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32)선비들의 차 문화
살랑거리는 바람에 온기가 실려 있다. 지저귀는 새소리에 깨어나는 햇살이 마치 솜털구름처럼 포근하다.
흐르는 물은 굳게 닫혔던 문을 활짝 열어젖히듯 포효하며 콸콸 흐른다. 어디선가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묵은 장작을 켜켜이 쌓아놓은 뒷간인가, 엊그제 하얀 명주수건으로 곱게 닦아놓은 차솥에서인가,
아니면 자우홍련사 작은 연못에서인가, 그렇다. 살아 있는 것들이 환희롭게 깨어나는 소리다.
바람과 햇볕과 물을 어미의 자궁으로 삼아 서서히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은 행복이다.
존재하는 것 역시 기쁨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존재로도 고귀한 것이고 축복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온 우주와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은 소중한 존재다. 자신을 바라보고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사랑할 수 있고 얻을 수 있다.
굳었던 대지의 가슴에 불을 놓고 북으로 북으로 향하는 바람처럼, 그 어느 곳 하나 빠트리지 않고 골고루
내리쬐는 햇살처럼 자신을 환희롭게 행복하게 바라봐야 한다.
차의 살림살이 역시 마찬가지다.
간장종지보다 더 작은 찻그릇 속에서 우리는 온 우주를 담아내는 자신의 살림살이를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같은 살림살이를 살아온 분들이 바로 한 잔의 차에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의 큰 도를
담아온 선비들이다. 이른바 군자다도이다. 선비다도의 핵심은 바로 수신과 수양의 길이다.
이색의 시 한구절은 그같은 선비다도의 핵심을 잘 표현하고 있다.
“작은 병에 샘물을 길어/깨어진 노구솥에 노아차를 달이네/귓바퀴가 갑자기 밝아지고/코로는 차향을 맡네/
별안간 눈에 가린 편견이 없어지니/밖으로 보이는 데는 티끌이 없구나/혀로 맛본 후 목으로 내려가니/
살과 뼈가 똑발라 비뚤어짐이 없도다/마음은 한 뙈기 좁은 밭/밝고 깨끗하니 생각에 그릇됨이 없네/
어느 겨를에 천하 다스리는 일에 생각이 미치겠는가/군자는 마땅히 집안을 바르게 해야 하리.”
선비들의 차 생활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시다.
차를 끓이기 위해 손수 물을 뜨고 귀한 노아차를 달여 먹으며 밝고 깨끗하고 그릇됨이 없는 삶을 생각하는
선비들의 차 문화는 수신과 제가, 치국의 근본을 담아내는 또하나의 문화적 그릇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유학을 공부한 선비의 개념은 지식인과 동의어라는 사실을 알고 출발해야 한다.
유교문화에 대한 정서적인 거부감 속에 깃든 고리타분하고 현상유지적인 것이 아닌, 학식과 인품을 갖춘
지식인을 선비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선비는 당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식인 그룹이었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에 선비문화가 들어온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때로 알려져 있다.
백제·신라도 건국 초기에 선진적인 사상과 문화 중 하나였던 유교를 받아들였다.
그런 점에서 선비문화는 우리 문화의 삶과 철학을 지탱해온 기둥 중 하나였다.
선비들의 차문화가 절정을 이뤘던 때는 고려 300년간 쯤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선비문화의 발판이 된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무신란이다.
무신란을 지켜본 선비들은 도성을 떠나 산과 물이 좋은 곳을 찾아 은거하며 차 생활을 즐기게 된다.
무신란은 고려시대 선비 차문화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왕실과 귀족이 중심이 되어 이끌었던 화려한 차문화는 쇠퇴하게 되고 은거에 들어간 선비들을 중심으로한
차문화가 급속하게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변화는 음다 풍속에서부터 시작됐다.
귀한 단차를 갈아 말차를 마시던 음다 풍속에서 만들기 쉬운 잎차를 즐기게 된다.
그에 따라 다구도 변화를 했다.
유차를 담는 고급 찻그릇인 ‘다구’보다 맑은 탕차도 겸해서 담을 수 있는 ‘다완’을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지배그룹으로부터의 소외는 물적 토대로부터의 소외로 이어졌고 당시 수입해 공유했던 값비싼 단차를
맛볼 수 없었다. 은거에 들어간 선비들은 우리나라에서 손쉽게 제조하고 구할 수 있는 아차(芽茶) 즉,
잎차를 선호하게 되었던 것이다.
잎차의 선호는 그에 따라 다구의 변화도 함께 가져왔던 것으로 보여진다.
고려시대 차인들은 좋은 찻자리에 초대받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했다.
‘다석(茶席)’‘다연(茶筵)’‘명석(茗席)’‘명연(茗筵)’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찻자리는 초대장을 미리 받아야 했으며
손님의 자격에 따라 앉는 자리도 달라졌다.
당시 찻자리의 손님 자격으로는 ‘청덕과 영명, 즉 명예를 갖춘 사람’이라고 불렀다.
뿐만 아니라 유교적 규범에 따라 다례에도 철저하게 규범과 절도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 찻자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바로 ‘다담(茶談)’이었다.
‘다담’이란 차를 마시며 나누는 대화로 당시 사상적·철학적·정치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지식 기량과 수양
깊이를 나눠보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런 점에서 당시 찻자리는 자격과 규범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선비다도를 대표한 차인은 이색이다.
성균관 대사성·대제학 등을 지낸 이색은 차를 전문적으로 구해오는 ‘가동(家童)’과, 전다하는 전문 노비가
있었을 정도로 차의 명인이었다.
차의 불꽃을 잘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차를 끓이는 법을 공부하며 연구했던 것으로 알려진 이색은
‘다종(茶鐘)’‘화자’(꽃무늬 오지찻잔),‘노아’‘영아’‘다탑’(차마시는 평상)등 차 용어도 만들어 전파시켰다.
이색은 육우의 ‘다경´ 속 시들을 섭렵하며 차 문화 공부도 했다.
이색의 차생활은 당시 고려시대 선비차인들의 보편적인 차생활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좋은 찻자리에 초대받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차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과 경험이 있어야 했으며
그에 따른 지식적 기반도 축적되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선비들의 차생활은 훗날 조선시대를 건국하는 이념적·물적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 또한
역사적 아이러니다. 선비들은 차의 청덕(淸德) 정신을 매우 애호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차 나무를 사람을 맑게 하는 청인수(淸人樹)라고 불렀을 뿐만 아니라 헌공하는 차를 청공이라
부를 정도로 차의 청덕을 중요시했다.
차의 청덕은 검소하고 청빈한 생활을 지향했던 선비들의 삶의 문화와 잘 부합되었다.
서거정은 그같은 삶을 실천한 대표적인 선비다인이다.
대사헌을 두번이나 역임하고 육조판서를 두루 지낸후 6대에 걸쳐 임금을 모시며 45년간 공직에 머문 서거정은
지붕에 구멍이 난 초가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선비 다인 중 차끓이는 일과 차 맛내기에 달인으로 불리는 서거정은 70편이 넘는 다시를 남길 정도로 깊은
차생활을 영위했다.
청빈한 공직자의 초상으로 불리는 청백한 삶을 산 서거정은 “비와 바람은 이미 지붕을 뚫었고/
시와 글씨는 부질없이 집에 가득하네/조용히 가는 글씨를 쓰고/
한가롭게 게 눈차를 끓인다네.”라고 노래하고 있다.
비와 바람을 피할 수도 없는 구멍뚫린 초가집에 살며 다리 부러진 쇠솥과 금 간 찻잔을 쓰며 청빈한 삶을 산
서거정 모습은 자신의 삶에 충실했을 때 만날 수 있는 최고의 행복과 차생활이 어디에 있음을 일깨운다.
참으로 멋스럽고 멋스러운 삶속에 자신의 삶을 최고로 극대화시킨 차인 서거정의 삶은 아련한 아픔과
경탄스러움을 던져준다. 선비 다인들의 검박한 차살림살이는 ‘다실’에서 볼 수 있다.
작고 소박한 초가집을 지어 그것을 ‘소실’‘소재’‘소려’‘소루’라 부르기도 했으며 기와가 아닌 억새나 짚을
엮어서 만들었다는 점에서 ‘초당’‘모옥’‘모암’‘초암’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다인인 허균의 ‘누실명’은 이같은 선비들의 차살림살이를 잘 말해준다.
작은 다실에서 청빈하게 사는 것을 최고의 이상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여긴 허균은 “사방은 아홉자 크기의
단칸방으로서, 책을 갖춰두고 차 마시고 향 피우며 지내는데, 남들은 누추하다고 하나 심신은 편안하다.
누추하다고 함은 몸과 이름이 썩어버림을 말하니 군자를 지향하는 내가 사는 방은 누추하지 않다.”고 적고 있다.
허균처럼 대부분의 선비다인들은 차에 그 어떤 부와 명리보다도 더 높은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선비차 문화의 핵심은 바로 청빈의 덕을 통해 개인과 가족, 국가의 경영을 영위하는 지혜를 쌓는 데 있었다.
자연과 벗삼으며 버림을 통해 세상을 얻는 미학을 터득한 선비들의 차 생활은 진정한 차의 살림살이가
어디에 있는지를 오늘 우리들에게 잘 일깨우고 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다인인 자하 신위는 “많은 여인을 거느리고 밥 먹는 것은 아무리 즐거워도 색·향·미가 뛰어난
차보다 못하다. 좋은 차는 좋은 사람과 같아 자신에게 웃음을 준다.”고 적고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끼니는 굶주림을 겨우 면할 뿐인데. 차를 병처럼 좋아하는 것이 부끄럽다.
” 차는 좋은 삶의 양식과 같아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살찌게 한다.
그리고 그런 삶을 부끄럽게 바라볼 수 있는 넉넉한 혜안을 준다.
차가 우리삶에 있어서 우주처럼 넓고 광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일지암 암주
■ 조선시대 법정의 다례의식
우리 차문화사에 있어서 차례는 단순한 생활양식이 아니라, 철학적 깊이를 지닌 채 발전해왔다.
죄와 법을 다룰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왕과 신하들이, 또한 사헌부에서 사형 등 중형을 지닌 죄인들의 죄를 판결하거나
사면할 때 차를 통해 엄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고려시대에 왕과 신하들은 죄인을 사형시키느냐 아니면 섬에 유배를 보낼 것인가를 결정하기 전 함께 다례의식을
행했다. 그당시 실제로 행했던 다례의를 살펴보자.
다례가 시작되기 전 왕이 내전의 남쪽 행랑에 앉고 신하들이 재배한 후 제자리를 잡는다.
다례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차를 담당하는 다방참상원이 각종 다구들과 차를 보관하는 별채에서 차를 들고 들어온다.
칠품원의 관직을 가진 내시가 뚜껑을 연다.
집례가 전의 앞기둥 밖으로 올라와서 왕과 마주보고 절 한후 차를 권하고 놓은 뒷전 아래로 내려온다.
다음은 문무고관대작들에게 차를 올린다. 원방의 8품 이하 벼슬아치가 다례를 담당한다.
집례가 다시 전에 올라가 엎드려 차를 내어갈 것을 청한다.
붉은 붓과 먹을 든 주대원(임금의 물음에 대답하는 관원)이 들어와 “단필로 참형을 결정하시되 유인도에
들어갈 자를 제외하소서.”라고 아뢴다.
형이 결정된 후 왕과 문무 고관대작들에게 차를 권하고 신하들은 다시 재배를 한다.
다례가 끝난후 신하들은 왕이 술과 과일을 하사한다는 분부를 전달받고 차례로 나간다.
다례의에서 형을 결정하기 전 왕과 신하들은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 탁한 말차를 마셨으며,
중형 결정 후에는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어주는 탕차(湯茶)를 마셨다.
고려시대에는 또 죄를 사면해주는 ‘사면다례’도 행해졌다.
고려 때 왕은 중요한 죄인을 사면할 때 죄를 사면하는 공식 의례를 행했다.
이때 의례에 동참하는 행렬에 행로와 휴대용 화로를 든 군인인 다담군사 4명이 함께한 것을 볼 때 중요한
사면의식 때도 차례는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행해졌던 사헌부의 다시(茶時)도 차를 단순한 행다를 넘어선 문화철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서거정은 ‘사헌부 제좌청중신기´에 “부의 청에서는 두 가지 일을 하였다.
그 하나는 다시이며 또 하나는 제좌이다. 다시란 다례의 뜻을 취한 것이다.
고려와 조선 초기에 대관은 다만 임금에게 간언하는 책임만 맡았고, 관청의 일반적인 일은 다스리지 않아서
하루에 한번 모여 차 마시는 자리를 베풀고 헤어졌다.”고 적고있다.
사헌부 감찰을 엮임했던 정극인도 “대관들이 다 모이지 않아서 임금을 뵐 때가 되지 않았으면 잠시 물러나
있기를 청하여 아뢰고 차를 점다하여 시장기를 메웠다.
그러므로 감찰은 다시라는 두 글자를 들고 들어가서 임금께 아뢰었다.”고 말한 것을 볼때 차를 마시는 일이
지금처럼 단순한 휴식이 아닌, 하나의 업무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태종실록´에서는 각 관청에서 사헌부의 검사를 청할 때 전날 다시에 통보하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에서도 간단한 업무를 처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은 ‘흠흠심서´에서 “감찰이 다시라는 패를 가지고 앞에서 인도하고 가면 비록 대관을 만나더라도
말에서 내리지 않는다.”고 적고있다.
이는 다시가 간단한 업무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시대 초기까지 다시는 모든 관아에서 철저하게 행해졌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러서 다시의 본뜻이 상실되어갈 뿐만 아니라 행하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다.
우리민족은 매우 신중한 문화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매우 중요한 죄의 결정을 신중하게 하기 위해 차를 마시며 지나온 판결을 되짚는 것은 올바름을 통해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를 되짚는 신중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차는 올바름을 뜻할 뿐만 아니라 엄정하고 평등한 정신을 내재하고 있다.
우리민족은 차를 단순한 음료의 도구를 벗어나 인간의 근원적인 평등성을 추구하는 삶의 철학으로 승화시켜낸
위대한 족적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차는 민족공동체의 건강한 삶을 운용하는 삶의 뿌리로서 각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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