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색채화가 클림트 레플리카 展
전시기간 : 2021.07.09(금) ~ 08.22(일)
전시장소 : 경남문화예술회관 제2전시실(경남 진주시 강남로 215)





"나에 대해 알고 싶으면 내 그림을 봐라"
1862년 7월14일, 빈 근교의 바움가르턴에서 귀금속 세공사였던 에른스트클림트와 안네 핀스터 사이의 7형제 중 둘째로
출생한 구스타프 클림트는 아르누보 계열의 장식적인 양식을 선호하며 찬란한 황금빛의 작품으로 우리를 매혹시키고
있는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미술 거장입니다.
금세공사의 아들이었던 클림트는 누구보다도 황금빛의 금박 소재를 잘 다루었고,이를 에로틱한 누드에 결합시켜
새로운 화풍을 창조해냈습니다.
클림트의 예술은 역사주의와 상징주의, 그리고 자연주의, 표현주의, 추상이 뒤섞여 있는 장대하면서도 기이한
혼합물로써 어떤 범주에도 명확히 집어넣기가 어렵습니다.
클림트의 작품들은 미술사에서 영향은 한정적이지만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와 유사한 화가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회화작품 245점과 수천 장의 드로잉만으로도 "클림트"라는 세계를 독보적으로
영원히 빛내고 있습니다.
SECTION 1 - 최고의 역사 화가에서 상징주의자로



클림트의 "소녀"라고 많이 알려져 있는 작품으로 동생 에른스트가 죽은 후 그의 딸을 그린 작품으로
조카 헬레네 클림트가 6살 때 모습입니다.
슬퍼 보이는 눈동자와 단조로운 색 배치는 소녀의 모습을 더욱 순수한 존재로 만듭니다.

일반적으로 극장을 그린다고 하면 무대를 그리는데 클림트는 특이하게도 무대가 아닌 관람석을 그려 클림트의 이름을
알리게 된 첫 출세작이었습니다.
150여 명의 사람들이 관람석을 메운 광경을 그린 이 작품은 일러스트처럼 또 사진처럼 정밀하게 그려졌습니다.
그 당시 유명 인사들을 바로 찾아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림이 그려지기 전부터 빈의 상류층들은 클림트를 찾아가 자신의 얼굴을 넣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작품을 의뢰한 대학 관계자들과 일반인들의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과 같은 철학에 대한 일화를 그릴 것으로
기대했습니다.그러나 막상 완성된 그림은 무한한 공간을 배경으로 몸부림치는 벌거벗은 인간들이 원주처럼
쌓아올린 모습인데요. 목표를 잃고 방황하는 듯 보여 비난의 대상이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은 그 해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금메달을 받게 되었습니다.


빈 분리파, 유토피아의 실현
1897년 5월, 클림트와 오스트리아의 젊은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은 기존의 관습과 역사주의에 반기를 들게 됩니다.
공식협회들과 거리를 두고, 빈 예술가 연맹이 아닌 자신들만의 새로운 작가 연합을 구상하며 :분리파"라는 이름을
얻게됩니다, 분리파의 목표는 회화, 건축, 디자인, 장식미술, 응용미술을 모은 종합예술 구현하기였습니다.
1902년 제14회 분리파전시는 베토벤의 음악을 주제로 다양한 종합예술을 선보였고 58,000여명의 관람객이
방문하는 대성공을 거둡니다.

제14회 분리파 전시에서 소개된 작품으로,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합창"을 시각적으로 재현한 벽화 작품입니다.
아르누보 상징주의의 걸작으로 손꼽힙니다.

SECTION - 2 클림트의 황금시기
" 나는 나 자신에 전혀 관심이 없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다. 특히 여성에게"
클림트는 여인의 초상을 즐겨 그렸습니다.
그래서 "여인의 화가"라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였습니다.
작품을 그린 후 금이나 은 같은 화려한 재료로 작품을 화사하게 장식하고, 액자도 그림의 분위기에 맞춰
직접 디자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액자도 그림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본격적인 황금 빛 클림트 스타일이 시작된 그림입니다.
빈 분리파가 결성되고 첫 전시가 개최될 시기에 제작된 그김 속 황금으로 장식된 아테나 여신의 모습은 앞으로
다가올 클림트의 황금시대를 예고합니다.

클림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주위엔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림의 주인공은 클림트의 연인이자 평생의 동반자였던 에밀리 플뢰게입니다.
클림트의 동생 에른스트의 아내 헬레네 플뢰게의 동생이 바로 에밀리였습니다.
그녀와는 육체적이 아닌 정신적인 관계였고, 죽는 순간에도 에밀리만 찾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에밀리는 클림트 사후에도 독신으로 지내며 그의 자식들을 돌봐줬다고 합니다.
ㅎㅎ 클림트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는데 자녀가 13명

"키스"는 세상에서 가장 많이 복제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을 보면 여성은 남성의 목을 감싸 안으며 남성에게 부드럽게 기대고 있습니다.
아마 클림트는 이 작품을 그리기 전 감미로운 사랑의 기억을 또올렸을 것입니다.
그림 속 여인이 바로 에밀리 플뢰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적이거나 관능적이지 않고 신비롭고 꿈같이 표현했습니다.
여인은 마치 꽃이 가득한 들판에 핀 한 그루 꽃나무처럼 표현되고 황금빛으로 온몸을 감쌌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금처럼 영원하길 바랐던 연인의 사랑, 바로 자신의 사랑처럼 말입니다.

클림트는 3년간 이 작품을 그렸으며, 클림트 황금시기(1899 ~ 1910)의 마지막 작품이다.
오스트리아의 모나리자 라고도 불리는 이 그림은 오스트리아 정부로 부터 8년간의 소송을 통해 '아델레'의 조카
마리아 알트만에게 반환되었죠. 이후 이 그림은 크리스티 경매를 통해 2006년 1억 3,500만 달러(한화 1,500억원)에
에스티 로더 창업주 아들 로널드 로더에게 팔렸습니다.
SECTION - 3 삶과 죽음
"모든 예술은 에로틱하다"

"희망"이라는 제목은 독일어 원어로 보면 Hoffnung(희망)으로 guter Hoffnung(임신 중)이라는 단어를 연상 시킵니다.
임신한 여성성의 표현은 몇 년 후 생먕과 육체의 찬가라는 두 가지 버전을 갖게 되는데 나중의 것은 좀 더 이상적이고
위선적인 클림트의 성향을 드러냅니다.
음울한 요소는 사라지고 풍성한 꽃에 둘러싸인 의기양양한 여성만 남아있게 됩니다.
클림트는 삶과 죽음은 순환이고, 죽어서도 영원히 사는 길은 생명을 잉태하는 일이며, 이는 곧 희망이라고
이 그림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클림트는 늘 죽음을 두려워했습니다.
아버지가 56세에 갑자기 뇌출혈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도 마찬가지로 60세 이전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1918년 1월 11일, 그는 결국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리다 뇌출혈로 쓰러져 한 달 후 2월6일, 아버지와 똑같은
나이인 56세에 세상을 뜹니다.
말년에 그린 "죽음과 삶"을 통해 그의 불안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을 완성하는데 자그마치 5년 이상 걸릴 정도로 심혈을 기울인 이유였죠.
어린아이부터 엄마, 연인들, 노인의 행복하거나 슬프거나 절망적인 모습은 우리들 삶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죽음을 눈치채지 못한 채 영원히 살것처럼 말입니다.



클림트 후기 작품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탄생, 죽음, 삶"의 주제는 동일하나, 인물의 대담한 압축은 전 작품 중 가장 독특합니다.
뭉쳐져 있는 다색 모포들이 물결치듯 멀어져가는 끝에 아이의 얼굴이 나타납니다.
그 얼굴은 비록 천에 파묻힌 것 같지만 명쾌하게 화면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SECTION - 4 색채와 양식의 변화, 풍경화
"날씨가 좋으면 나는 가까운 숲으로 가서
햇살 아래에서 늦게까지 그림을 그린다"
클림트가 남긴 모든 회화 245점 중 초상화가 189점이고, 1/4인 56점이 풍경화입니다.
풍경화를 보시면 인물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캔퍼스도 모두 정방향으로 정지된 느낌으로 적막하게 보입니다.
클림트는 정사각형의 화면으로 작품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는데, 특히 풍경화는 대부분의 작품이
정사각형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00년경부터 그린 풍경화는 장식성을 추구하는 모티프가 되어, 훗날 화려한 양식을 구축하는 초석이 됩니다.



클림트와 동시대에 살았던 빈의 시인 페터 알텐베르크는 클림트가 풍경을 여성처럼 그렸다고 적었습니다.
특히 이 작품 해바라기는 구도를 보았을 때 "키스"를 연상시킵니다.
그리고 어쩌면 해바라기를 그린 빈 고흐의 영향을 받았었을 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빈 고흐의 작품은 1903년 빈 븐리파전과 1906년 빈의 키트케 화랑에서 전시되었습니다.


SECTION - 5 오리엔탈리즘
"나는 인간적으로 재미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매일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그림을 그리는 화가일 뿐입니다."
클림트가 활동했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유럽 화단의 많은 화가들은 일본의 우키요에 목판화 등
동양풍의 오리엔탈리즘에 큰 매력을 느끼고 매료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작품을 통해 클림트가 장식이나 인간의 몸을 다루는 방식과 구성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클림트가 사망한 후, 그의 작업실에는 두 점의 작품만이 이젤에 올려져 있었는데, 바로 미완성이었던
"신부"와 "부채를 든 여인"이었습니다.
후기에 접어들면서 색감은 점점 가볍고 밝아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 미술은 인상주의와 아르누보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모네나 고흐와 마찬가지로, 클림트도 일본과 중국 미술의 영향을 받아 동양적 문양들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이 그림에도 그런 이미지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그림의 배경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의상 등 모두 동양적이고 화려한 색채와 장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클림트의 후기 회화 중 가장 화려한 작품입니다.

모델인 프라마베시의 부모가 모두 클림트의 열렬한 편이자, 공방의 후원자였습니다.
이 소녀는 어린 시절부터 클림트와 알고 지낸 사이로, 클림트가 여인이 아닌 소녀를 이렇게 크게 그린 것은
이 그림이 유일합니다.




SECTION - 6 클림트의 드로잉
클림트 작품의 초석이 되는 드로잉에는 자유로운 표현이 넘칩니다.
클림트는 인체 세부에 대한 철저헌 이해로 육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그 특징을 완벽하게 묘사했는데요.
다소 선정적으로 보일 수 있는 모델의 포즈와 클림트만의 매력적인 스케치 기법은 그가 인생 전반기에 걸쳐 추구했던
성과 사랑, 에로티시즘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그는 영감을 자극하기 위해 즐겁게 드로잉을 했으며, 우리는 이 작품들을 통해 창작에 임하는 작가의
통찰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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