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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晉州城 - 2023.06 ~

썬필이 2023. 6. 5. 17:21

진주시 남성동 ·본성동에 있는 성. 사적 제118호이다.
진주는 삼국시대 백제의 땅으로 신라와 접경한 최전선에 위치하여 두 나라 간에 전략적인 
요충지로 치열한 공방전이 일어났던 곳이다.
삼국이 통일 된 이후에도 진주는 중요한 거점으로 인식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를 섬멸하기 위한 기지로서 역할했다. 
조선시대에도 진주는 그 중요성이 높았으며 경상도와 호남을 연결하는 요충지였다.
조선시대에는 도호부가 설치되었고 경상우병영의 역할을 담당했다.
진주성은 백제 때 건설되었으며 당시에는 거열성지(居烈城址)였다고 하며, 
산성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강변 절벽 위에 성채가 만들어졌고 서쪽으로는 하천이 있어 
천혜의 요새였다.
고려 말 공민왕(恭愍王) 때 7차례 중수되면서 남해안에 출몰하여 분탕질하는 
왜구를 방비하는 기지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시민(金時敏) 장군이 성채를 보강하여 
왜군의 공격을 대비하였다.
1592년 9월 왜군은 약 2만 5천 명의 병력으로 진주성으로 공격해 왔지만 김시민 장군에게 
대패하여 임란 3대첩(壬亂三大捷) 중의 하나가 벌어진 곳이다. 1593년 6월 왜군은 곡창지대인 
호남을 공략하여 군량미를 확보하고자 약 1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다.
진주성은 호남으로 가는 길목으로 진주성이 무너지면 호남을 잃게되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2차 전투에서는 군관민 6만이 최후까지 항쟁하여, 장렬한 최후를 마쳤고 왜군도 막대한 피해를 
입어 호남으로 쳐들어갈 여력을 상실하였다. 이때 논개(論介)는 적장을 안고 남강(南江)에 
투신한 일화가 유명하다.
1605년(선조 38)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이 진(鎭)을 성내로 옮기고 성이 너무 넓어 
수비가 곤란하다 하여 내성을 구축하였다. 그뒤 병사 김태허(金太虛)가 1607년 포루(砲樓) 12개를 
증축하였고, 1618년(광해군 10) 병사 남이홍(南以興)이 성 수축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지금의 
진주성은 대략 이때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성의 둘레는 약 1.7km이고, 외성의 둘레는 약 4km이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국립진주박물관
1984년에 개관한 국립진주박물관은 경상남도 최초의 국립박물관으로서 임진왜란 최대 
격전지 중 하나인 진주성晉州城 (사적 제118호)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개관 당시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성장 발전하였던 ‘가야加耶’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대표박물관으로 출발하였다가,1998년부터 경상남도 서부지역의 역사 문화와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전시 중심 주제로 하는 ‘임진왜란 특성화 박물관’으로 거듭났습니다.
국립진주박물관은 임진왜란과 지역에 관련된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존, 소개하기 위하여 
자료 수집, 조사와 연구, 전시, 박물관교육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국립진주박물관

청계서원(淸溪書院)
1833년(순조 33)에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운 은열공(殷烈公) 
정신열(鄭臣烈)과 고려 말 물레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따뜻한 목면(木棉) 옷을 입게 한 
문충공(文忠公) 정천익(鄭天益)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당시 훼철되었다가 1961년 복설(復設)하면서 
봉남서원(鳳南書院)으로 불렀다. 1986년에 재건하였다.

청계서원

진주성 북장대(晉州城 北將臺) 
북장대는 진주성 내 북쪽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진주성의 북쪽 지휘소로 전시에 성내와 외성의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진남루라고도 부르며 광해군 10년 남이흥이 중건했으며 조선 중기의 다락집 형으로 후대 
군사시설의 모범이 되었다.
2020년 6월 진주성 북장대 해체 보수공사 중 1864년(고종1년) 경상우병사 이교준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상량문이 발견되어 현재는 국립진주박물관에 임시 보관중이다. (사진 4번째)
상량문은 건물 기록서라고 할 수 있으며 건립연대, 공사참여자 등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이며 목조 건물 건축과정에서 최상부 부재인 종도리를 올리는 
상량제 때 사용하는 축문으로 쓰인다.

진주성 북장대 - 최근 보수공사가 이루어졌다

진주성 비석군  晉州城碑石群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에 있는 비석군(碑石群)이다.
진주성(晉州城, 사적 제118호)에 있는 조선시대 관아 건축물인 진주 영남포정사문루
(晉州嶺南布政司門樓,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67호) 서북쪽 언덕에 모여 있는 비석들이다. 
1973년 문화재보호협회 진주지부에서 진주성과 진주 시내 각처에 흩어져 있던 공덕비와 
유애비 30여 기를 모아 한자리에 배치하였다.
대표적인 비석은 1606년 건립된 ‘병사 겸 목사 이수일 유애비(兵使兼牧使李守一遺愛碑)’이다. 
이 비석의 비문은 <촉석루중수기>를 썼던 진주의 이름난 선비 송정 하수일이 지었으며, 
글씨는 봉강 조겸이 썼다. 
이수일(李守一)은 1604년 당시 합포(지금의 마산)에 있던 경상우병영을 진주로 옮겨온 인물이다.
그밖에 진주목사 이상일(1600~1674)의 선정을 기리는
‘이상일선정비(李尙逸善政碑, 1654년 건립)’, 병사 이진경의 공을 기리는
 ‘이진경선정비(李眞卿善政碑, 1702년 건립)’와 ‘정기택선정비(鄭騎澤善政碑, 1888년 건립),
 ‘한규설선정비(韓圭卨善政碑, 1887년 건립)’ 등의 비석이 있다.

진주성 비석군 晉州城碑石群

경절사 擎節祠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사우.
고려 초 거란에 끝까지 대항하다 순절한 충신 하공진(河拱辰)[?~1011]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한 곳으로, 1804년(순조 4) 수곡면 사곡리 낙수암(落水菴)에 창건하였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향사를 일시 중지하였으며, 1869년 부조묘(不祧廟)로 되어 
다시 자손 봉사하게 되었다.
1992년 진주성 내 하공진 유적지에 충의당(忠義堂)과 경충사(景忠祠)를 신축하고, 진주 낙수암 
경절사에 봉안하던 위패와 영정을 경충사에 모시고 사우 현판을 경절사라 교체하였다.
후손 하우(河寓)가 지은 「경절사상량문(擎節祠上樑文)」과 하용환(河龍煥)이 지은
「경절사우개기문(擎節祠宇開基文)」에 하공진의 충절과 경절사 건립의 의의가 기록되어 있다. 
경내에 충의당과 수덕재(修德齋)가 함께 있다.

경절사 擎節祠

영남포정사 문루(嶺南布政司 門樓) 
1618년(광해군 10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의 관문이었고 1896년 경상남도 관찰사의 
정문이 되어 영남포정사라고 하였다.
1925년 경상남도도청이 부산부로 옮겨지기 전까지는 도청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진주는 1896~1925년 경상남도도청 소재지였다.)
문루 앞에는 수령 이하의 사람은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오라는 뜻의
‘수령이하개하마비(守令以下皆下馬碑)’가 있다.

영남포정사문루(嶺南布政司門樓)

진주 촉석루(晉州 矗石樓)
미국 CNN에서 한국 방문시 꼭 가봐야 할 곳 50선에 선정된 촉석루는 남강변 벼랑 위에 
우아하고 위엄 있게 서있는 우리나라 3대 누각 중 하나로 고려 고종 28년(1241)에 
창건하여 8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다.
남강과 의암, 진주성과 어우러져 천하의 절경을 연출하며 진주 8경 중 제1경을 자랑한다.
벼랑 위에 높이 솟았다하여 이름 붙여진 촉석루는 전쟁 시에는 지휘본부로, 평상시에는 
향시(鄕試)를 치르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 지정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66호(6.25 불타기 전 국보 276호)
- 규모 : 정면 5칸, 측면 4칸

2023.10월의 촉석루
8월의 촉석루

서장대 (西將臺)
장대는 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는 대를 가리킨다. 진주시 남성동에 있는 
이 장대는 진주성 서문에 속하는 곳이다.
『여지도서』에 보면 회룡루로 나오며, 규모는 작으나 진주성의 남장대인 촉석루와 같은 
다락집형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건물은 허물어진 것을 1934년 서상필씨가 새롭게 고쳐지은 것으로, 앞면 3칸·옆면 2칸의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목조 기와집이다.

서장대 오르는 계단
10월의 서장대
서장대에서 본 남강
유등축제 준비중 모습
서장대
서장대에서 본 남강
서장대에서 본 남강

호국사 護國寺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626-71 <지번>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214-5
T. 055-741-4394
전통사찰 제70호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창건된 것으로 전하는 이 절은 원래의 이름이 내성사(內城寺)였다고 한다.
고려말기에 왜구(倭寇)를 막기 위해 진주성을 고쳐 쌓고, 승병(僧兵)을 기르기 위해 창건된 것으로 
생각되는 이 절은 임진왜란때는 승군(僧軍)의 근거지가 되었다.
제2차 진주성싸움에서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대에 
호국사(護國寺)란 이름으로 재건하였다고 전한다.
최근에 진주성을 정화하면서 일주문(一柱門)자리가 발견되어 새로 세웠으며, 사찰의 건물들은 
모두 근년에 새로 이룩된 것이다.

10월의 호국사
8월의 호국사

진주성 우물
진주성은 삼국시대부터 왜적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쌓은 성으로 당시부터 우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조선후기 진주성도에 표시돼 있는 3곳의 우물 가운데 하나 입니다

2023진주남강유등축제 준비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