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건의 한국 청자의 흐름] 제2기. 입체 조형과 순청자 시대(11세기 전기-12세기 전기)
3) 순청자의 조형정신, 입체의 미학(美學)
‘태평무인’양식을 수용한 강진요는 중국의 남방과 북방 도자의 장점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송시대 최상급 가마인 남방의 월주요와 경덕진요(景德鎭窯)의 조형요소를 바탕으로 한 위에 북방의
요주요(耀州窯)와 정요(定窯)의 소위 편절조(片切彫) 기법과 양인각(陽印刻)기법도 전해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정요의 흑자(黑磁)와 화금(畵金)기법, 자주요(磁州窯)의 흑화(黑花)기법, 백지흑화(白地黑花)기법과,
연리문(連理文) 등 다양한 고차원의 장식 기법들이 전해졌다.
이러한 중국적 요소들은 고려의 감수성이 더해져 한층 정교하며 맑고 투명하며 그리고 자연스럽게 최상급
청자에 적용됐다.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초의 고려청자는 안정적인 유태(釉胎)와 고밀도의 입체 조형을 완성함으로서 중국
청자에 뒤지지 않는 최상의 위치를 확보했다.
소위 ‘최정절(最精節)의 비색(翡色)청자’ ‘천하제일’이라는 평가는 최고의 중국청자와 비교해 나온 것이란
점에서 뜻 깊다.
1123년에 북송 휘종의 사신으로 고려에 온 서긍(徐兢)은 저서『고려도경』(1124)에 개경에서 본 청자를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며 “산예출향(狻猊出香, 사자 향로)은 비색인데, 여러 그릇 가운데 이것이 비할데 없이
정교하고뛰어나며, 나머지는 월주 옛 비색청자와 여주에서 새로 만든 청자와 대체로 유사하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사자향로를 한 단계 위로 보고 나머지 월주 청자의 옛 비색과 여주에서 새로 만든 청자를 그보다
밑으로 본 것 이다.
이는 휘종 시대에 새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여요에 대한 평가가 인색한 것인지, 아니면 그보다 비색의 사자 향로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월했는지 분명치 않다.
하지만 월주 청자의 옛 비색과 여요에서 새로 만들기 시작한 청자를 동급으로 평가하고 한 단계 낮게
봤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가 말한 월주의 옛 비색청자는 1131년 강진요에서 청자 등을 싣고 개경을 향하다가 태안의 대섬 해역에
침몰한 배에서 인양한 2만3천 여 점의 청자를 연상케 한다.
대섬 청자에는 장경병, 펑저반, 화판형 발, 접시와 같은 여요에서 처음 출현한 기종은 포함되지 않았지만
유개완이나 평저접시 같은 여요식 기종이 일부 포함돼 있다.
1123년에 서긍은 여요 양식의 고려청자가 보편적 일상용기에 속하는 평범한 것으로 본 것이다.
서긍은 참외형 주준과 사자 향로의 입체적 요소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과형 주자>는 마치 자연 그대로의 참외로 착각할만한 조형을 보인다.
팽창하는 양감과 그 힘을 지긋이 눌러주는 골 주름이 주는 생동감은 최소한의 장식과 절제된 양감의
조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갑번 상품 순청자의 조형정신은 입체감을 손상시키지 않는 최소한의 장식과 절제된 양감이
조화를 이룬 결과이다.
서긍이 말한 비할 데 없이 정교하고 뛰어난(最精絶) 비색의 사자 향로의 실체는 2005년에 조선관요박물관에서
기획한 ‘청자의 색・형’ 전시에 나온 사자 향로의 밑짝인 <앙련형 향로몸체(仰蓮形爐身)>을 통해 처음 공개됐다.
이 전시에는 중국 청량사여요(淸凉寺汝窯) 출토의 향로 몸체도 한자리에 출품됐다.
뒤이어 2007년 대섬해역 인양유물 가운데 국보60호와 유사한 계통의 사자향로 두 점이 발견되면서
한층 관심을 끌게 됐다.
당시 한국과 중국 양쪽의 <앙련형 향로몸체>는 사자형 뚜껑은 없었지만 서긍이 말한 향로를 연상케 할 만한
규모와 숙연한 표정을 보여준다.
약 30년 전부터 국내에 유입된 다수의 사자 향로는 파손 복원된 것이었임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자세와 늠름한
기상이 다른 기린이나 오리, 원앙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해 최고의 기량이 동원된 입체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에 비하면 대섬에서 인양된 <사자향로>는 1131년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규모도 부실하며 제작 역량도 미숙해
서긍이 말한 사자 향로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대섬 향로의 존재는 같은 계열인 국보 60호 <사자향로>와 서긍의 사자 향로(산예출향)의 두 가지 형식이
1131년 이전부터 공존해 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고려도경』이후 불과 23년 지나 인종 장릉(1146년) 출토품인 네 점의 청자가 등장한다.
이들이 매장품 전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왕릉 부장품으로 최상급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특히 네 점의 청자는 팽창하는 양감과 긴장감 있는 억제력이 조화를 이루면서 우아하면서 엄숙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입체표현 방식은 태안 대섬 청자에서 보이는 보편적이며 일상적인 그릇에서 받는 감각과
분명히 구별된다.
네 점을 대표하는 국보94호 <과형 화병>은 북송 경덕진요에서 만든 <청백자화병>의 중후한 몸통을 늘씬하고
세련된 형태로 깍고 다듬어 귀족적인 우아미(優雅美)를 느끼게 한다.
이러한 입체감각은 참외 형태뿐만 아니라 국화판이나 능화형 등에서도 나타난다.
이렇게 장식을 가능한 배제하고 입체감을 추구한 의도는 호화로운 표면장식 보다 청자 자체의 질감과 입체가
주는 아름다움에 관심이 더 컸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순청자의 문양은 음・양각의 앵무문과 연판문 그리고 파어문을 포함하여 절지문 계통의 단순 간결한
소재가 많이 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 정점에 있는 청자에 요구되는 미의식은 인종장릉 출토의 청자에서 보듯 유태와 표면의
질감, 단정하면서 세련된 입체감이었던 것 같다.
이는 여주 신요기에 나타난 새로운 조형 표현방식이 고려청자에 일정부분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호문(好文)의 왕으로 문양 장식을 사치하다고 경계하면서 근검한 생활을 실천하고 백성을 자애로
다스렸던 인종대왕의 성품이 장릉 출토 청자에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주]
* 서긍(徐兢)『고려도경(高麗圖經)』도로조(陶爐條), “狻猊出香亦翡色也, …,
諸器惟此物最精絶 其餘則越州古秘色 汝州新窯器 大槪相類”.
** 최건「‘고려비색’의 성격과 전개」『미술자료』제83호(국립중앙박물관 2013) pp.201-220 참조.
***『청자의 색, 형-한국, 중국 청자 비교전』(조선관요박물관, 2005) 그림 77-79 참조. - 스마트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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