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차완은 조선의 그릇
농차에 관한 열 두가지 규칙은 한국 절집의 발우공양과 매우 닮았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닮았는지 차례대로 살펴보지요.
첫 번째 문제가 ‘이도차완’인데, 이 차완은 일본과 한국에서 대단히 중요하고 현실적으로도 매우 민감한
논쟁점을 많이 지니고 있습니다.
일본 다도가 완성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소박하고 자연미가 우러나는 작은 흙집으로 만든 차실, 조선시대
청빈한 수행자 혼자 기거하는 토굴 방안의 담백하고 자연 풍광이 우러나는 분위기, 청자, 백자, 당송의 고급
그릇이 아닌 질박함과 신비성을 느끼게 해주는 차완이었습니다.
차실문제는 따로 살피기로 하고 먼저 15~ 16세기 다도의 선구자들이 찾았던 그릇부터 얘기해보도록 하지요.
다도의 창시자 무라타 슈코는 교토 대덕사의 승려였는데, 그는 일본 차문화가 중국 귀족들의 차회(茶會)를
본뜬 서원차(書院茶) 폐해로 병들고 있음을 걱정했습니다.
크고 화려하게 꾸민 차실, 사치와 방종으로 흐르는 차문화, 사무라이와 부호들의 권위주의 패거리 문화
범람은 자칫 일본을 망하게 할지 모른다고 판단했지요.
일본 사찰 승려들도 마찬가지여서 우선 절집 차문화부터 뜯어고칠 생각을 한겁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일본 차문화가 지닌 병폐를 지적하고 뜯어고칠 첫 시도를 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지요.
그의 노력을 계승한 타케노 쇼오에 의해 차완 문제가 해결되었지요.
쇼오는 작고 소박한 흙집 안에 어울리는 차완을 찾는데 일생을 바친 인물입니다.
당송시대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 ‘천목(天目)차완’이나 고려청자, 조선백자, 분청사기류 등은 일단 제외되었지요.
그때는 조선의 생활그릇인 잡기류가 아직 일본에 수입되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조선 지배계층 고급 문물에만 집중했거든요.
쇼오는 일본 도공들이 만든 양념그릇, 씨앗을 담아두는 그릇 등 순수한 일본 잡기들 중에서 찻잔으로
이용할만한 것이 없을까 찾았지만 실패했습니다.
오랜 고심 끝에 쇼오의 눈빛이 한 그릇에 머물렀습니다.
쇼오는 승려가 아니라 고미술품 전문 감정가이자 참선과 차를 통해 미술품이 지닌 꿈의 세계를 현실생활
속에다 되살려 놓는 사람이었거든요.
나라(奈良)의 어느 승려가 밥그릇으로 쓰고 있는 조선의 그릇에서 그의 오랜 갈망을 풀어줄 신비한
아름다움을 발견해냈지요.
그의 눈빛에 의해 드러난 것이 이도차완이며, 그가 직접 사용하던 것이 ‘타케노 이도차완’입니다.
1535년경의 일입니다.
하지만 그때는 아직 ‘이도(井戶)’라는 고유한 이름은 붙여지지 않고 다만 조선그릇 모두를 한 이름으로
‘고라이쟈왕(高麗茶碗)’이라고만 불렀습니다.
그때 그는 ‘센노 리큐’라는 천재성을 띤 청년을 제자로 키우고 있었는데, 그 리큐가 뒷날 다도를 완성했고
‘이도’라는 이름을 짓는 일에도 관련된 듯 싶습니다.
아무튼 이도차완은 쇼오의 눈에 비치기를 인간이 만들기는 했지만 인위적 의도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자연 속의 자연처럼 느껴졌던 것이지요.
청자, 백자의 엄격하고 차거운 선과 색깔, 통제와 권위주의적 형태와 질감 대신 투박하고 따뜻한 선과 색깔,
자유분방한 형태와 질감을 지닌 이 그릇은 조선시대 초기 또는 고려 중엽 이후 우리나라 절집에서
만들어진 발우였습니다.
이 그릇을 일제때 일본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가 16세기 조선 서민의 잡기였다고 말한 뒤부터 그만
막사발로 돌변하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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