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경. 김하경 기획 초대전
전시기간 : 2023.01.27(금) ~ 02.04(토)
전시장소 : 스페이스결(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7길 19-30)
도량
재거나 되거나 하여 사물의 양을 헤아림, 길이를 재는 자와 양을 재는 되.
불도를 수행하는 절의 경내. 부처나 보살이 도를 얻는 곳. 또는, 도를 얻으려고 수행하는 곳.
사물을 너그럽게 용납하여 처리할 수 있는 넓은 마음과 깊은 생각.
여름 즈음 근처의 사람이 거의 없는 사찰 공간을 자주 산책하게 되었다.
어느 날 순식간에 법당 안에 뛰어 들어가 달리는 아이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절을 올리던 한 사람을 본
경험은, 열린 공간 내부에서 완전히 개인적인 순간을 갖기로 서로 합의한 공간성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안에서 하는 어떠한 행위, 혹은 그에 준하는 인간의 행동 양식에 대해 나의 방식으로 작업을 해나가고 싶었다.
본질적인 만드는 행위와 공간의 관계에 주목하고자 함이다.
그러던 중 사찰의 경내를 뜻하는 '도량'과 사물의 길이와 들이를 담아 재는 도구를 의미하는 '도량'의 발음이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물들이 각각의 도량형에 담기듯 사람들도 '도량'이라는 종교적 공간 안에 있는 것,
나아가 어떠한 공간의 내부에서 크기를 달리하며 살아가는 것, 이러한 사물과 공간이라는 인간이 구축하는
형태적 경계들에 대한 작업을 해나가게 되었다.
건축물은 외연과 내연에 있어 구조적이며 반복적인 조형을 지니고 있었고 그 시각적 내용은 현실과 다른 낯섦의
효과를 갖고 있어 기원하는 어떠한 공간을 그리고 있었다.
그것에 대해 도량형이나 건축재들이 그러하듯 동일한 단위를 반복하여 형태를 구축하고 건축에서 벽이자
통로인‘문’의 개방적인 형태를 가져와 제시하고자 했다.
종이와 목재 소재는 오래 전의 건축적 버내큘러를 호명한다.
지오 폰티는 그의 저서 <건축예찬>에서 [모던함은 4미터 사이즈의 가구를 채택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포기하지 않는 훨씬 더 복잡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전통이‘영원의 지금에서 새롭게 파악’*될 수 있도록 나는 한국적인 것을 다시 소환하여 번안하고,
맞닥뜨려 놓는다. 이것은 추구라기보다는 소멸을 망설이며 유예해 두는 것, 포기하지 않음에 가깝다.
추구한다는 것은 어떠한 높은 이상, 이데올로기적 목표에 더 가깝다.
포기하지 않는 것은 지면에 더 가까운 일상성에 다가서는 개념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추구할 때 보다 차라리 포기하지 않을 때 우리는 더욱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몇 년간 조용히 아이들이 태어나고 노인의 장례를 치루는 일이 있었다.
그 부드러운 태어남과 고요한 죽음 같은 것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바람과 빛이 느껴지는 직관적인
무엇으로 구현되기를 바랐다.
강철이나 소나무보다, 약한 강아지풀이나 모래의 반짝거림 같은 아주 연약한 무언가를 더 한참씩 바라보게 되고,
거기에 더 위안 받기에 자연의 찰나적인 반짝임이 작업의 일부로 포함되기를 원했다.
목재의 불규칙한 결이 발산하는 반짝임은 내부의 나노 결정 구조가 빛에 반사될 때 나타난다.
작업의 구조는 종이 중에서 가장 얇은 종이, 나무 중에서 가장 가벼운 나무를 이용하여 작업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가벼운 조각의 형태를 만드는 동시에 ‘모델링’이라는 메타적인 제작법을 채택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다시. 미터법이 북극점에서 적도까지 자오선의 거리를 10000km로 정하여 기준한다는 점에서
공간과 사물이라는 인간이 구축하는 물리적 사물 환경 겉면들이 결국 어떠한 결을 함께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그 안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만든 형태의 내부와 외부에서. 그리고 다시 돌아갈 것이다.
*고유섭 - 조선미술문화의 몇 낱 성격, 1940 - 김재경 작업노트중
하나의 현상은 독립적으로 발현되고 소멸되지 않는다.
한 현상은 여러 원인에 의해 파생되고 또 다른 현상을 일으키는 근원이 된다.
삶 역시 현상의 일부이다. 하나의 삶은 수많은 삶과 관련돼 있고 시작되는 순간과 끝나는 순간이 가위로
잘리 듯 분리·구분되지 않는다.
단순히 무에서 유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고, 죽음 또한 유가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삶과 죽음은 끊임없이 얽혀 있고 만물은 연결돼 하나의 큰 유기체처럼 존재한다.
생명체같이 촉촉하고 유연한 흙을 가마에 구우면, 생명의 시간이 멈춘 듯 단단하게 굳어 지난
움직임의 발자취만 남는다.
각기 다른 장소와 시간을 거친 유약 원료들이 불과 만나 작용하던 흐름도 멈춘다.
생명의 움직임을 간직한 흙은 다양한 형태의 도자 캔버스로 표현되고, 그 위에 물감처럼 얹혀 흐르는
유약은 현상의 정지된 모습을 보여준다.
원료의 종류와 혼합 비율, 가마 속 산소량, 가마가 도달하는 온도, 온도에 도달하기까지의 소성燒成 과정에
따라 흙과 유약은 다른 색·질감·빛깔로 발현된다.
도자를 구성하는 물질을 연구하고 결합 비율과 소성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에 집중한다.
각각의 원료가 가마에서 화학 작용하는 현상을 만물의 상호작용과 비유하며, 순환하는 삶의 찰나를
흙과 유약으로 나타낸다.
가시적으로 봤을 때 만물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듯하지만 비가시적 영역에서
모든 것은 연결된 하나의 존재이다.
작업을 통해 이런 비가시적 영역을 가시적으로 표현한다.
다양한 색과 질감으로 형상화된 세상 만물은 서로 얽혀 있기도 하고 같은 내면의 모습을 공유해 내적으로
연결돼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관계에서 우리는 개별적 존재가 아닌 큰 순환의 움직임을 구성하는 구성 요소로서 존재한다.
- 김하경 작업노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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