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茶살림'
‘다도(茶道)’라는 말은 일본에서 발달한 미의식과 불교가 차에 결합되어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도(道)로
발전하여 일본에 남겨진 일본이 자랑하는 유산입니다.
따라서 ‘다도’라는 어휘로 한국 차문화를 담아내려 하는 것은 아무래도 식민지 잔재에 미련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차회(茶會)’ 또한 중국문명이 낳고 키워서 중국인의 정서가 된 것입니다.
한국의 2천년 차 역사와 한국에서 자란 차를 마시며 살아온 한국인의 생활과 정서에서 진하게 우러난
말은 없을까요?
어떤 이는 ‘차례(茶禮)’가 아니겠느냐고 하며, ‘중정(中正)’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냥 ‘차(茶)’라 하자는
이도 있고, 기왕 써왔으니 ‘다도’면 어떻고 ‘차회’면 무슨 상관이냐, 이 국제화 시대에 뭘 조잡하게
따지냐는 분도 많아 보입니다.
‘차례’는 본래 설, 추석 명절을 나는 고유한 의식을 뜻하는 말이어서 적절치 않습니다.
‘중정’은 차가 선적(禪的)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을 묘사한 말입니다.
차라는 말은 옛 문헌 대부분에 기록되어 있기는 하나 인간 생활과의 관계가 지나치게 축약된 느낌인데다
식물학 용어인 차(茶)와의 관계가 애매하여 정확하질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외국의 고유명사를 차용해야할 만큼 우리 처지가 비참하지는 않습니다.
절대 그럴 수는 없지요. 그래서 저는 이런 제안을 해보려 합니다.
차와 관련된 일들을 몇 갈래로 나눕니다.
차나무 키우기, 찻잎 따기, 차 만들기, 차 달이기, 차 내오기, 차 마시기, 찻상 거두기까지의 전 과정을
통틀어서 ‘차살림’이라 부르면 어떨까 싶습니다.
본디 차에는 세 가지 보배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세상 일체가 하나의 관계, 즉 모든 것은 모든 것과 관계 있고 그 관계는 상생임을 알게 하는
고마움이지요. 평등을 꿈꾸는 이상인 이유입니다. 원효 스님의 ‘무애차(無碍茶)’가 그랬지요.
이를 자애(慈愛)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검약(儉約)입니다.
찻잎 따고, 차 만들고, 차 달여 나눠 먹고, 차생활하는 것은 곧 만물을 알뜰하게 모시고 이웃과 나누는
일을 정녕 기뻐하는 것이거든요.
만물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열심히 일하는 만민(萬民)이 있어서, 모두가 한 몸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 모두가 나를 귀하게 대우해 주어서 내가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하늘과 땅과 만물의 도움으로 생긴 물건을 알뜰하게 모시고 남는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이
‘살림’의 근본 아닙니까?
셋째는 겸손입니다. 좋은 차를 정성껏 달여 좋은 찻잔에 담아 예의를 지켜 권하는 것은 겸손입니다.
좋은 것을 상대에게 먼저 권하는 것, 상대에 대한 존경과 상대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차에서
배우고 기르는 것이지요.
겸손의 토대 위에서라야만 최소한으로 세상을 넉넉하게 하고 풍요롭게 만들 수가 있습니다.
차를 바로 배우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이 검약과 겸손을 실천하는 것은 옛 어른들께서 남겨주신 우리 유산입니다.
원효스님은 무애행(無碍行)으로 실천해 보이셨지요.
일찍이 일본 승려들이 이것을 배워갔습니다.
차가 지닌 세 가지 보배를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려내 놓는 것을 저는 ‘차살림’이라 부르려 합니다.
차는 부귀비천(富貴卑賤) 차별 없이 인간 모두를 평등하게 대우하려는 이상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물의 평등, 땅의 평등, 하늘의 평등을 뜻하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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