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암문화의 시작
대내전, 소이전 가문은 조선과의 교류를 전담하여 천황가문을 돕는 한편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들 가문의 세력은 점점 커져서 대마도에까지 미쳤고, 특히 1420년 이후부터 시작된 삼포왜관의 설치와
관련하여 다른 일본인들과는 차별되는 특별한 대우를 조선 정부로부터 받았지요.
이 가문이 조선 정부로부터 받은 특혜는 1510년 삼포왜란 이후에 더욱 두드러졌지요.
조선 정부는 삼포왜란의 책임을 물어 일본인들의 왜관 거주와 무역거래를 금지하거나 매우 엄격하게 통제했지만
대내전, 소이전 가문에 한해서는 얼마든지 교류해도 좋다는 허락을 해주었을 정도였으니까요.
이러한 두 집안의 비호를 받으면서 16세기 중반까지 조선과의 교류를 맡았던 승려들은 점점 대담한 행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각각 조금씩 성격이 다른 두 부류의 일본 승려들은 거의 200년 가까운 조선과의 교류에서 조선의
우수한 문물을 적잖이 일본으로 들여갔습니다.
그 중에서 조선의 불교 문화와 조선 서민들의 집 구조, 양반 선비들의 풍류문화, 매우 우수한 도자기 문화는
그들이 집중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던 분야였습니다.
이와같은 조선 문물은 사카이 항구를 통해 들어온 뒤 일본 전역으로 퍼졌지요.
사카이 지역은 일찍부터 중소 상공업자들이 밀집되어 있어서 조선과 중국에서 수입되는 이국 문물이 가장
먼저 소개되었습니다.
더구나 상공업자들은 재력이 넉넉했기 때문에 호기심 가는 이국 문물을 직접 손에 넣거나 실생활에 응용해
보면서 차츰 일본화 시켜가는 역할도 맡았던 것 같습니다.
그중 하나가 조선의 초옥, 초암이 그들의 눈길을 끌게되어 재미삼아 흉내를 내기 시작했는데, 1460년대를
넘어서면서부터 비롯된 초암 짓기는 1530년대를 전환점으로 삼아 보다 일본적인 세련미를 더한 새로운
초암(草庵) 형식으로 자리잡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사카이 지역 부유한 상공업자들의 이같은 생활은 교토의 부유층과 대덕사 승려들에게도 곧바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대덕사는 조선에서 파견된 통신사 일행들이 일정기간 머무는 숙소로 사용된 적도 있었지만, 조선 여행에서
돌아온 승려들이 교토의 천황과 권력자들에게 조선에서의 일을 알리기 위해 왔다가 들러가는 곳이기도 했지요.
그래서 항상 조선 문물에 관한 지식이 대덕사 승려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일본 초암차의 원조인 무라타 슈코(1423~1502)가 조선을 직접 여행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슈코의 초암차를 계승하여 발전시킨 다케노 쇼오(武野紹鷗·1502~1555)나 초암차를 완성시킨 센노리큐
(千利休·1522~1591)가 조선을 직접 여행했다는 기록도 아직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 초암차의 초암(草庵)이라는 차실(茶室)의 건축양식과 차실 안의 구조,
차법(茶法)의 정신, 차를 달이고 마시는 법이 조선 불교문화와 관련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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