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 이야기

주문찻사발 중 가장 유명… 日 국가 중요문화재 지정

썬필이 2025. 1. 22. 09:31

주문찻사발 중 가장 유명… 日 국가 중요문화재 지정 - 경남매일 - 2025.01.21
김해찻사발 맥 5
철화문신해년찻사발(黑御所丸茶碗) 석양(夕陽)
채료로 그린 회화 기법 사용
아름답고 난잡한 손자국 눈길
회화적 요소·역동적 표현 갖춰
주제 명확·지극히 개성적 표현
환경·재료 이질감 속 재창

철화신해년찻사발 석양(夕陽), 후지타(臟田) 미술관 소장, . 높이: 7.6㎝, 구경: 10.9~14.2㎝

김해의 주문찻사발 중에 일본 다인(茶人)들에게 가장 유명한 찻사발(名碗)을 들라면 
흰신해년찻사발(白御所丸茶碗)로는 '고전고려(古田高麗)'와 철화문신해년찻사발
(黑御所丸茶碗)로는 '석양(夕陽)'을 주저 없이 꼽는다. 
'석양' 찻사발은 오사카(大阪)의 후지타(臟田) 미술관에 소장돼 있으며 현재 일본의 
국가 중요문화재(重要文化財)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다.
철화문신해년찻사발(黑御所丸茶碗) '석양(夕陽)'은 그 이름을 석양으로 한 것은 짙은 고동색의 
철화(鐵畵) 그림 속에 철채(鐵彩)가 유약과 함께 불에 의해 결정화돼 녹을 때 붉은 갈색으로 
피어나 있고, 유약의 색조가 누른빛 난(卵)색으로 비치는 것이 흡사 저물어가는 석양을 
떠올렸기 때문이라 추측한다. 
석양은 찻사발로써 조형적으로도 빼어나지만 면을 모젭이한 것, 굽을 만드는 조각적인 요소와 
철사(鐵砂)를 채료(彩料)로 그린 회화적인 기법도 사용해 만든 독특한 찻사발이다.

석양 찻사발의 모양은 일본에서는 답형(沓形)으로 부르며 낮은 반통형(半筒形)에 굽으로부터 
허리 쪽으로 완만하게 바깥으로 두 개의 단을 이루면서 그 위로 구연을 만들었으며 위에서 
보면 타원형으로 찌그러뜨렸다. 
허리 아래로는 칼로 모따기 했으며 굽은 낮게 만들어 둥근 겉면을 칼로 성글게 모를 쳐서 
변화를 줬고 굽 언저리에는 유약을 씌우지 않았다.
빚음흙(胎土)은 흰신해년찻사발(白御所丸茶碗)과 같은 흙으로 철분을 소량 함유한 백자 계열의 
내화도(耐火度)가 높은 흙이며 미세한 백토 입자가 섞여 있다. 유약은 유탁(乳濁)이 있는 
재유(灰釉)로 산화물질에 의한 엷은 백유(白釉) 계열의 유약이 연한 계란색을 띤다.
철채 그림은 초벌구이를 한 후에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유약을 씌웠으며 유약 속의 재(灰)에 
함유한 알갱이 철분에 의해 반점을 이루는 것들이 철화(鐵畵) 그림의 여백에서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 허리 아래로는 유약의 농담과 유맺힘 등의 변화가 아름답고 난잡한 손자국과 
유흘림이 자유분방하다. 
찻사발 내면은 타원으로 바깥의 모양에 따라 유연하게 흐름을 같이 해 물레 자국이 있으며
차고임 자리는 엷게 내려앉아 있다.

黑御所丸茶碗 높이: 7.6㎝, 구경: 10.9~14.2㎝, 굽다리 외경: 6.4㎝, 굽다리 높이: 1.2㎝

석양 찻사발 바깥면의 구연부 입술 부위는 중심에서 약간 바깥으로 말린 입술(玉緣)의 
형상으로 만들었고 그 아래로는 깊고 작은 띠 모양이며, 허리 부위에 두 단으로 물레의 중심을 
흩트려 약간 비대칭 형태로 만들었다. 
찻사발 허리 아래로 다양한 표현의 시도가 있고 가장 변화가 많아 볼거리가 풍부하다. 
우선 허리 아래와 굽 사이를 아무렇게나 구획해 무심히 칼로 모따기 해 굽 언저리는 
물레 위에서 굽칼로 띠를 두르듯이 가볍게 깎았다. 
그러고는 대충 모딴 위의 두 군데를 굽칼로 힘 있게 그어 파내었으며 이러한 작위(作爲)는
대단히 파격적이고 격렬한 표현으로 볼 수밖에 없다.
굽다리(高台)는 물레로 깎은 후 바깥 면을 굽칼로 계산 없이 되는대로 안으로 옥게 면을 쳤으며 
굽다리 바닥도 일부 훼손된 불규칙한 육각 형태의 각굽으로 굽의 높이도 일정하지 않다. 
굽을 중심으로 그 언저리에는 굽에 걸리듯이 유약을 입히지 않아 빚음흙이 연갈색으로 
노출돼 흙이 가지고 있는 감성을 느낄 수 있다. 
굽바닥까지 흘러 내린 철채를 슬쩍 닦은 듯 짙은 갈색이 굽바닥에 스며들어 무심한 
경치를 보여 주고 있다.
굽의 안 자리는 굽 높이에 비해 현저히 얕게 깎아내었으며 바닥이 삐뚤거리는 물레로 깎은 
흔적과 주름 현상은 도자기를 빚는 물레의 축을 잡아주는 갓모가 오랫동안 사용해 헐거워져 
일어나는 현상으로 자유롭게 내버려뒀다. 
표면에 어설프게 난 선들은 전혀 수정하거나 마무리할 생각도 하지 않아 도무지 주문 생산품을 
만드는 사기장의 태도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태평스럽고 천진난만한 심성을 느끼게 한다.
이 찻사발의 으뜸인 특징은 사발 전면과 구연부에 그려진 철화(鐵畵) 그림으로, 선묘가 
간결하면서 균형이 잘 잡혀 있고 공간의 배치가 매우 안정되면서 간결하게 표현했다. 
묵직한 필선은 추상적이나 철채가 물레선을 따라 철(鐵) 결정이 붉은 갈색으로 아름답게 피어 
재료감이 탁월하고 여백(餘白)에서 우러나오는 공간의 조화는 몇 개의 자유롭게 점을 찍은 
회화적인 처리와 철채 안료가 중력에 의해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을 회화의 일부분으로 
내버려둔 것이다. 
이것은 매우 현대적이며 현대 미술에서 볼 수 있는 특징들로 그림이 그려져 찻사발(繪茶碗) 
가운데 최고의 수작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철화문신해년찻사발(鐵畵文辛亥年茶碗)을 일본에서는 후루타 오리베
(古田織部; 1543~1615)가 주문한 의장의 찻사발이라 하면서 구로고쇼마루(黑御所丸)라고 
부르거나 구로하케메고쇼마루(黑刷毛目御所丸)라고 부른다. 
그러나 구로고쇼마루는 일본의 도자사학계와 다인들이 구로오리베(黑織部) 다완과 같은 
기법과 부류의 찻사발로 해석하는 논리는 실제로는 전혀 다르게 봐야 한다. 
우선 구로오리베다완들은 검은색의 주체가 흑유(黑釉)라는 점이고 사용 범위 또한 면의 
분할이나 채움 그리고 장식 등 디자인적인 요소를 도자기에 사용했다. 
그러나 철화문신해년찻사발들은 철사(鐵砂)를 이용해 그림을 그리기 위한 채료로 만든 
것으로 그린 그림이 단순히 추상적이라고 해 흑유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다. 
흑유와 철화의 다른 점은 흑유는 유약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색채가 균일하고 변화가 적으나, 
철화는 채료라는 점에서 농담과 사용 기법에 따라 결과가 다변하고 구울 때 불의 분위기에 
따라 색상과 느낌이 다르므로 석양 찻사발의 경우 독립적이고 회화적인 요소가 강하게 
느껴지며 대단히 역동적이고 자유분방한 표현을 할 수 있었다.
구로하케메고쇼마루(黑刷毛目御所丸)라는 것은 좀 더 덧붙인 논리로 하케메(刷毛目)는 
귀얄이라는 의미이며 검은 색유를 찻사발에 귀얄 기법으로 칠해 완성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위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철채를 이용해 회화적인 방식으로 그려진 찻사발을 흑유로 귀얄분청 
기법으로 칠한 찻사발이라 해석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의 한계는 귀얄은 빚음흙의 색상을 가리거나 장식적인 요소로 사용되지만 
철화는 주제가 명확하고 지극히 개성적인 표현으로 보여지고 있다. 
예를 들자면 구연의 내면에 철화로 그린 선(線)은 귀얄로 표현하기 힘든 회화적인 선으로 
그 감정과 내면의 분위기까지 나타나고 있다.
신해년찻사발과 오리베도자기의 관계성에 대해 당시 조선과 일본의 외교 문제를 대행하던 
대마도번(對馬島番)의 기록이 전무한 상황으로 상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에 따르는 연구가 
진행 중이며 대표되는 논리는 첫째로 후루타 오리베는 일본의 오리베도자기와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에 김해의 신해년 주문찻사발과 무관하다는 설로 오리베야키(織部燒)는 
모모야마(桃山) 시대에 1605년 무렵 기후현 도키시(土岐市) 부근에서 시작돼 
1615년~1624년까지 주로 미노(美濃)지방에서 생산된 도기로 오리베가 만년의 다회(茶會)
기록이 150여 회 있으나 한 번도 오리베야키(織部燒) 찻사발을 사용한 기록이 없으며, 
오리베가 1605년 이후부터 1615년에 적과 내통 혐의로 할복을 명령받아 죽을 때까지 시대적인 
정황상 오리베야키(織部燒)를 사용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자신의 영지(領地)였던 미노지방에서는 오리베 도자기가 1615년 이후 생산했으므로 
관련성을 부정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으로 최근까지 오리베의 관련된 자료가 별로 없었으나
 오리베가 우에다 무네개(上田宗箇)를 통해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사츠마야키 차이리에 대해 스스로의 왜곡의 취향을 언급한 서장(書狀)이 발견된 것이나 
교토의 후루타 오리베의 저택 흔적에서 오리베야키가 발굴되고 관련성이 밝혀지고 있으나 
신해년찻사발에 대한 관련 자료는 전혀 없다.

구로오리베 다완, 銘; 夏の雪,17세기 일본. 높이: 8.3㎝, 구경: 11.5~14.0㎝, 굽다리 외경: 6.8㎝

둘째는 오리베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의장에 관여하고 주문했다는 설로 당시 오리베는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하고 있었으며 특히 '오리베의 취향'이라는 유행어를 낳은 인물로 이미 
오리베도자기 생산에 깊이 관여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신해년찻사발은 오리베 의장의 영향하에 
주문됐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김해에서 주문 생산된 찻사발의 제작 연도가 1611년이고 오리베의 사망이 1615년으로 
그 사이 '오사카의 여름 전투' 등 일본 내 정변에 많이 관여했으므로 오리베가 찻사발 의장을 
디자인하고 주문을 실행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상기 학설에 대해 필자의 견해로는 1611년의 찻사발을 만들어 달라고 구청(求請)할 때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조선에서는 찻사발의 크기와 모양, 용도 등을 모르는 상황이므로 견본으로 
온 찻사발 중에 1605년 무렵부터 기후현 도키시(土岐市)에서 생산하던 소위 오리베류라고 하는 
찻사발이 견본 중에 같이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사례로는 1639년에 일본에서 왜관을 통해 다량의 찻사발 주문을 시작했던 
부산요(釜山窯)의 경우에도 처음부터 견본을 보내어 왔다. 
1639년 8월 16일 자 '세선응련등록(歲船鷹連謄錄)'에 의하면 "이번에 왜인(倭人)이 요구한 각종 
다완과 다구(茶具) 등 각기 그 모양의 견본을 가지고 와서 장인(匠人)과 백토(白土)와 
땔나무 등을 들여 주면 왜관 안에서 만들겠다고 말하거늘…" 이 기록 사례로 보아 1611년의 
찻사발 구청할 때에도 찻사발 견본으로 여러 가지 모양의 다구를 보내어 왔을 것이고 
그중에 일본의 기후현 도키시(土岐市)에서 생산하던 모양의 왜곡된 찻사발이 견본으로
들어왔을 것으로 생각되며 그 견본에 따라 김해 사기장(沙器匠)이 만들어 준 것이기에 
오리베의 관여는 없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보내온 견본의 모양과 크기는 알 수 없지만 일본에서 전해지고 있는 17세기에 제작했고 
명품 찻사발로 알려진 구로오리베다완(黑織部茶碗) '夏の雪'과 철화문신해년찻사발
(鐵畵文辛亥年茶碗)을 비교해 감상하면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으며 
화물다완(和物茶碗: 일본찻사발)에 대해 김해 사기장이 새롭게 해석해 철화문신해년찻사발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오리베찻사발의 형태는 다양하며 변형이 심하다. 
사진의 '夏の雪' 찻사발은 다른 오리베찻사발보다 모양이 단조로워 변화가 많지 않으며 흑색 
유약의 씌움이 정갈하고 기품 있는 찻사발이다. 
대부분의 오리베찻사발과 같이 빚음흙은 철분을 함유한 어두운 베이지색을 띠고 있으며 
신해년찻사발의 경우 백자흙을 기본으로 빚어서 유약이 씌워졌을 때 전체의 색조 분위기가 
다름을 볼 수 있다. 
가장 차이점은 오리베찻사발은 흑유(黑釉)를 씌움이 장식적이고 검은신해년찻사발의 경우 
철채(鐵彩)를 사용해 회화적으로 그렸다는 느낌을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다. 
오리베도자기의 경우 철채를 사용하지 않고 흑유로만 장식하는 공유된 미의식을 추구하는 것에 
비해 김해 사기장은 철채라는 채료를 바꿔 회화적으로 그리면서 예술에 있어서 지극히 
개인적이고 표현적이며 감성으로 그렸다. 
굽과 그 언저리 처리도 '夏の雪' 찻사발의 경우 단조롭고 변화가 작지만 '석양' 찻사발은 시각의 
변화를 설정시키는 공간감이 돋보이고 그 속에서 무위한 작위가 그릇 바닥 전체에 깔려 있다. 
그리해서 소위 오리베류의 찻사발을 견본으로 보내왔지만 김해의 사기장들은 환경과 재료의 
이질감 속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재창조해 다인들 사이에 신해년찻사발류를 유행하게 만들었다.
 - 글쓴이 조국영 도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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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찻사발 중 가장 유명… 日 국가 중요문화재 지정 - 경남매일

김해의 주문찻사발 중에 일본 다인(茶人)들에게 가장 유명한 찻사발(名碗)을 들라면 흰신해년찻사발(白御所丸茶碗)로는 \'고전고려(古田高麗)\'와 철화문신해년찻사발(黑御所丸茶碗)로는 \'석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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