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 이야기

당당한 파격미 넘어 6가지 다도 미학 품어

썬필이 2025. 2. 19. 10:21

당당한 파격미 넘어 6가지 다도 미학 품어 - 경남매일 - 2025.02.19
김해찻사발 맥 7
나눔굽찻사발(割高台茶碗) 대명물(大名物)
하타케야마 미술관 소장 중
백자계열 정선된 빚음흙 사용
소박·질박한 맛 표현해 흥미
제작기법 신해년찻사발로 이어져
간소·고고·자연 등 美 엿보여

나눔굽찻사발(割高台茶碗), 높이:9.0~9.6㎝, 구경:12.2~13.5㎝, 굽다리 외경:7.9~8.0㎝,

김해찻사발에는 1611년 신해년(辛亥年)에 일본에서 조선으로 주문해 김해사기장이 만들어줬던 
주문찻사발(御本茶碗)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전기 김해찻사발들이 있다. 
전기 김해찻사발은 고김해분청찻사발(古金海三島茶碗), 나눔굽찻사발(割高台茶碗), 
자름굽찻사발(切高台茶碗), 고김해찻사발(古金海茶碗) 등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이들 중에서 
빼어난 찻사발로는 하타케야마 미술관 소장의 나눔굽찻사발(割高台茶碗)이 유명하다.
나눔굽찻사발(割高台茶碗)이 일본 다회기(茶會記)에 수록된 최초 기록으로는
'무네일기(宗湛日記)'가 있다. 
1599년 2월 29일의 카미야 무네(神屋宗湛)은 혼자서 후시미(伏見)에 있는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의 저택에 초대됐고 그날의 상황을 무네(宗湛)는 다회에 쓰인 찻사발과 
도구류를 자세히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이때에 사용했던 찻사발이 김해에서 만들었다고 전하는 나눔굽찻사발이다. 
카미야 무네(神屋宗湛)는 당시의 하카다(博多)의 유명한 다인(茶人)이고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는 당시 주고쿠(中國) 6국의 고쿠다카 120만 5000석의 영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군의 제7진을 이끌고 경상도 점령을 담당해 부산 자성대 왜성을 
축성한 인물이며 '무네일기(宗湛日記)'는 당시의 차회 기록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으며 
일본에서는 4대 차회 기록 서책으로 알려져 있다.
나눔굽찻사발에 관련한 문헌기록으로는 도쿠카와(德川) 막부에 찻사발을 헌상(獻上)하는 
기록이 '덕천가어도구장(德川家御道具帳)'의 내용 중에 1659년 9월 5일조에 나눔굽찻사발을 
酒井宮內의 기록과 1665년 11월 15일에 土井大炊頭의 헌상 기록이 있다. 
그리고 1660년의 다도 도구류에 관련한 명물들을 1660년에 기록한 '완화명물기(玩貨名物記)에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 소장의 나눔굽찻사발을 비롯한 일곱 점의 나눔굽찻사발이 
명물로 등재돼 있다. 
또 1681년의 기록으로 '월후양삼하양어도구상도후목록(越後樣三河樣御道具相棹ㄶ目錄)'에는 
고려 나눔굽찻사발의 기록이 있다. 
위의 헌상 기록과 명물기 기록으로 보아 나눔굽찻사발은 당시에도 대단한 가치를 인정받은 
귀중한 찻사발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나눔굽찻사발(割高台茶碗)은 굽을 만드는 형식이 특이한 찻사발로 제사(祭事)에 사용하는 
향로(香爐)나 귀 달린 술잔(耳杯)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이며 굽다리(高台)를 2등분이나 
3등분 혹은 4등분으로 나눠 깎아 자른 찻사발로 김해지방에서 만들어졌다는 학설이 통설이다. 
그 기원은 청동기의 보나 궤, 향로(香爐) 삼족배(三足盃) 등 그릇의 굽다리 양식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제물을 담은 그릇들이 현생과 구분된 세계로 최상의 경건함과 공경을 나타내는
양식의 특징이 보인다. 
이 양식들이 민간의 제사의식으로 진화되면서 형식이 약화되거나 도태돼 간략한 상징성만 
남아 분청사기나 초기 백자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향로나 귀달린 술잔이 일본으로 건너가 찻사발로 변용되면서 
찻자리에 사용됐던 것으로 본다.

나눔굽찻사발(割高台茶碗), 하타케야마 미술관 소장, 중요문화재(重要文化財).

하타케야마 미술관 소장 김해 나눔굽찻사발(割高台茶碗)은 대명물(大名物)로 전해지며 
일본 정부의 중요문화재(重要文化財)로 등재돼 있다. 
옛 명품 찻사발을 다인들이 구별할 때 대명물(大名物), 명물(名物), 중흥명물(中興名物)로 
나눠 부른다. 
대명물 찻사발은 일본의 최고의 차인으로 추앙받는 센 리큐(千 利休) 이전에 사용됐던 명품 
찻사발을 대명물(大名物)이라고 부르며 대부분 일본의 국보(國寶)나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있으며 중국의 송(宋)나라 건요(建窯)를 중심으로 생산됐던 천목(天目) 다완이나 조선에서 
건너간 고려다완들 중에 명품 찻사발이 대부분으로 김해 나눔굽찻사발도
석 점이 대명물로 전한다. 
명물(名物) 찻사발은 센 리큐가 다인으로서 전성기를 누리던 1582년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할복 명령을 받아 죽음에 이른 1591년까지의 약 10년 간에 
사용했던 찻사발 명물(名物)이다.
이것은 대체로 임진왜란 이전에 건너간 고려다완과 일본의 모모야마(桃山) 시대에 만든 
찻사발로 일본의 전국 시대(戰國 時代)부터 아즈치 모모야마(桃山) 시대에 이르기까지 
간소하고 검약한 다도(茶道)에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와비차'의 행다법을 확립시킨 센 리큐 전성기에 접어들면서 찻사발에 대한 가치관도
시대적 변화의 흐름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중흥명물(中興名物)은 무장(武將)이면서 다인이었던 코보리 엔슈(小堀遠州)가 활약했던 
시기까지 선정되던 찻사발을 중흥명물(中興名物)이라고 한다.
이러한 분류는 다이묘(大名) 차인으로서 유명한 마츠에번(松江藩) 칠대 번주(藩主)였던 
마츠다이라 치고(松平 不昧, 1751~1818년)가 수집한 차 도구의 목록을 정리한
'운주명물장(雲州名物帳)'이나, 치고가 간행한 명물 차 도구들을 수록한 
'고금명물류취(古今名物類聚)'에서 분류했던 등급의 명칭으로 오늘날에도 찻사발의 
품격과 가치의 기준점이 된다.
그리고 일본의 중요문화재(重要文化財)는 우리나라의 보물(寶物) 등급에 해당하는 
국가유산으로 영구히 보전되고 있다,
하타케야마 미술관 소장 김해 나눔굽찻사발(割高台茶碗)은 다른 찻사발에 비해 키가 높고 
사발형(碗形)이며 무게가 465g으로 찻사발로는 무거우며 찻사발의 무게 중심이 그릇 아래로 
치우쳐져 있지만 당당하고 호쾌하며 남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찻사발이다.
찻사발의 빚음흙은 약간의 철분을 함유한 백자 계열의 곱게 정선된 흙으로 이 시기의 지방 
가마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빚음흙으로 빚었다. 유약은 광택이 있고 잔잔한 빙열(氷列)이 
많은 것으로 보아 재(灰)나 석회성분이 많은 분청사기 유약으로 보이며 약한 환원불로 
담청색 회백색이 어우러진 백자 찻사발이다. 
유약의 씌움은 두터운 편이고 시유할 때 손자국과 긁힘 흔적은 지방 민요(民窯)의 소박하고 
무기교의 질박한 맛을 표현하고 있어 흥미롭다. 
구연부 일부에 걸친듯한 두껍게 발려진 백색을 띤 유약에는 유주름으로 갈라져 있고 두어 
군데 검게 물든 사용흔이 매력적이다.
구연(口緣)의 입술은 둥글게 만들어 바깥으로 외반시켜 한 면을 넓은 타원형으로 찌그려뜨려 
양쪽의 찌그린 변에 돌기 모양의 상처가 두 군데 보인다. 
이 흔적은 찻사발로 사용하기 이전에 향로로 만들어졌던 것으로 일반 서민들이 사용했던 
뚜껑이 없는 무개향로(無蓋香爐)로 위로 솟은 손잡이 부분을 떼내어 제거한 흔적이 있다. 
그 결과 떼낸 부위에는 유약이 없으며 돌기만 남아 있다. 이러한 흔적은 향로가 찻사발로
변용되는 과정의 특징일 것이다. 
당시 일본의 다인들은 이렇게 귀중한 애장품인 향로에서 찻사발로 사용하기에 알맞은 
크기와 품격을 발견하고 찻자리에 사용했던 것이다.

높이:9.0~9.6㎝, 구경:12.2~13.5㎝, 굽다리 외경:7.9~8.0㎝, 굽 높이:2.0㎝~2.3㎝

찻사발 내면에는 구연부의 타원을 따라 형상을 깊게 담아내고 그 아래로 한 개 선의 
물레자국(內低圓角)이 있으며 이것은 조선의 사기장(沙器匠)들의 습관으로 은연중에 나타난 
흔적으로 보인다. 
당시 그 시대의 사기장들은 생활식기를 만들 때 그릇 안쪽 저변부에 원을 두르는 양식의 
식기를 제작했고 식기 외의 다른 종류의 기물에서는 시문하지 않으나 이 찻사발은 애초에 
향로였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옅게 시문한 흔적이 보인다. 
그 원 안으로 차고임 자리가 크고 옅게 자리하고 있다.
바깥면은 구연 아래에 유약이 두꺼운 부분은 유말림 현상이 일어나 있고 그 아래로 약한 
물레자국이 보여 찌그러진 몸체와 공간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찻사발의 몸통 아랫부분과 허리 부위는 칼로 성글게 모잽이쳤으며 이러한 기법은 훗날 
김해의 주문찻사발로 이어져 신해년찻사발(御所丸茶碗)의 중요한 표현 기법으로 이어진다.
이 찻사발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굽다리(高台) 부분으로 나눔굽찻사발(割高台茶碗)이란 
명칭도 굽의 양식이 특별해 붙여진 이름이다. 
굽은 높고 크며 매우 두껍게 만들어진 굽으로 굽깎이 할 때 물레에서 크게 깎은 다음 굽다리
외부를 칼로 얇고 드문드문 친 모양이다. 
이 기법도 훗날 신해년찻사발(御所丸茶碗) 제작에 영향을 끼친 깎음이다. 
통으로 깍은 굽다리를 바깥에서부터 4등분으로 나눠 굽 중심을 향해 쐐기꼴로 깎았으며 
남은 부위를 굽바닥에서 十자로 둥글게 파내었다. 
이러한 기법은 파격적으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김해 찻사발의 고유 양식으로 남아 있다. 
이 찻사발에 대한 또 하나의 독특한 점은 찻사발을 만든 후 애벌구이를 하지 않고 유약을
씌운 후에 바로 재벌구이를 했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그 이유로는 굽 외면을 4등분으로 분할해 깎은 면에 일부의 유약 씌움의 흔적을 볼 수 있지만 
굽바닥에 둥글게 十자로 파낸 부분에 유약을 먼저 바르고 파낸 흔적이 보이는 것으로 두 부분에 
노출된 빚음흙의 색상이 약간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흙의 표면이 시간에 따라 산화 정도에 따라 색상이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빚어진 찻사발에 우선 4등분으로 나눈 쐐기꼴의 굽다리를 만든 후 말려서 애벌구이를 
하지 않고 유약을 씌운 후에 재벌구이를 하려고 했으나 이 찻사발의 굽 부위 두께가 너무 두꺼운 
관계로 불 속에서 폭발하거나 갈라지기 쉬우므로 가장 두꺼운 굽바닥 부분을 유약이 씌워진 
상태에서 둥글게 十자로 파내어서 재벌구이해 완성한 찻사발이 아닐까 생각한다.
굽바닥의 고임눈은 여덟 개의 커다란 고임눈 자국의 흔적이 있으며 알갱이가 있는 
내화토(內貨土) 고임으로 보인다.
굽의 양식에 있어서 나눔굽(割高台)과 자름굽(切高台)의 차이는 나눔굽은 굽다리 부분을 칼로 
깎을 때 확실하게 구분되도록 굽바닥까지 2~4개로 분할해 굽을 만드는 방식이고, 
자름굽은 굽다리 부분을 칼로 단순하게 잘라내는 방식으로 1~4개로 잘라내는 것이 보통이다. 
이 나눔굽찻사발은 후루다 오리베(古田 織部)가 소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찻사발의 
가지고 있는 변용의 미가 오리베의 영향하에 있었다고 알려진 오리베류 찻사발의 파격미와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남겨두기로 해야겠다. 
이 찻사발을 보관하는 바깥 상자 안쪽 면의 상서(箱書)에 '이휴백회이용ユ'라고 쓰여져 있으나 
'리휴백회기'에는 기록돼 있지 않으며 센 리큐(千 利休)가 이 찻사발을 사용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 찻사발의 가치에 관련한 일화로 1940년 6월에 나눔굽찻사발이 경매의 매물로 나왔는데 
파격적인 가격으로 낙찰됐으며 그 가격이 20만 엔으로 당시 은행원의 초임 보급이 100엔에 
못 미치는 시절임을 감안하면 가치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찻사발은 비록 향로에서 찻사발로 변용됐지만 히사마츠 신이치(久松眞一)가 이야기하는 
다도의 미학으로 불균제(不均齊)와 간소(簡素), 고고(枯高), 자연(自然), 유현(幽玄), 
탈속(脫俗)의 여섯 가지 덕목(德目)을 모두 갖춘 찻사발이라 하겠다.
김해 나눔굽찻사발(割高台茶碗)의 생산지는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으며 시대적 상황으로 봐서 
분청사기와 백자를 병용해 구운 가마터로 생산됐다고 여겨지며 김해지역에서 상기 조건에 
부합되는 가마터로는 김해 동상동 분청사기 가마터와 김해 상동면 대감리 분청사기 
가마터를 들 수 있다.
동상동 분청사기 가마터는 동상초등학교 인근으로 김해(金海)명 명문 분청사기편이 발견됐던 
매우 중요한 가마터였으나 주변의 도시화로 흔적을 찾아보기 힘드나 香本不若治의 저서 
'조선의 도자 고요지(朝鮮の陶磁と古窯址)'에서 여섯 점의 백자편을 소개하고 있으나 
나눔굽찻사발과는 관련짓기 힘들고 다만 김해땡땡이(金海堅手)와 유사한 파편이 
수습됐다는 기록이 있다. 
대감리 분청사기 가마터는 경질백자와 연질 백자 파편이 수습되고 있으나 나눔굽찻사발과
같은 잔 빙열(氷列)이 많은 파편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난 2016년 상동 분청사기 
가마터 유적에 대한 긴급발굴조사를 했으며 결과에 대한 발굴보고서에 기대를 해봐야 하겠다. 
- 글쓴이 조국영 도예가
당당한 파격미 넘어 6가지 다도 미학 품어 - 경남매일 (gnmaeil.com)

 

당당한 파격미 넘어 6가지 다도 미학 품어 - 경남매일

김해찻사발에는 1611년 신해년(辛亥年)에 일본에서 조선으로 주문해 김해사기장이 만들어줬던 주문찻사발(御本茶碗)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전기 김해찻사발들이 있다. 전기 김

www.gn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