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日人들의 이도차완 사랑

썬필이 2020. 4. 5. 13:17

日人들의 이도차완 사랑

이도차완은 일본의 정치적 고뇌와 시대적 소망을 한꺼번에 해결하면서 혜성처럼 등장한 조선 승려들의

흙발우였습니다.

1530년 이전에는 그런 그릇이 존재했는지 일본 차인들로서는 누구도 몰랐던 뜻밖의 출현으로 일본 차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그릇은 일본 통일에 일정한 역할을 해냈고, 그때부터 차인들이 경쟁적으로 소유하고 싶어하는 또 다른

목표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중단되었던 일본과 조선의 국교가 다시 열린 1607년부터 일본 차인들은 조선에다 차그릇을

주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이 통일되자 안정과 평화의 시대가 열렸지요. 차인들의 다도는 더욱 자유분방해지고 조선 차그릇을 향한

그들의 욕구는 억누를 수 없이 팽창했습니다.
차그릇의 주문은 부산지방으로 집중되었지요. 부산, 동래, 기장, 김해, 양산, 진해 등이 포함되었는데 1640년

이후부터는 진주, 하동, 사천까지도 주문품을 확보하기 위한 일본 상인, 차두(茶頭·권위있는 차 사범)들이

조선을 드나들었지요.

이들은 주로 일본의 유명한 차인이나 명망가가 소장하고 있는 이도차완과 똑같은 것을 갖기 위하여 그림을

그리거나 실제 견본물을 조선으로 가져와서 주문을 했지요.
하지만 조선에서 만들어진 것은 그림이나 견본과는 사뭇 다른 그릇들 뿐이었지요. 견본으로 가져온 그릇을

만들었던 사기장들은 거의 모두 일본으로 납치되어 버렸고, 조선에 남은 사람은 하급 기술자였거나 가마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사람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기술과 경험부족으로 인한 당연한 결과였지요.
대표적인 것이 ‘이라보’라는 이름의 차그릇입니다.

그릇 표면이 까칠까칠하다는 일본어 표현(이라이라)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한 그릇이지요.

그릇의 생김새와 감촉, 색깔의 다양성 등 이도차완을 흉내내기 위한 증거로 충분합니다만 전혀 다른 그릇이지요.
그 후 1717년 부산 초량의 왜관이 폐쇄될 때까지 계속 주문 생산된 차그릇은 미시마, 하게메, 와리고다이,

긴카이, 고쇼마루, 운가쿠, 고히키, 이라보, 고키, 한시, 힛센 등으로 부르는 차그릇들을 주문하여 가져갔습니다.
이같은 차그릇 주문이 백년 넘도록 일본 차인들에게 유행했던 이유는 전적으로 이도차완을 향한 집념 때문으로

봐도 크게 틀리지는 않습니다.
특히 진주, 하동 쪽에까지 눈길을 돌린 것은 임진왜란 때 이쪽 지방을 집중 유린했던 시마즈 요시히로와 그의

군대가 이 지역에서 수탈해간 독특한 그릇들 때문인 것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또한 1920~30년대 일본의 유명한 차그릇 수집상이자 전문가였던 이토 마키오가 진주에서 이도차완 몇 점을

발견한 뒤 이도차완의 주된 생산지로 진주 부근을 지적했던 점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이도차완은 일본 차문화에서 단연코 이채로운 존재였으며, 400여년을 두고 여전한

관심거리가 되고 있지요.
그 이도차완이 1960년대부터 우리나라에서도 흥미거리가 되었는데, 차인들이 아닌 도굴꾼, 도자기 상인들

사이에서 비밀스럽게 논의되다가 1970년대 들어서 극소수 도공에 의해 실험되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차인들과 도공들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지요.

비싼 가격과 함께 명성과 권위의 상징처럼 되면서 ‘막사발’이란 엉뚱한 이름이 생겨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