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다도의 선구자들

썬필이 2019. 9. 30. 09:10

다도의 선구자들

15세기초부터 시작된 부산, 웅천, 울산의 삼포왜관에서 일본은 조선 문물을 배우거나 사들였고, 그같은 활동은

임진왜란 전까지 무려 170여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이렇게 오랜 기간 이어진 조선 문물의 수입은 매우 느린 속도로 일본문화 전 영역에 걸쳐 영향을 끼쳤습니다.

불교 경전과 사찰의 문화, 도자기, 건축, 농사법, 베짜는 기술 등이 대표적인 것이었지요.
조선의 우수한 문물이 일본 사카이 항구로 집중되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이곳에는 비교적 일찍부터 외국 문물에 눈을 뜬 상류층 상공업자들이 밀집해 살면서 그들의 넉넉한 자금을

이용하여 값비싼 조선 문물들을 사들여 실생활에 응용했습니다.

이들의 응용을 통하여 조선 문물의 일본화가 시작되었다는 점은 그 후 일본 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길잡이가 됩니다. 예를 들면 조선에서 수입해 간 고려차완을 독점적으로 소유한 사람들 대부분이 교토와

사카이에서 무역으로 크게 성공한 상류층 상공업자(町衆)들이었습니다.
타케노 쇼오와 센노리큐가 뒷날 이도차완을 선택하게 되는 근본 이유도 이들 스승들이 고려차완의 아름다움에

빠져 살았던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초암(草庵)을 흉내낸 집에다 작은 차실인 고자시끼(小座敷)를 만들어 놓고 차 생활을 즐기기 시작한 것은

일본 선종의 승려들에 의해서가 아니고 교토와 사카이의 상류층 상공업자들에 의해서였습니다.
다도의 시작과 유행을 주도한 것이나 차의 일반화, 세속화라는 새로운 차의 길을 만든 것도 승려들이 아니라

부유한 상공업자들이 었지요.
다만 무라타 슈코, 타케노 쇼오, 센노리큐 등은 조선 문물의 모방에 그치고 있는 상공업자들의 취미생활을 보다

심화시키고 완성해 가는 과정에서 일본의 전통적 미의식과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냈다고 말해야만 옳습니다.
따라서 일본 초암차의 원류는 조선의 문물이었고, 이를 주도한 것은 일정 기간의 한 개인이 아니라 200년 가까운

긴 시간에 걸쳐 부단히 유입된 조선 문물 중에서 상류층 상공업자들이 모방하고 생활화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자리잡게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사카이 항구와 교토는 가까운데다 교토에는 당시 일본 선종 불교를 대표하는 대덕사(大德寺)가 있었고,

대덕사엔 일휴(一休)선사가 일본 선종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무라타 슈코는 일휴선사의 문하에서 30년 넘게 차를 통한 참선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승려가  아닌 상류층

상공업자들은 슈코한테서 차를 배웠습니다.
조선과 중국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문물들은 이들 상공업자들에 의하여 무라타 슈코에게 소개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조선을 여행하고 돌아온 승려들에 의해서도 이채로운 조선 불교 문화가 무라타 슈코에게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1460년대에 조선을 여행하면서 매월당을 만났던 준초와 범고 또한 당대 최고의 차인이자 수행자로 이름 높았던

무라타 슈코에게 그들의 경험을 아뢰었을 것입니다.
이같은 복합적 영향으로 무라타 슈코의 서원차법 혁파를 위한 대안으로서 초암차법이

제시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