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한국 茶의 정체성

썬필이 2019. 8. 5. 10:03

한국 茶의 정체성

한국에서 차(茶)문화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이 나타난 것은 대략 40여 년 전부터였습니다.
조선시대 말기의 혼돈과 국권 상실,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 해방공간의 사회불안과 정치적 혼란, 
6·25와 그후 10여 년간의 배고픔과 무질서는 한국인이 차를 마실 수 있는 마음을 앗아가버렸지요.
한국인의 생활에서 차가 사라진 것은 조선말기보다 훨씬 앞선 시기부터였습니다.
고려왕조가 끝나고 조선왕조가 시작되어 불교 억압을 정치이념으로 삼게되면서부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서민들은 차 대신 술을 더 가까이 했고, 조선시대 사대부들 대부분이 차를 몰랐지요.
다만 영남사림학파 선비들을 비롯, 소수의 은둔 선비들이 겨우 차 마시는 명맥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지원하러왔던 명나라 장군 이여송이 선조대왕에게 ‘조선에는 차를 안 마시느냐?’고
 물었을 때 선조대왕은 자신있게 말했지요.
조선에는 차라는 것이 없었다고 말입니다. 선조실록에 나오는 사실입니다.
주로 술이었지요. 
그런데도 설, 추석 명절에는 ‘차례’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차 대신 술을 조상께 올리면서 ‘차례’라 했습니다.
한국인이 술을 많이 마시게된 이유 중의 하나가 차를 없애버렸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차의 자연스러움과 이성보다는 술의 인위적 억지와 감정이 앞서게 된 부정할 수 없는 과오였습니다.
그 시대에도 차를 마신 것은 사찰에서 수행하는 승려들이었지요. 
한국 차문화의 명맥을 이어온 것도 사찰이었고요.
그러다가 일제시대 때부터는 대부분의 사찰에서도 차가 사라지고 순천 송광사와 선암사, 해남 대흥사, 
하동 쌍계사, 사천 다솔사, 장성 백양사가 대표적으로 차문화를 이어온 곳입니다.
그중 한국 차문화의 뿌리이자 차살림 정신인 반선반농(半禪半農)이라는 수행 규범을 가풍(家風)으로 
지켜온 백양사의 차살림이 볼만했습니다.
학명(鶴鳴·1867~1929) 선사의 내장선원규약(內藏禪院規約)에서 비롯된 백양사 차살림은 우리나라의 
귀한 맥을 잇고 있는 구증구포, 즉 무쇠솥에 아홉 번 덖고 뜨거운 방안에서 아홉 번 띠워 만드는 차법 이지요.
그 다음으로는 사천 다솔사 효당(曉堂·1904~1979) 선생의 차살림으로서 끓는 물에 데치고, 
무쇠솥에 덖고, 뜨거운 방에서 띠워 만드는 반야로법이 전통을 이은 차였습니다. 
그 외는 대개 덖음차 종류였는데, 수행자가 새벽 참선 때 마시면 속이 몹시 쓰리고 아픈 단점이 있습니다.
이렇듯 몇몇 사찰 중심에서 보다 일반화된 것은 1960년대부터 하동 화개 일대에서 시작된 덖음차가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였습니다. 
그 후 덖음차를 근간으로 여러 가지 솜씨와 경험이 보태지면서 차 만드는 기술이 나아져 왔습니다만
근본적으로 제품의 실질적 다양성이 제대로 이뤄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더욱이 지자체의 수익사업과 관련하여 포장하는 기교와 광고가 더 앞서는 듯한 모습이 한국 차문화의 
현주소입니다.
좋은 차를 만들기 위한 정책, 연구, 투자는 부족하고, 차 마시는 행위는 현란할 만큼의 장식성과 기교 
중심으로 치닫고 있는 점도 부정할 수 없는 현상이지요.
이 장식성과 기교중심의 차살림이 중국 ‘차회’와 일본 ‘다도’의 특징들을 근간으로 삼았기 때문에 한국차의 
정체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차"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성차 중국에서 엄지 척  (0) 2019.08.07
차살림의 면면한 전통  (0) 2019.08.05
생활속의 '茶살림'  (0) 2019.08.04
우리 차 문화의 허실  (0) 2019.08.04
茶의 역사  (0) 2019.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