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암문화를 가져간 자들
초암의 또 하나 특징은 방안으로 드나드는 방문이 낮고 작다는 점입니다.
초암 자체가 그다지 큰집이 아니기 때문에 집의 규모와 균형을 이루기 위한 건축 기술상의 문제이기도 하겠지요.
또 겨울철 혹독한 추위 때 방안의 온기를 덜 빼앗기기 위한 단열 방법의 하나로 방문을 작게 만들었지요.
그래서 방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기어들어 가듯이 허리를 숙여야 합니다.
조선의 초암이 일본에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은 주로 일본 승려들에 의해서였습니다.
임진왜란 전까지 조선과의 외교에서 매우 특별한 역할을 수행했던 일본 승려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는 일본 국왕의 칙서를 가지고 오는 외교관이자 승려로서 주로 대장경과 불교문화를 조선으로부터 들여가는
일 외에 일본 내의 사찰을 새로 짓거나 수리하는데 드는 비용과 건축 자재를 얻어 갔습니다.
그런 승려들 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인물이 있습니다.
매월당 김시습과 교류했던 준초(俊超)와 범고(梵高)라는 승려이지요.
그들은 일본의 천룡선사(天龍禪寺) 승려들로서 수륙대재(水陸大齋=육지나 강, 바다에서 죽은 이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재를 올리고 경문을 읽어주는 불교 행사)에 필요한 경비를 얻기 위해 조선을 방문했던 것처럼 매우
특별한 임무를 띠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쇼니(小二殿), 오우치(大內殿)라 부르는 가문(家門)의 심부름으로 오는 승려들이었지요.
이들도 불교와 관련된 일로 오지만 주로 무역에 종사했습니다.
쇼니, 오우치 가문이 어떤 역사적 배경을 지녔기에 조선과의 사사로운 무역에 승려들을 내세웠는지에 대한
매우 유익한 증거가 ‘성종실록’에 있습니다. 즉, 성종 16년(1485) 10월 7일조의 기록입니다.
‘예조정랑 정광세가 대내전(大內殿)의 심부름꾼(使人) 승려 원숙(元肅)의 서간(書簡) 여러 폭을 가지고 와서
아뢰었는데 그 첫 번째에 이르기를, “온조 백제국왕 여장(溫祚百濟國王餘璋)의 셋째 아들이 일본국에
내조(來朝)하였음이 수(隋)나라 대업(大業) 7년 신미년이니, 이로부터 900여 년이 되도록 지금까지
면면히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임성(琳聖)의 아버지는 여장(餘璋)이라 하고, 장(璋)의 아버지는 여창(餘昌)이라 하고, 창(昌)의
아버지는 여경(餘慶)이라 하는데 이로부터 이상은 왕대(王代) 명호를 기억하여 알지 못합니다.
그 몸은 일본국에 있으나 계통을 밝히고자 하므로 백제국의 옛일을 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온조(溫祚)의 사업에 대해서는 전하께서 정하신 국사(國史)가 있을 만하니, 여경(餘慶) 이상의 왕대의
명호를 베껴서 내려 주소서.중 원숙이 삼가 아뢰옵니다” 라고 했다.’
일본 승려 원숙의 편지에 적혀 있는 대내전(大內殿)이 바로 오우치인데, 소이전(小二殿) 즉 쇼니와
같은 집안이지요.
형제인지 아니면 가까운 친척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집안은 7세기 초부터 일본 천황의 측근에서
조선과의 교류를 전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원숙의 편지 내용에서 보이는 ‘수나라 대업 7년 신미(辛未)년’은 611년으로서, 신라 진평왕 33년이 되고,
백제 무왕 2년이 되며, 고구려 영양왕 22년이 되는 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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