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 이야기

청자흑백상감 용문 주자와 청자상감 용문 표형주자

썬필이 2019. 10. 7. 10:36

청자흑백상감 용문 주자와 청자상감 용문 표형주자 : 靑磁黑白象嵌龍文注子 13세기후반 높이34.8cm(1)
2007년3월9일 서울옥션 제105회 근현대 및 고미술품경매 파트Ⅰ, 6000만원 낙찰

靑磁象嵌龍文瓢形注子 13세기후반 높이 33.3cm(2)
2011년3월10일 서울옥션 제119회 미술품경매 추정가, 2억~3억원

청자흑백상감 용문주자 부분

한때 일본 전자업계를 비꼬며 갈라파고스 신드롬이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최고의 기술을 가졌지만 세계적 경향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상감청자를 보면 죄송하게도 간혹 이 말이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청화흑백상감 용문주자

상감기법은 전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생각지 못한 기발한 장식 기법입니다.

도자기를 더 근사하게 보이기 위해서 문양은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문양은 오랜 동안 음각만으로 가능했습니다.

더러 볼록하게 형상을 붙이기도 했으나 색을 나타낼 수는 없습니다.

런데 고려에서 이를 간단하게 클리어한 것입니다.

검은 흙과 흰 흙을 파 넣어-상감해서-문양에 색을 넣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세계적인 발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몽골 시대가 되면 사정이 좀 달라집니다.

원나라때 세계 도자사의 혁명이랄 수 있는 새로운 기법이 실용화됩니다.

청화(靑華)기법입니다.

산화코발트는 구으면 푸른색이 됩니다. 원에서는 이를 가지고 문양을 그렸습니다.

이는 붓으로 찍어 쓸 수 있어 더없이 간편했습니다.

이국적인 파란 색은 황홀하기까지 했습니다. 

청화 용도문(龍濤文) 항아리, 원 높이 29.3cm

사용의 편리함 때문인지 원나라 도자기에는 문양이 빈틈이 없을 정도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특히 많은 것이 용문양입니다.

그 이전까지 중국 도자기에 용은 거의 없었습니다. 있어도 한두 사례가 전할 뿐입니다.

고려는 1270년에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했습니다. 거듭되는 침입으로 원에 굴복한 것입니다.

이후는 말할 것도 없이 몽골의 간섭이 전면화되고 노골화됐습니다. 원 황실의 부마국이 되기까지 했습니다.

따라서 원이 새로 개발한 최신의 청화백자가 고려 왕실에 건너왔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도공 역시 화려하게 용문양이 그려진 원 청화를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려시대 청화는 구워지지 않았습니다.

문양에서는 끝까지 상감을 고집했습니다.

105회 경매에 소개된 용문양은 엄청난 공력을 들였었습니다.

몸통 앞뒤로 둥근 원의 이중창을 만들고 주변은 여의두문을 빙 둘러가 그렸습니다.

그 안에 용이 문양돼 있습니다. 몸체가 머리를 한 바퀴 감싸고 있는 듯합니다.

입을 벌린 용의 혀와 눈은 자토(赭土)를 넣어 검게 표현했습니다.

청자상감 용문 표형주자 부분

그 외에도 몸체의 국화문과 표주박 아래쪽 어깨부분의 연판문도 정교하게 흑백 상감으로 나타냈습니다.

119회 출품의 용문양 표주박형 주전자 역시 번다해 보일 정도로 문양이 가득합니다.

문양을 꽉 채워넣는 것은 원나라 청화 도자기에 보이는 특징 중 하나입니다.

제119회 출품 청자상감 용문 표형주자

두 주전자는 주둥이부분 문양이 매우 유사합니다.

이 점은 같은 가마에서 같은 도공의 손에 의해 구워졌다는 추측을 해보게 합니다.

이 도공이 원의 청화백자를 보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13세기후반 이후 세계는 보다 손쉽게 문양을 그려 넣는 시대로 바뀌어가고 있었습니다.

엄청나게 손이 많이 간 상감 청자를 보면 괜한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스마트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