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茶살림의 방향
정통 성리학의 세계질서관은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이었지요.
세계는 화(華)와 이(夷)로 갈라서고 화만이 문화적이며 가치가 있고, 이는 문화도 가치도 없는 야만으로
규정했지요.
화의 핵심은 세계의 지리적 중심이기도 한 중화(中華)로서 중국 민족의 배타적 독점물이라고 단정지었지요.
이때 조선은 중국의 축소판, 모조판, 근사치로서의 소화(小華)라고 여겼습니다.
서양은 짐승으로 보았지요. 조선 성리학자와 유생은 중국에 대해서는 열등의식을 가지지만 서양에 대해서는
심한 우월의식을 지니고 있어서 열등과 우월의 이중구조적 세계관이 조선 성리학의
소화의식(小華意識)이었지요.
이같은 소화의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이나 고려사회 정치인들에게도 이미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증거가 ‘삼국사기’에 선명하게 남아있거든요.
중국인 육우가 지은 ‘다경’ 이전에 있었던 신라 차 역사는 모두 묵살해버리고, 육우가 죽은 뒤인 서기 828년
신라인 ‘대렴’이 중국 차 종자를 얻어다 지리산에 심었다는 기록을 우리 차살림의 기원으로
삼고 있는 점입니다.
여기서 한술 더 떠 대렴이라는 ‘삼국사기’에 적힌 신라인 이름을 ‘김대렴(金大廉)’이라 고쳐서 지리산에다
비석까지 세워놓고 우리 차살림의 뿌리를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일은 아무래도 짚고 넘어가야할
대목인 것 같습니다.
차살림 하자는 이들이 역사왜곡이나 날조를 예사로 하고, 중화사대주의를 답습하고 있는 모습은
정녕 병폐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병폐를 고치지 않으면 차살림은 세상의 비웃음을 사게되고 사회악으로 변질될 것입니다.
이같은 병폐는 차나무가 본디 우리 땅에서 나 자란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들여와 심어 키운 것이라는
주장에도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차나무는 주로 우리나라 남쪽지방에서 자라왔지요.
이는 중화문명이 우리나라 북부지방에 먼저 영향을 끼쳤으며, 남쪽지방에는 지리적 사정으로 상당한 시간
차이를 두고 뒤늦게 전파됐다는 것을 말합니다.
경주, 김해, 양산, 고성, 사천, 하동, 해남 등 남해안 지역에는 기원전부터 차그릇이 있었으며, 이는 차나무가
존재했음을 알게 해주는 역사적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관련학자들은 중국처럼 수천년, 수백년된 차나무가 우리에겐 존재하지 않는다하여 차의
자생설을 부정합니다.
하지만 차나무가 집중되었던 남쪽지방엔 차나무 아닌 다른 종류의 나무들 중에서도 천년이 넘게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이 지역에는 1천여년 전부터 수목이 없었던 곳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차나무는 주로 마을 근처의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낮은 산비탈에 자랐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불교탄압과 차 세금(稅金) 강요에 못이긴 농민들이 차나무를 베어버리거나 불태워버린
조선왕조 때의 폭정, 일제때 차나무를 파내고 뽕나무를 심도록 강요한 양잠정책과 한국 자생 차나무를
없애고 일본 차나무를 심기 위하여 전남 보성에다 시험 재배지를 만들어 남부지방에 퍼뜨린 사실,
총독부 정책에 따라 한국 여학생에게 ‘다도’ 교육을 시켜 완벽한 신민을 만들고자 했던 일,
해방후 농촌의 땔감으로 차나무가 집중공략된 사실도 있습니다.
오래된 차나무가 없다하여 차의 한국 자생을 부정하는 견해는 신중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차살림의 참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중화사대주의적 태도와 일본 ‘다도’에 기울어진 견해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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