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 이야기

1611년 제작 물 건너 일본 다도계 공감받는 최고 작품 되다

썬필이 2025. 1. 8. 10:20

1611년 제작 물 건너 일본 다도계 공감받는 최고 작품 되다 - 경남매일 - 2025.01.07
김해찻사발 맥 4
신해년찻사발 고전고려(古田高麗)
유명 다인 후루타 오리베 소장
구둣발처럼 일그러진 형상 특징
주황색 농담·고임눈 자리 매력
무작위성·무심함 어우러져 눈길
횐신해년·철화신해년 2종류

신해년찻사발 (辛亥年茶碗), 오사카(大阪) 개인 소장. 높이: 7.5~7.9㎝, 구경: 11.3~13.0㎝,

김해 주문 찻사발 중에서 고쇼마루다완(御所丸茶碗)이라고 불리는 찻사발은 다인(茶人)들 
사이에 매우 귀하게 여겨진다. 
고쇼마루(御所丸)는 배의 이름으로서 이 배에 김해 찻사발을 싣고 일본으로 가져갔다고 해 
지금도 일본에서는 고쇼마루다완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할 기록이나 자료들은 아직 발견된 사례는 전혀 없으며 몇 가지 
낭설만 분분하다. 
그 하나는 임진왜란이 한창일 때 나고야성에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으로 건너가기 위해 
만든 배였는데 임란 후 어용 무역선으로 찻사발을 싣고 갔다는 설과 또 하나는 
임진왜란 전쟁 중에 사쓰마 번주(藩主)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가 찻사발을 구워 
고쇼마루에 실어 보내어 히데요시에게 헌상했다는 설이 있다.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을 전후해 시마츠 요시히로의 어용선(御用船)으로 조선과 교역할 때 
왕래한 배라는 설, 그밖에 대마도의 어용 교역선이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첫 번째의 설은 히데요시가 나고야성에서 있을 때 관련 기록과 고쇼마루라는 어용 
무역선으로서의 실체가 어디에도 없으며, 두 번과 세 번째 설은 요시히로의 사쓰마번과 조선 
사이 교역 기록이 없고 요시히로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가장 많은 전투를 치른 장수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시에 전라도 공략과 사천성 주둔 후 철군할 때 고시니 유키나가(小西行長)를 
구원하기 위해 나섰으나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대패해 간신히 돌아갔던 정황과 귀국 후 
일본의 상황을 봤을 때 불가능한 일이며 고쇼마루의 존재를 전혀 찾을 수 없다. 
네 번째 설은 대마도와의 기록에도 고쇼마루는 없으며 임란 후 국교가 정상화됐던 
기유약조(己酉約條; 1609)년까지 일본과 교역은 전혀 없었다.

역사는 기록과 당시의 상황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이어져 나아간다. 
고쇼마루다완(御所丸茶碗)이 고쇼마루라는 배로 운송됐다는 논리는 위의 사실로 보아 공감하기 
힘들며 따라서 이 찻사발은 기유약조 후 일본에서 1611년에 구청해 김해 사기장(沙器匠)이 
만들고 구워간 찻사발이고 1611년이 신해년(辛亥年)이므로 신해년찻사발(辛亥年茶碗)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신해년찻사발 중에서 가장 빼어난 찻사발로 고전고려(古田高麗)라는 이름을 가진 찻사발이 있다. 
이 찻사발의 이름에서 古田(후루타)는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 1543~1615)가 소장하고 
사용했으므로 古田이라고 이름 붙였으며 高麗는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에 대해 별칭으로 사용해 
고전고려(古田高麗) 찻사발로 불려 왔다.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 1543~1615)는 전국(戰國)시대부터 에도(江戶)시대 초기에 걸친 
무장이면서 다이묘(大名)로 당대 최고의 다인(茶人)이었던 센 리큐(千利休)를 이은 유명한 
다인(茶人)이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다두(茶頭)로 활약했고 
다완 및 회석구 제작, 건축, 정원설계 등 다방면에서 활동한 예술가로 '오리베 취향'이라는 
유행어를 남기기도 했다.
고전고려(古田高麗)과 같은 신해년찻사발 계열의 모양을 일본에서는 답형(沓形)으로 부르며 
구둣발처럼 일그러진 찻사발들의 형상을 말한다.
이 찻사발은 반통형(半筒形)에 허리가 잘록하게 띠를 두른 모양으로 구연은 부정확한 타원으로 
일그러져 있고 입술 부위는 바깥으로 말린 입술(玉緣)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찻사발 허리 중앙으로 깊게 띠를 둘러 2단으로 구획했고 그 아래로는 칼로 모따기 했으며
굽은 낮게 만들어 둥근 겉면을 칼로 듬성듬성 모를 치듯이 잘라냈다.

신해년찻사발(辛亥年茶碗), 오사카(大阪) 개인 소장.

빚음흙은 철분이 소량 함유한 내화도(耐火度)가 높은 백자 계열의 흙으로 작은 백토 입자가 
섞여 있으며 유약은 볏짚과 같은 화본과(禾本科) 계열의 잿물을 함유한 유탁(乳濁)이 있는 엷은 
백유(白釉)을 씌웠으나 유약의 시유(施釉) 상태가 짙거나 엷은 농담(濃淡)이 매력적인 찻사발이다. 
굽 주위는 유약을 시유하지 않았으나 유약을 씌울 때 찻사발을 잡았던 손에 묻은 유약이 
무의식적으로 발린 현상을 볼 수 있다.
찻사발 내면은 바깥의 복잡한 형상과 달리 물레 자국이 없이 유연하게 흐르듯이 지어졌으며 
차고임 자리는 다소곳한 얕은 웅덩이를 이뤘다. 
찻사발 밑자리는 산화 분위기에 의한 엷게 깔아 놓은 듯 주황색을 띠고 있으며 그 위로 유약이 
완전히 녹지 않아 생기는 유탁(乳濁) 현상이 내려앉아 있고, 그 주변과 기(器)벽에 박혀 있는 
백토 알갱이 때문에 생긴 핀홀을 통해 찻물이 스민 회색빛 사용흔이 조화롭게 하나의 
내면세계를 이룬다.

찻사발 바깥면의 구연부는 말아서 넘긴 입술(玉緣)이 바깥으로 돌출됐으며 그 크기와 두께가 
일정하지 않고 아래 남아 있는 공간과 아주 자연스럽게 변화를 이루고 있어 사기장(沙器匠)의 
무심(無心)함이 경지를 이루고 있다. 
그 아래로 찻사발 허리에 대님 매듯이 살포시 눌러 지나간 띠선은 물레의 중심을 살짝 벗어나 
모양을 잡았고 띠선 속에 미세한 회전 자국은 치개(무늬 넣는 막대기)의 표정을 오롯이 
부드럽게 담아 놓았다. 
그 아래에 두 단으로 듬성듬성 칼로 무심히 모잽이 친 부위마다 옅은 유백색 유약 아래로 은은히 
불규칙하게 배어 나온 주황색의 산화된 빚음흙빛이 보이고 찻사발 사용흔과 조화롭게 
어울려볼 만한 경치를 이룬다.
굽다리(高台)는 다른 찻사발에 비해 안정되게 넓은 편이고 높이(高台高)는 낮으며, 
굽다리는 물레로 깎은 후 바깥면은 팔각에 가깝게 굽칼로 성글게 뜨듯이 불규칙하게 잘라내었고 
굽안자리는 평평하게 생각 없이 되는대로 깎았다. 
이 찻사발의 가장 매력적인 점은 소성(燒成)시 굽 주변에서 일어난 불돌이 현상으로 일부분이 
강한 환원불로 빚음흙이 탄화돼 검거나 암회색으로 요변(窯變)이 일어났고, 시유(施釉)할 때 손에 
묻은 유약의 일부가 자연스럽게 묻어 있으나 완전히 용융되지 않은 백탁(白濁)현상이 일어나 
있으며 그 주위에 유약의 강한 산화작용으로 주황색의 농담이 생겨났고 고임눈 자리와 
겹쳐지면서 변화가 매우 아름답다.
이 찻사발은 이 외에도 몸통 부위에 손가락 자국과 칼로 깎은 모잽이 부위의 긁힘, 굽다리 내면에 
무심하게 긋거나 판 흔적들, 굽 주변에 변화 등에서 당시의 사기장들의 무작위(無作爲)성과 
무심(無心)함이 어우려져 있으며 최순우(崔淳雨, 1916~1984) 선생의 '무기교의 기교'라는 표현을 
새삼 생각하게 한다. 
고전고려(古田高麗) 찻사발은 비록 일본(日本)으로부터 모본(模本)에 의해 주문했으나 
조선(朝鮮) 사기장(沙器匠)의 마음으로 재해석해 만들어 준 찻사발이다.
일본의 조선 도자기의 권위자이며 저명한 도자사학자이고 도예가였던 
코야마 후지오(小山 富士夫)는 이 찻사발에 대해 '고전고려는 구연을 물레로 만들기, 몸통의 조임, 
다 구워진 상태 등 단연 최고의 명완(名碗)으로, 특히 굽다리(高台)의 작위가 비범하다. 
이 비범함은 이름 모를 조선의 도공(陶工)들이 만들었다. 
무작위로 머리빗을 사용해 몸통에 긋고, 다른 고쇼마루다완(御所丸茶碗)에 비해 굽다리(高台)가 
육중하며, 자유로운 빗자욱에 군더더기 없는 아취(雅趣)가 있다'라고 극찬했으며 
일본의 다도(茶道)계에서 공감하는 최고의 작품 중에 하나로 전해진다

후기신해년찻사발, 개인 소장.

이 찻사발에 대해 일본의 문헌 기록으로는 찻사발을 보았던 배견기(排見記)의 기록인 
과안록(過眼錄; 1820~1867년 사이 작성) 권 73에 '御所丸茶碗 銘 '古田高麗' 箱小堀宗甫'의 
기록이 있고 찻사발의 분류를 기록한 목리서(目利書) 중에 명물집(銘物集)의 기록에는
 '특별히 御所丸을 맡기다.- 원래 '古田高麗'라 하는 것은 본가(本家)로서 宗甫가 쓴 御所丸이 
이름이 높고 김해 가마의 물건이다…'. 두 기록에는 고전고려 찻사발을 보관하는 상자에 글씨를 
코보리 소호(小堀宗甫)가 썼으며 소호(宗甫)는 당시 최고의 다인으로 
코보리 엔슈(小堀 遠州)의 본명이다. 
위의 기록으로 보아 신해년찻사발 고전고려는 김해 가마에서 만든 찻사발로 기록돼 있고 
처음부터 에도시대 말기까지 귀중한 찻사발로 대접받았고 소중하게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신해년찻사발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누며 하나는 고전고려 찻사발과 같은 무지(無地)의 
흰신해년찻사발(白御所丸茶碗)과 또 하나는 철사채(鐵砂彩)로 
그린 철화신해년찻사발(黑御所丸茶碗)이 있다.

흰신해년찻사발은 다시 네 종류의 찻사발로 나눠지며 첫 번째로 고전고려와 같은 류의 
찻사발이 있고, 두 번째로는 오사카 탕목미술관(湯木美術館) 소장의 '유귀(由貴)'로 이름이 
붙여진 신해년찻사발로 찻사발 허리부터 구연까지 넓게 치개를 사용해 큰 띠를 이룬 
작품의 유형이다. 
세 번째로 도쿄 근진미술관(根津美術館) 소장의 신해년찻사발로 다른 찻사발에 비해 높이가 
높은 반통형으로 허리 부위에 띠줄이 없이 물레 자국이 있으며 구연의 말림이 불규칙하게 
만들어진 형이고, 네 번째는 1611년의 김해에 주문했던 찻사발과 관련이 없이 1639년 이후의 
왜관(倭館)내 부산요(釜山窯)에서 일본으로부터 신해년찻사발 유형의 찻사발을 다시 주문해 
만들었던 후기신해년찻사발로 나눠진다.

후기신해년찻사발, 개인 소장. 높이: 7.0㎝, 구경: 10.32~12.5㎝, 굽다리 외경: 6.5㎝

부산요에서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후기신해년찻사발을 개인 소장의 찻사발과 비교해서 
감상해 본다면 우선 외형은 충실하게 신해년찻사발의 특징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찻사발의 제작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며 또한 만드는 사기장의 감성에 따라 
다르게 작품에 반영된다. 
각각 사람의 마음과 개성이 다르듯 찻사발을 짓고 불을 지피는 습관과 환경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타나며 특히 사용하는 백토 등의 원료와 소성할 때 사용하는 나무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를 얻기도 한다. 
그래서 찻사발의 재현이 더 어려운 요소로 작용한다.
위의 후기신해년찻사발은 탕목미술관(湯木美術館) 소장의 유형을 따랐고 김해에서 만들었던 
신해년과는 우선 사용하는 원료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신해년찻사발은 백토의 선택에서 고화도 알갱이가 있는 백토를 사용해 변화와 요변(窯變)을 
유도했고 찻사발의 사용흔이 잘 나타나지만 후기신해년은 백토가 가지는 특징이 적게 나타나며 
찻사발 밑자리의 엷은 주황색 산화된 분위기가 없고 사용흔도 나타나지 않는다. 
유약은 신해년에 비해 어둡고 유탁성 백색도가 떨어지며 굽다리 깎음도 신해년에 비해 작게 
만들었고 모따기 하지 않아 찻사발의 당당함이 부족하다. 
그러나 이 찻사발은 유약의 맺힘과 농담에 의한 변화가 찻사발의 볼거리를 만들고 있다. 
대충 친 모잽이와 무심히 남아있는 손자국과 긁힘들이 조선 사기장의 나름의 개성과 아취가 
묻어 있는 명품의 찻사발이라 하겠다. 
오늘날 도자기를 빚는 도예가들이 전래되는 명품의 찻사발을 재현하려는 과정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 글쓴이 조국영 도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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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년 제작 물 건너 일본 다도계 공감받는 최고 작품 되다 - 경남매일

김해 주문 찻사발 중에서 고쇼마루다완(御所丸茶碗)이라고 불리는 찻사발은 다인(茶人)들 사이에 매우 귀하게 여겨진다. 고쇼마루(御所丸)는 배의 이름으로서 이 배에 김해 찻사발을 싣고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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