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 이야기

분원 分院

썬필이 2019. 6. 20. 23:55

분원分院

미술 시장에서 쓰이는 분원이라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조선시대 궁중의 관청인 사옹원(司饔院)이 필요한 그릇을 조달하기 위해 지방에 만든

분원(分院)이란 의미이다. 

둘째는 그런 분원에서 만들어진 백자, 즉 분원 제작의 백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옹원은 궁중 내에 필요한 음식을 담당하던 관청이었던 만큼 많은 도자기를 필요로 했다.

건국 초기에 조선 왕실은 각 지방의 민간 가마에서 구워진 도자기를 진상 받아 사용했다.

그러나 이를 집중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생기면서 1470년 무렵 경기도 광주의 남한강가에 사옹원의 지방

조직인 분원을 설치했다.

그런 점에서 분원은 왕실 운영의 관영 사기공장이란 의미도 된다. 

분원은 도자기를 굽는데 필요한 질 좋은 태토와 땔나무를 조달하기 위해 거의 10년 단위로 주변을 이동했다.

그러나 1751년 이후는 지금의 경기도 광주군 분원리에 가마를 고정하고 필요할 때마다 거꾸로 주위에서

배로 땔나무와 태토를 운반해 와서 도자기를 구웠다. 

분원 도자기 또는 분원 백자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18세기 이후에 분원리에서 만들어진 상품(上品) 도자기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920년대 초부터 분원 가마터를 답사했던 아사카와 노리다카(淺川伯橋)가 그린 광주 일대의 가마터 그림.

파랗게 칠해진 한강 물줄기가 만나는 곳에 바로 분원이 위치해 있는 것이 보인다.

(한지에 수묵담채로 그려진 이 그림은 2011년 4월부터 7월까지 오사카 동양도자미술관에서

열린 「스즈키 마사오(鈴木正男) 기증-아사카와 노리다카(淺川伯橋)가 사랑한 한국 도자기」전에 소개됐다.

스즈키 마사오는 아사카와의 사위이다. 사이즈는 61.0x41.8cm)

분원의 그림 담당

분원에서 제작된 도자기에는 뛰어난 그림 솜씨가 발휘된 것이 많다.

청화든 철화든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쉽지 않다.

조선시대 도자기는 유약을 바른 위에 그림을 그리고 다시 살짝 굽는 이른바 상회(上繪) 기법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청화백자이든 철화백자이든 모두 초벌구이한 도자기 위에 그림을 그려 넣은 것들이다.

그런데 초벌 구이한 도자기는 마치 흙을 구워놓은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바짝 말라있다.

여기에 붓을 대면 바짝 마른 흙이 빨아들이듯 붓이 도자기에 들러붙은 것처럼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이런 초벌구이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빠른 필치의 능숙한 솜씨의 소유자가 아니면

좀처럼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림이 뛰어난 백자에 대해 분명 보통 이상의 화원 솜씨일 것이라고 추정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 조선시대 초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481년 간행)을 보면

‘해마다 사옹원 관리가 화원을 거느리고 어기로 쓰일 그릇을 제작 감독했다

(每歲司饔院官率畵員, 監造御用之器)’라는 기록이 나온다.

하지만 이것은 조선시대 초기의 일이고 후기에 들면 사정이 달라진다.

18세기후반, 19세기에는 청화백자가 보편화되면서 분원 장인 가운데 화청장(畵靑匠)이 있어 전적으로

도자기용 그림을 그린 것으로 전한다.

일제시대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분원 장인 중에 14명이 화청장으로

소속돼 있었다고 한다.

백자청화진사 연화문 항아리(白磁靑畵辰砂 蓮花文 壺) 18세기 높이 44.2cm 일본 개인

분원의 인원

조선시대 사옹원의 분원은 1883년에 민간에 불하되며 공식적인 관영 사기제조 체제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때 경기도 광주 분원리의 가마를 불하받은 것은 구한말 궁중의 내시들이었다.

따라서 분원리 가마에서는 이들에 의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백자가 제작됐다.

분원리에서 더 이상 백자를 굽지 않게 된 것은 그 후 한일합방이 되면서 국내에 진출한 일본인 상공업자들에

의해 막사발이 대량 생산, 유통되면서부터이다.

이 무렵에 대한 자료는 매우 불분명한데 당시 조선총독부 농상공부 산림과에 취직해 조선에 건너온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1891~1931)는 1922년 무렵부터 형 노리다카(伯敎)와 함께

분원리 가마터를 조사했다.

분원리 조사는 그 후에도 단속적으로 이뤄졌다.

1931년 42살의 나이로 아깝게 죽은 다쿠미는 그해 1월에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明考)』를 썼는데 이

책 속에 분원 작업장 평면도, 내부 모습, 사용 도구 그리고 작업 인원 등에 대한 간략한 내용이 소개돼 있다.

그가 남긴 기록은 조선시대 후기의 분원 모습에 가장 가깝게 묘사한 것으로 현재도 많이 인용되고 있다.

그는 가마터에는 사발 대정, 잿물 대정, 불 대정으로 맡은 일이 나누어져 있었다고 했다.

대정은 장인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렇지만 가마터가 작은 곳에서는 한 가족이 모두 달라붙어 일을 했는데 어른은 주로 사발 대정

(그릇 만드는 사람), 불 대정 등을 담당했고 노인이나 어린아이, 아녀자는 잿물 대정, 흙 운반, 건조 등의

돕는 식으로 나누어 일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 책에는 옛날 분원이 번성했을 때의 작업 상황에 대해 「분주원보등(分廚院報騰)」이란 기록을

인용해 무려 550여명의 인원이 작업했다고 적어놓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분원 응역(應役)의 수효>
감관(監官) 1명 감독관
원역(員役) 20명 서기
사령(使令) 6명 소사(小使)
변수(邊首) 2명 사기장 우두머리
조기장(造器匠) 10명 사발 대정
마조장(磨造匠) 10명 굽 대정
건화장(乾火匠) 10명 건조
수비(水飛) 10명 뻘물(精土)
연정(練正) 10명 꼬박
참역(站役) 18명 가마 수리
화장(火匠) 7명 불 대정
조역(助役) 7명 견습공 조수
부호수(釜戶首) 2명 책임 불 대정
남화장(覽火匠) 2명 열도 관찰
화청장(畵靑匠) 14명 그림
연정(練正) 2명 잿물 수비
착수장(着水匠) 2명 잿물 대정
파기(破器) 2명 선별

<이하 잡역>
공초군(工抄軍) 186명 도토 운반
허벌군(許伐軍) 202명 대기 잡역
운회군(運灰軍) 1명 초목회 운반
부회군(浮灰軍) 1명 잿물 수비
수토재군(水土載軍) 10명 도토 하선
수토감관(水土監官) 1명 수세지기
노복군(路卜軍) 2명 도로 관리
감고(監考) 3명 출납
진상결복군(進上結卜軍) 10명 제품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