도였다. 초의스님과 다산은 스승과 제자로서 유학을 배운 것만이 아니었다.
사상적으로 유·불·선에 대한 폭넓은 교류를 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차에 대한 제배 및 제다 그리고 행다 등
다양한 논의도 함께 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자신을 스승으로 모신 초의스님에 대해 다산은 스승과 제자관계를 떠나 한 사람의 존귀한 수행자로 평생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초의스님이 평생의 도반(道伴)인 추사 김정희를 만난 것은 30세인 1815년이다.
초의스님은 그때 처음으로 한양에 올라가 2년 동안 머물렀다.
정약용의 주선으로 한양으로 올라간 것으로 추측되는 초의스님은 서울 두릉(杜陵)에 사는 다산의 아들
유산 정학연, 운포 정학유, 자하 신위, 해거 홍현주 등과 교류했다.
이때 추사 김정희와 그의 동생 산천 김명희, 금미 김상희와도 사귀었다.
1786년 같은해에 태어난 초의와 추사는 한눈에 서로 뜻이 통했다.
당대의 석학인 옹방강, 완원 등과 교분을 맺고 청의 금석학 시문 전각등을 깊이 연구해온 젊고 개혁적인
신진사대부였던 추사는 청의 상류사회에서 중국의 고급 차문화를 배워 차에 대해서도 해박했던 것이다.
추사가 가끔씩 초의스님에게 자신이 구한 중국의 고급차를 보낼때 초의스님이 중국차에 대해서 어떤 것은
참으로 진미가 있고 어떤 것은 가짜 느낌이 난다고 했던 것은 그같은 교류를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추사는 차에 대해 ‘광적’이었을 정도로 애착이 강했던 것 같다.
승설(勝雪), 고다노인(苦茶老人), 다문(茶門), 일로향실(一爐香室) 등 차에 관한 수많은 호가 있을 뿐만 아니라
초의스님에게 차를 선물받고 써준 저 유명한 명선(茗禪)을 비롯, 죽로지실(竹爐之室),
다로경권실(茶爐經卷室), 다산초당(茶山艸堂) 등 차에 관한 수많은 글도 남기고 있다.
일지암을 맨처음 방문한 사람은 추사도 그의 동생들도 아닌 아버지 김노경이었다.
완도 고금도에서 4년동안 유배생활을 하다 풀려난 김노경은 그의 아들과 친하게 지내는 초의스님을 알고 싶어
일지암을 찾은 것이다.
일지암에서 하룻밤을 머문 김노경은 시·서·화등 다방면에 뛰어난 성취를 보여준 초의스님에게 첫눈에 반했다.
초의스님은 김노경에게 일지암의 유천에 대해 시로 답한다.
“내가 사는 산에는 끝도 없이 흐르는 물이 있어, 시방에 모든 중생들의 목마름을 채우고도 남는다.
각자 표주박을 하나씩 들고와 물을 떠가라. 갈때는 달빛 하나씩을 건져가라.”
초의스님의 시에 김노경은 유천의 물맛이 소락의 물맛보다 뛰어나다고 극찬한다.
“1840년 9월 추사는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며 초의스님을 찾아 일지암을 방문한다.
오롯한 가을의 풍광에 휩싸인 일지암에서 초의스님을 만나 추사는 애틋한 하룻밤을 함께 지낸다.
동지부사의 고위직에서 하룻밤 사이에 유배를 떠나는 추사에 대해 초의스님의 위로는 많은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후 초의스님은 자신의 제자이자 추사의 제자였던 허유를 통해 제주도로 차와 서신을 보냈다.
제주도에서 초의스님의 차와 서신을 받아본 추사는 그 고마움에 ‘일로향실’이란 글을 써서 허유편에 보냈다.
‘일로향실’은 지금도 대흥사에 보관되어 있다.
추사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 초의스님은 1843년 봄 제주도로 건너간다.
1년여 동안 제주도에 머물며 초의와 추사는 차에 대한 즐거움과 학문적 교류의 폭을 넓혀간다.
추사는 이때 초의스님을 통해 선불교에 대한 혜안을 넓힌다.
초의가 다녀간 다음 해에 추사는 세속의 각박한 인심을 따르지 않고 어려움속에서도 그를 따르던 제자
이상적에게 그 유명한 ‘세한도’(歲寒圖)를 그려 세상에 선보인다.
소나무와 잦나무 지조는 눈이 내린 후에야 그 절개를 알수 있다는 화제(畵題)를 지닌 ‘세한도’는 세속을
완벽하게 품어낸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세상의 질곡에 대해 울분을 터트려야할 추사로부터 이같은 작품이 유배지에서 나왔다는 것은 초의스님의
영향이 컸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세한도 등 명작들 초의 영향 커
초의스님은 제주도에서 차의 재배를 시도한다.
어디까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추사를 위해 차의 재배를 시도했다고 한다.
이같은 인연이어서일까. 지금 제주도에는 국내 굴지의 회사가 운영하는 광대한 차밭이 존재한다.
초의스님은 1851년 추사가 보내온 서간문을 모은 ‘영해타운´(瀛海朶雲)을 책으로 묶어낸다.
‘영해타운´은 1840년부터 1848년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추사가 보낸 서신을 차곡 차곡 모았다가
책자로 편서한 것이다.
초의스님이 추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절절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추사는 북청유배에서 풀려나 과천에 머물며 초의스님을 더욱 그리워하게 된다.‘소동파의 생일날 과천
사람이’란 편지는 그러한 추사의 마음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큰눈이 내리고 차를 마침 받게 되어 눈을 끓여 차맛을 품평해 보는데 스님과 함께하지 못함이 더욱
한스러울 뿐입니다.
요즘 송나라때 만든 소룡단(小龍團)이라는 차 한 개를 얻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특이한 보물입니다. 이렇게 볼 만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그래도 오지 않으시겠습니까.
한번 도모해 보십시오. 너무 추워 길게 쓰지 못합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초의스님은 추사의 간절한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차를 보내달라는 추사의 청도 제때 지키지 않았다.
추사는 제때 차를 부쳐주지 않는 초의스님에게 익살섞인 ‘최후의 통첩‘도 보낸다.
“지금 지체없이 보내지 않으면 덕산의 방과 임제의 할로 경책하겠다.”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그러다 초의스님이 차를 보내오면 “과천의 샘물로 차를 달여 시음하니 과연 천하의 제일가는 차다.
”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추사가 초의스님과 그의 차를 얼마나 좋아했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던 추사가 1856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초의스님은 깊이 슬퍼했다.
슬픔에 못이긴 초의스님은 추사가 세상을 떠난 3년후 ‘완당김공제문’(阮堂金公祭文)을 쓴다.
“오호라 그대와 나의 42년 동안의 아름답던 우정이여. 그 우정일랑 다음에 저 세상에서도 오래 오래
이어나가십시다.
나는 그대의 글을 받을 때마다 마치 그대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고 그대와 만났을 때는 진정 허물이 없었습니다.
그대와 나는 손수 뇌협과 설유를 달여 마시곤 했는데 그러다 슬픈 소문이 귀에 닿으면 적삼 옷이 함께
젖기도 했습니다.
슬프다. 그대를 먼저 떠나보내는 나의 애끓는 심사여. 황국이 다시들고 흰눈이 내리는데 어찌하여 내가
이토록 늦게 그대의 영전에 당도했을꼬. 원망일세 원망이로세.
하늘과 땅 사람이 모두 알지 못해도 오직 그대는 나의 심사를 알것입니다.
”라고 애절하고 통절한 마음을 적고 있다.
추사를 보낸 초의스님은 그후로도 오랫동안 떠나버린 그를 잊지 못했다.
초의, 추사, 다산은 이렇게 거대한 변화의 담론이 진행됐던 18세기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그들이 엮어낸 인연의 바다는 새로운 세기에 목말랐던 많은 후학들의 귀감이 되었다.
인간과 자연이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눈물차를 만들어낸 남천다회도 마찬가지다.
200여년이란 시공을 뛰어넘어 일지암과 초의스님의 선차(禪茶)의 인연이 오늘 이시대에 생산과 소비,
그리고 문화가 결합된 진정한 차의 세계를 열려는 움직임을 싹틔우고 있는 것이다.
‘눈물차’를 만들며 차문화생산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남천다회는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 차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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