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초암의 일본화

썬필이 2019. 11. 26. 05:44

초암의 일본화 
방랑하던 무라타 슈코는 다이도쿠지(大德寺) 신주안(眞珠庵)에서 수행 중이던 잇큐(一休) 선사를 만나

참선 수행을 배우게 되었지요.

수행이 깊어지자 잇큐 선사는 자신이 소장해 오던 송나라 원오(圓悟)선사가 쓴 묵적(墨跡)을 슈코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슈코는 차선일미(茶禪一味)의 높고 깊은 경지를 깨달았습니다. 이때 슈코는 61세였습니다.
슈코의 높은 차도 경지를 눈여겨 본 옛 스승 노아미는 자신이 모시는 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

(足利義政·1435~1490) 에게 슈코를 소개하는 유명한 일이 생기기도 했을 만큼 슈코의 차도는 대단했습니다.
그런 슈코가 만년에 시도한 초암차는 차실의 변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귀족 위주의 화려한 서원조(書院造)라는 무가(武家)건축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서원차와는 대조적인 소박한

초암차실로 바뀐 것이지요.
드넓은 차실 공간을 병풍으로 둘러 막고 다다미 4첩(疊) 반의 넓이로 대폭 좁힌 곳에서 차를 마시게 된 것입니다.
다다미 4첩 반은 사방 열자(尺) 넓이인데, 3.3㎡ 가량이지요.

1첩은 대략 74㎠ 정도여서 뒷날 센노리큐가 완성한 2첩 반 차실의 넓이는 겨우 1.64㎡에 불과하여 두 사람이

함께  차 마시기에도 비좁게 느껴지는 공간입니다.
차실의 폭 1.8m 되는 벽에는 매끄러운 고급 벽지를 바르고, 천장은 삼나무 널빤지를 붙였지요.

기와를 얹었던 지붕에는 기와를 벗겨내고 얇은 널빤지 조각을 얹었는데 마치 조선의 산간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너와집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매월당도 한때 귀틀집에다 너와 지붕을 한 곳에서 살았었지요.
차실 안의 네모 진 큰 기둥도 대나무로 바꾸고, 청동 꽃병은 대나무로 만든 꽃병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차실에서 사용하는 차 도구들, 특히 차그릇은 아직 카라모노(唐物)가 주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무라타 슈코를 초암차의 원조라 하는 것은 종래 서원차의 무가(武家) 건축에서 목재와 대나무 중심의

훨씬 소박해진 작은 규모의 차실로 바꾸었기 때문이며,

이때부터 ‘스키야’ 즉 차실(茶室)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중간 정리단계를 이룩한 다케노 쇼오 대에 와서는 한층 더 초암화에 가까워졌습니다.
다케노 쇼오(1502~1555)는 사카이의 피혁상 후예로서 젊은 시절에는 주로 피혁 장사를 하여 큰 돈을 모았지요.

장사를 하면서도 예능 방면에 취미를 가져 일본 전통 노래(歌道)에 심취했고, 무라타 슈코 유파를 잇는

차인들로부터 차도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같은 생활은 사카이에서 사업하는 사람들의 특징처럼 되어온 풍속과도 깊은 관련이 있었습니다.

사카이의 상인이라면 노래와 차도에 관한한 나름대로의 일가견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