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차살림의 면면한 전통

썬필이 2019. 8. 5. 14:44

차살림의 면면한 전통

한국의 차살림은 치유가 필요한 몇 가지 병폐를 지닌채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차살림의 이론과 실제를 가르치는데 있어 일본 ‘다도’와 중국 ‘차회’의 이론과 실제가 그대로 번역되어 
쓰이거나 적절하게 취사 선택되어 마치 우리의 고유 차살림처럼 가르치고 배우는 점이 가장 근원적인 
병폐입니다.
차농사와 차만들기보다 차마시는 행위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것도 병폐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지요.
흔히 ‘행다법’이라 하여 지나친 장식성과 현란한 기교 위주의 차살림이 사치스럽게 번성하는 것은 
걱정거리임이 분명합니다.
차살림이 사치스러워지는 것은 차살림 본디 정신에서 완전히 어긋난 것입니다.
사치란 인위적 조작인데, 형식적 기교와 의도적 장식성으로 내면세계의 몰지각과 간교한 노림수를
은폐하려 들지요.
처음부터 틀린 짓입니다.
차살림은 자연과의 공존과 조화를 깨닫기 위한 지혜의 세계입니다.
기교와 장식성은 이를 주도하는 이의 주의 주장이거나 아름다움을 해치는이데올로기, 이익을 위한 술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교와 장식성은 시간과 돈으로 해결되며, 모방에 의존한 탓으로 결여된 자신감을 애써 감추기 위한 
장치일 뿐이지요. 
또한 불안한 허구와 근거없는 관념화로 치달아 점점 혼돈스러워 집니다. 
이 혼돈을 지배하는 힘은 돈과 권력의지에 근거한 조직이기 쉽습니다.
차살림은 평상심을 근본으로삼지요 . 자연과의 내밀한 교감이 평상심 아닙니까. 
그래서 차살림을 단순성의 모든 것이라고 말하지요.
단순성이 평상심입니다.
우리 차살림의 역사를 연구하는 이들 중에도 병폐를 지닌 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옛일을 전하고 있는 설화나 이를 바탕으로 씌어진 기록들,
심지어 ‘삼국사기’처럼 국가 문헌조차도 신뢰하지 못하고, 오직 중국과 일본 문헌만 옳은 것으로 단정하는 
태도는 비난받을 일입니다.
우리 차살림에 관한 한 문헌인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조 신라 30대 법민왕 관련 기록은, 가락국 시조 
수로왕의 제사에 차(茶)를 제수품목에 넣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해가 서기 661년이었는데, 이 연대는 육우(733~ 804)가 태어나기 72년이나 앞선 것입니다.
또한 수로왕의 부인 허황후가 시집올 때 차 종자를 가져온 서기 48년을 무시해버리지 않는다면 중국에 
차가 일반화된 8세기보다는 무려 600여년이나 앞서 있었습니다.
신라 승려 충담(忠談)이 경주남산 삼화령의 미륵에게 차를 공양하고 돌아오던 길에 경덕왕
(재위 742~ 764)을 만나 왕에게 차를 달여준 것이 서기 765년이며, 신라 승려 김교각(金喬覺·694~ 796)이 
신라의  차씨를 가지고 중국으로 간 것이 서기 718년이었으니, 중국의 육우가 ‘다경(茶經)’을 짓기 훨씬 
전의 일이었지요. 그런데도 우리의 기록은 믿지 않고 오직 육우의 다경을 비롯 중국 기록에만 의존하는 
까닭이 대체 무엇입니까?
또한 신라 선덕왕(632~ 647) 때의 차, 문무왕(661)의 종묘사직 헌다, 신문왕(681) 때의 문수보살 헌다 
기록들도 ‘다경’보다 앞섭니다.
그런데도 굳이 흥덕왕(828) 때 대렴(大廉)이 중국에서 차씨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었다는 기록만을 
인정하는 저의가 의심스럽습니다.
‘삼국사기’의 저술 의도가 신라와의 연결고리를 약화시키고 중국에의 사대주의를 표방하기 위한 것이긴 
했지만, 어찌하여 아직도 우리 역사를 믿지 않으려 하는지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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