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 전면에 호쾌함·당당한 품격 그대로 담겨 - 경남매일 - 2025.03.18
양산찻사발 맥 1
창기찻사발(伊羅保茶碗) 옹(翁)
동면 법기리 창기마을서 국가사적 100호 지정·보호
유약 밑 붉은 베이지색 황혼, 백토 귀얄시문 수염 연상
흙 입자 갈라짐·튀어짐 '석폭 현상', 굽안자리 칼주름 은은
바깥 뻗은 낮고 처진 죽절 형상 명료… 중앙 돌기 솟아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전에 전래됐던 전기 고려찻사발(高麗茶碗)은 대부분 생산지나 유통
경로를 모르지만 일본으로 건너가 다도 문화에 큰 변화를 줬고 왜란 이후는 끊어진
찻사발의 수급을 위해 대마도(對馬島)를 통해 조선 정부에 구청(求請)하게 됐다.
후기 고려찻사발(高麗茶碗)은 1611년 김해찻사발과 1639년 이후 79년 간 부산요(釜山窯)를
통한 주문찻사발이 만들어졌으며 밀무역과 사무역이 뒤섞인 역관(譯官)을 통한 무역
찻사발 형식의 양산 법기리 가마의 생산품이 공급됐다.
후기 고려찻사발은 생산지가 분명하고 부산요와 법기리(法基里) 가마에서 만들어진
찻사발이 박물관이나 개인 소장품 등으로 남아있는 수량이 가장 많으며
지금도 다회에 사용하거나 유통되고 있다.
법기리 가마에서 생산됐던 찻사발을 일반적으로 판사다완(判事茶碗) 혹은 반사다완(半使茶碗)
이라고 부르며 판사는 조선과 일본 간의 외교와 무역업무를 담당하는 통역관으로 일본에서
높여 부르는 존칭이다.
이 들이 통신사(通信使) 수행이나 문위역관(問慰譯官)으로 일본으로 건너갈 때 법기가마의
찻사발을 선물이나 밀수출하거나 강매했으므로 판사가 가지고 왔다 해서
판사다완이라고 불렀다.
부산요에서 시간과 공간의 한계로 생산이 곤란할 경우 법기가마에 주문도 했으며 부산요와
구별해 부를 때 외요다완(外窯茶碗)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외에도 조선인이나 일본인이 밀수 행위로 압수한 찻사발을 발하다완(拔荷茶碗)이라고 했다.
왜관이 두모포에서 초량왜관으로 이관한 후에 1681년에 수장고의 도자기 재고 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내용을 기록한 장부로 대마도 종가문서(宗家文書) 중에
'신도소물어인판장(新渡燒物御印判帳)'이 있으며 역대 도공두(陶工頭)별로 재고 품목과 수량과
법기가마에서 생산됐다고 추정되는 도자기들이 수록돼 있다.
이러한 재고조사는 역관의 밀매와 강매에 의한 현황을 파악하고 그 폐단을 막기 위한
대마번의 조치로 전체 재고량 3만 5496점 중에서 부산요에서 생산한 도자기의 수량
9160점보다 법기리 가마에서 만들어졌던 도자기가 2만 6366점으로 압도적으로 수량이
많은 것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법기리 가마에 주문해 외수(外手)로 기록한 도자기의 수량이 모두 227개로 다른 품목에 비해
적은 수량이나 찻사발 종류별로 주문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진상품도 만들었다.
부산요가 조선 조정의 지원이 끊어진 1718년 이후에도 여러 번의 외수다완의 거래 기록이 있다.
밀수품 다완(拔荷茶碗)은 383점으로 따로 항목을 뒀고 역관이 가지고 온 판사 도자기는
2만 3536점으로 매우 많은 수량이 역관을 통해 매매 또는 강매됐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672년 임자년(壬子年)에 들여온 다완과 향로의 거래를 별도로 기록했고 당시 4261개의
도자기가 9년이 지난 재고 수량이 1628점만 남아있어 소비된 수량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678년 무오년에 들여온 찻사발과 향로를 기록했고 당시에 들여온 수량은 알 수
없으나 3년 후 재고량은 4125점으로 기록하고 있다.
법기리 가마는 양산시 동면 법기리 창기(昌基)마을에 있으며 현재 국가사적 100호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법기리 가마에서 만들어진 찻사발을 일본에서는 크게 판사다완(判事茶碗)과 오기다완
그리고 이라보다완(伊羅保茶碗)으로 나눴다.
이를 우리말로 바꿔 본다면 판사다완의 판사는 역관을 가르킴으로 역관찻사발로 부르고
오기다완은 탕기에서 따온 말로 보고 탕기찻사발로 부르며 이라보다완은 한국과 일본의
독음이 똑같으나 관련성을 찾기 힘들고 본래의 뜻은 알 수 없으나 이라보는 '이라이라'에서
나온 일본어의 의태어로 피부가 사마귀 같은 돌기가 돋아나 거칠거칠한 모양에서 찻사발
표면이 거친 느낌을 갖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본다.
그러나 법기리 가마가 있는 창기마을의 이름을 따서 창기찻사발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한다.
따라서 법기리 가마에서 만들었던 고이라보(古伊羅保)는 옛창기찻사발로 정조이라보
(釘彫伊羅保)는 깎음선창기찻사발로, 황이라보는 누런창기찻사발로, 편신체이라보
(片身替伊羅保)는 나눔창기찻사발로 부르기로 한다.
창기찻사발(伊羅保茶碗) 옹(翁)은 조선 중기 지방 가마에서 생산했던 식기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발(鉢)형 찻사발이지만 그릇 전면에 나타나는 호쾌하고 절제된 당당함은 깊은
찻사발(井戶茶碗)에 못지않은 품격을 가지고 있다.
빚음면과 깎은 면이 분명하고 구연부의 자유분방함과 다른 찻사발에 비해 낮은 굽이지만
바깥으로 벌어지면서 단순하고 명료하게 깎은 죽절굽과 바깥 면에 박혀 있는 작은 돌들이
이 찻사발이 가지고 있는 아취(雅趣)이면서 매력이다.
이 찻사발의 이름이 옹(翁)이라고 붙여진 것은 찻사발 전면에 씌워진 회청색 유약 아래로
비쳐지는 붉은 베이지색이 황혼을 떠올리게 하고 찻사발 내면에 백토로 귀얄시문을 한
그 모습이 바람결에 흩날리는 노인(老人)의 수염을 연상시키므로 얻어진 이름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찻사발의 빚음흙은 철분을 함유한 정선되지는 않았으나 내화성이 있는 도토(陶土)로
작은 알갱이의 잡석(雜石)이 섞여 있으며 이러한 요소들은 재료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재질의 미를 표현해 준다.
유약은 재의 성분이 많이 함유한 토회유(土灰釉)로 환원불에서는 탁한 회청색을 띠나
산화불에서는 노랗거나 붉은 베이지색을 띠며 두껍게 씌우면 어두운 녹갈색으로 나타난다.
토회유는 옹기유의 기본으로 학자들에 따라 이유(飴釉), 니유(泥釉)라고 부르기도 하고
고려 시대 초기 녹청자 제작에도 사용됐으며, 조선시대에서는 일부 분청사기 가마에서도
사용됐고 석기 계열의 오지그릇이나 토관 등을 만드는 데 유약으로 사용했다.
구연은 사발을 지을 때 무심히 뽑아올린 구연 부위를 예쇠나 날실로 자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내버려뒀고 적갈색으로 둥글게 감싸듯 마무리해 찻사발 입술이 두터워진 창기찻사발
(伊羅保茶碗) 특유의 조형성을 볼 수 있다.
그 결과 구연 아래 물레선이 한두 줄 남아 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구연이 비뚤어지고
왜곡돼 있고 그 아래로 유약을 씌울 때 여분의 유약이 두껍게 흘러내려 어두운 녹갈색이
구연부에 걸리듯이 씌워져 자연스런 변화가 재미있다.
찻사발 내면은 구연부를 젖갈로 마무리할 때 생긴 물레선 이외는 선의 흔적이 없이 깔끔하게
정리돼 기벽을 따라 내려갔으며 차고임자리는 완만해 평저(平底)에 가깝다.
내벽 아래로부터 구연을 향해 감기듯 백토 귀얄질을 힘차게 붓질했고 그 위로 다시 사선으로
겹쳐 귀얄질을 했다.
두 번의 귀얄질에서 표현돼 나타나는 결과는 한 번은 붓질의 마무리 행위 속에 휘날리듯
삐침이 있었고 다음 붓질은 흐르듯 그어 나갔다.
이러한 표현은 찻사발 속에서 흰 수염을 휘날리는 노인의 얼굴을 봤던 것이다.
그리고 창기찻사발 계열의 전체를 살펴봐도 귀얄질은 한 번에 그치고
두 번으로 반복한 예는 드물다.
바깥 면은 내면과 다르게 창기찻사발 특유의 거침과 변화가 많다.
산화와 환원 불꽃이 반복돼 나타나는 붉은 베이지색 바탕의 빚음흙 위로 녹회색 유약이
불그림자에 따라 부분부분 비쳐지고 있다.
몸통 주변을 돌아가면서 가는 물레선을 볼 수 있고 표면은 도토 속에 섞여 있는 흙의
입자들이 불거져 나와 거칠고 메마르다.
특히 빚음흙에 섞여서 찻사발 표면에 박혀있는 작은 돌들이 물레질 방향에 따라 틈새를
만들면서 울퉁불퉁하게 박혀있고 이들이 불 속에서 팽창해 삐쳐 나오거나
폭발한 듯 갈라지고 튀어나온 모양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창기찻사발에서는 흔하게 보이는 기법으로 다도에서는 석폭(石爆)이라고
하며 귀중하게 여기고 있다.
석폭 현상은 돌의 재질에 따라 내화도가 약한 돌은 녹아 흐르거나 물방울처럼 맺히고
규석(硅石)이나 납석(蠟石) 성분의 돌은 팽창해 솟아오르며 돌 속에 함유돼 있는
성분에 따라 갈라지거나 폭발하기도 한다.
찻사발 몸통 아래로 깎음 새가 분명해 몸통과 각을 이루고 깎인 면은
녹회색에 묻혀 더욱 거칠다.
깎인 부위에는 시유할 때 난잡하고 천진스러운 행위의 손자국을 볼 수 있고
주변 유약의 핀홀이 조화롭다.
굽도리는 창기찻사발 특유의 바깥으로 뻗은 낮으면서 처진 죽절(竹節) 형상이 분명하고
굽안자리 중앙에는 돌기가 솟아 있다.
창기찻사발의 굽깎음은 일반적인 굽깎이 칼을 쓰지 않고 대나무를 휘어서 묶은 대칼을
사용했고 깎인 모양이 대나무 칼의 둥근 모양과 같으며 깎을 때 물레의 회전을 천천히
약하게 해 굽안자리 전면에 칼주름이 생겼다.
굽바닥과 굽안자리는 유약이 시유되지 않아 굽바닥은 빚음흙이 적갈색이나 두 군데 유약이
걸리듯 작게 내려앉아 있으며 굽안자리는 찻사발 사용흔으로 다갈색으로 변했으나
칼주름의 돋은 산이 적갈색으로 은은하게 비친다.
창기찻사발(伊羅保茶碗)의 다회기에 최초 출현은 1659년 9월의 강잠다회기(江岑茶會記)에
의하면 사용했던 찻사발이 '고려이라보(高麗伊羅保)'로 기록돼 있다.
창기찻사발(伊羅保茶碗) 옹(翁)과 같은 찻사발을 일본에서는 고이라보(古伊羅保)라고
부르는데 대개는 찻사발을 보관하는 상자에 쓰여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당시의
분류법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대해 '古'자의 쓰임이 시기적으로 이전의 것이라고 정의해 엄밀히 사용하지
않은 상황에 대해 일본의 학자들 중에는 법기리 가마나 부산요에서 만들었으나
옛것이 아니므로 시간이 지나면서 낡아 보이는 변화에 의한 명칭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시간에 대한 해석으로 찻사발의 본질적인 감성은 도외시했다.
당시의 다인들은 녹청자나 주광청자(珠光靑磁) 등과 일본의 전통 도기 중에서 재(灰)가
날아와 쌓여서 어두운 녹색으로 녹은 잡기(雜器)에서 느낄 수 있는 감성적인 해석을 했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의 명칭은 아니라고 본다.
창기찻사발에 사용했던 토회유(土灰釉)의 원료 생산지의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에서 산출되는
흑약토(黑藥土)를 주목 해볼만하다.
흑약토는 옹기유약의 주된 원료로 재와 섞어서 사용한다. 여기에 물토나 장석을 첨가해
조절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대석리 약토는 조선시대부터 유명했으며 일제 강점기 이후까지 경상도 일원의 옹기가마에
공급했고 용융 온도가 낮아서 당시에는 매우 선호했다.
창기찻사발(伊羅保茶碗) 계열의 유약 조성에 효과가 있으며 지리적으로도 인근 지역이므로
법기리 가마에서도 사용되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글쓴이 조국영 도예가
그릇 전면에 호쾌함·당당한 품격 그대로 담겨 - 경남매일 (gnmaeil.com)
그릇 전면에 호쾌함·당당한 품격 그대로 담겨 - 경남매일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전에 전래됐던 전기 고려찻사발(高麗茶碗)은 대부분 생산지나 유통 경로를 모르지만 일본으로 건너가 다도 문화에 큰 변화를 줬고 왜란 이후는 끊어진 찻사발의 수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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