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 이야기

일본 최고 차인 사용했던 나가츠카나눔굽찻사발 유명

썬필이 2025. 3. 5. 10:16

일본 최고 차인 사용했던 나가츠카나눔굽찻사발 유명 - 경남매일 - 2025.03.05
김해찻사발 맥 8
나눔굽찻사발(割高台茶碗) 나가츠카 대명물(長束 大名物)
도요토미가 선물로 측근에 줘
당대 최고 다인들 귀중히 사용
'수리가 가장 아름다운 찻사발'
향로로 사용 … '웅천형' 가까워
시절·세월 머금은 고고미 보유

나눔굽찻사발(割高台茶碗),대명물(大名物). 높이: 8.5㎝, 구경: 12.8~15.3㎝, 굽다리 외경: 6.6~6.9㎝.

고려(高麗) 말과 조선(朝鮮)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발들이 찻자리에 수용되면서 
고려찻사발(高麗茶碗)이라고 부르게 됐다. 
이 사발들을 일본의 다인(茶人)들이 개인이나 차회(茶會)에서 사용하면서 특성에 따라 분류해 
고유의 형식에 따른 이름을 붙였다. 
고려찻사발을 크게 분류하면 굽의 모양에 따른 나눔굽찻사발(割高台茶碗), 시대(감꼭지 모양)
찻사발 등을 비롯해 지명(地名)에 따른 김해(金海), 웅천(熊川), 회령(會寧), 고려(高麗) 등의 
찻사발이 있고 모양에 따라 나눈 오기(吳器<五器>), 정호(井戶: 깊은 사발), 편구(片口; 귀 사발), 
염사(鹽司 소금단지) 등의 찻사발이 있다. 
찻사발의 표면 장식에 따른 운학(雲鶴), 귀얄(刷毛目), 덤벙(粉引), 
광언고(일본의 가부키 배우 바지 문양으로 국화문), 회고려(繪高麗) 등의 찻사발이 있다. 
또 찻사발 표면의 상태에 따른 이라보(伊羅保; 까실까실하게 표면이 일어난 표면), 
옥자수(玉子手; 계란색), 교맥(蕎麥; 메밀가루 뿌린 듯 점점이 박힌 표면), 
우루(雨漏; 비가 스민 듯한 얼룩), 견수(堅手; 단단하게 보이는) 등의 찻사발이 있고, 
일본으로 가지고 간 사람과 배에 따른 이름으로 판사(判事; 역관을 일본에서 부르는 존칭), 
어소환(御所丸; 조선과 일본 간의 무역선이라고 주장하는 배) 등의 찻사발이 있으며 
센 리큐(千 利休)가 어물전에서 발견한 어옥(魚屋; 어물전) 찻사발로 분류했다. 
그리고 임진왜란 후 왜관 내 부산요(釜山窯)에서 만든 찻사발의 이름으로는 일본에서 
그림이나 견본을 보내와 주문한 어본(御本) 찻사발과 당시 부산요의 총괄 관리자였던 
도공두(陶工頭)의 이름을 딴 현열(玄悅), 무삼(茂三), 미평태(彌平太) 등의 찻사발로 나눴다. 
그밖에 미시마(三島)라는 이름의 찻사발은 시즈오카현 미시마시에 있는 
미시마신사(三島神社)가 발행하고 있던 달력의 문양과 닮은 데서 유래됐다는 설과 
거문도(巨文島)의 세 개의 섬 등 여러 학설이 분분하나 현재의 일본 도자사학자들은 
미시마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분청사기(粉靑沙器)로 고쳐서 쓰고 있지만 일본의 
다도계에서는 아직도 미시마(三島)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실정이다. 
그리고 일본에서 사용하는 찻사발의 명칭이 명확한 기준이 없이 긴 세월 속에서 전해 오면서 
근거가 희박하거나 왜곡되고 의태어 중심의 언어를 선택해 왔음을 알 수 있으며 오늘날 
우리의 찻사발에 대해 뒤돌아보면 반성과 새로운 언어 정립이 필요하다.
김해에서 생산됐다고 알려진 나눔굽찻사발(割高台茶碗) 중에서 하타케야마 미술관 소장의 
나눔굽찻사발과 쌍벽을 이루는 찻사발로 효고(兵庫) 현 고베(神戶)시에 있는 
카유끼(香雪) 미술관 소장의 나가츠카 나눔굽찻사발(長束 割高台茶碗)이 유명하다.

나눔굽찻사발(割高台茶碗), 명(名) 나가츠카(長束), 카유끼(香雪) 미술관 소장,

이 찻사발은 일본 최고의 차인으로 추앙받는 센 리큐(千 利休)가 전성기(1582~1691) 이전에
사용했던 찻사발을 분류해 부르는 대명물(大名物)로써 나가츠카 마사이에(長束正家)가 
소장했으므로 나가츠카나눔굽(長束割高台)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나가츠카나눔굽(長束割高台) 찻사발은 매우 특별한 이력을 가진 찻사발로 일본의 유명한 
무장(武將)들이 사랑한 찻사발이며 기후플라스틱공업주식회사 소장의 나눔굽찻사발과 함께 
무가(武家) 다도에 많이 사용됐던 찻사발이다. 
일설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후루다 오리베(古田織部; 1543~1615)을 
조선으로 출병시켜 찻사발을 구해오라고 명했고 오리베가 김해지방에서 구했으며 귀국 후 
히데요시에게 헌상했다고 하는 설이 있으나 다도 사학자들 사이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설로 부정적이다. 
하여간 기록으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소장했으며 히데요시의 최측근으로 다섯 명의 
봉행(奉行) 중에 한 명이었던 나가츠카 마사이에(長束正家; ?~1610)에게 줬던 찻사발로 
나가츠카나눔굽(長束割高台)찻사발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던 것이다.
나가츠카 마사이에(長束正家)는 아즈치(安土) 모모야마(桃山) 시대의 무장으로 165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부름을 받아 행정 우료로 활약했다. 
1592년에는 히젠(肥前) 나고야성과 1594년에는 후시미성의 공사를 분담했고 
오미의 미즈구치(水口城) 성주로 석고가 5만 석이었으며 이어서 12만 석으로 가증돼 
종사위에 서임됐다. 
1598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으로 5봉행(五奉行)의 일원이 돼 재정면에서 활약했고 
성을 축성하거나 토목하는 것에 능했다. 
1600년 세키케하라의 전쟁에서는 서군(이시다 미츠나리계)에 속했고 이세(伊勢)에 출진해 
아노즈성(阿濃津城) 공격에 참가했다. 
서군의 패배를 듣자 미즈구치성(水口城)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동군의 이케다 나가요시(池田 長吉)에게 공격받아 39세의 일기로 자결했다.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의 전초 기지였던 히젠의 나고야(名護屋)성과 후시미성의 축성에 대한 
공로로 나가츠카나눔굽(長束割高台)찻사발을 줬다고 여겨진다. 
일본에서 이전부터 고려찻사발은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했으며 젠고쿠시대(戰國時代)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나 히데요시 등의 무장들은 휘하 무장들의 공로에 대한 포상을 
고려찻사발로 했던 기록이 있고, 또 회유나 맹약을 할 때나 잘못에 대한 사죄와 복속의 
의미로도 찻사발을 이용했으며 이러한 행위는 고려찻사발에 대한 가치를 높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마사이에(正家)의 죽음으로 가산은 동군에 의해 몰수됐고 나가츠카나눔굽 찻사발은 마사이에의 
본거지였던 미즈구치성(水口城)을 공격해 함락시킨 동군의 이케다 나가요시(池田 長吉)에게 
포상으로 나가츠카 나눔굽찻사발을 줬다. 
그러나 다시 도쿠가와(德川) 막부로 들어간 나가츠카 나눔굽찻사발은 에도 중기의 
다이묘(大名) 다인으로 차회기 '유호일기(逾好日記)'의 저자로 유명한 히메지(喜路) 번주였던 
사카이 소나(酒井 宗雅)가 소장했다. 
그러다가 이 찻사발은 에도 시대의 대표적인 다인(茶人)으로 이즈모(出雲) 마쓰에번(松江藩) 
제7대 번주 마쓰다이라 후마이(松平 不昧; 1751~1818)가 애장했으며 그의 차세계였던 
후마이류(不昧流) 다도는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이후 찻사발은 아사히(朝日)신문사 창업주 무라야마 류헤이(村山龍平)가 수집해 1972년에 
문을 연 카유끼(香雪)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나가츠카 나눔굽찻사발은 무장(武將) 다인들을 비롯한 당대 최고의 다이묘(大名) 다인들이 
귀중하게 다뤘던 명품 찻사발이지만 이름 모를 김해 사기장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작행(作行)과 대별돼 씁쓸하고 고적한 무상함이 남아있다.
김해찻사발인 나가츠카 나눔굽(長束割高台)찻사발은 구연(口緣)이 왜곡된 모양으로 향로로 
사용했던 것이며 사발형(碗形)이나 웅천형(熊川形)에 가까운 찻사발로 김해 나눔굽찻사발의
 특징이 잘 나타나 활달하고 남성적이며 명료하다. 
여러 다인들의 손을 거치면서 여러 개 조각으로 깨어져서 옻칠로 수리한 흔적이 보이지만 
다도의 세계에서는 찻사발을 보수하고 수리한 흔적들도 감상 안에 포함되며 나가츠카
나눔굽찻사발은 가장 수리가 아름다운 찻사발로 알려져 있으며 시절과 세월을 머금은
찻사발의 고고미(枯高美)를 느끼게 한다. 
찻사발의 크기는 키가 높으며 굽다리도 높아 호쾌하다.
찻사발의 빚음흙은 약간의 철분을 함유해 초기 민요(民窯)백자로 약간 잿빛을 띠고 있으며 
수비(水飛)해 정선된 흙으로 빚었다. 
유약은 이 시기의 지방 가마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한 분청사기(粉靑沙器) 계열의 잿물 유약으로 
고르게 씌웠으며 약한 환원불에 의한 찻사발 표면의 담청색을 띤 투명한 유색으로 빚음흙의 
백색이 비쳐 나오고, 유약의 광택이 은은하게 있으며 잔잔한 빙열(氷列)이 보인다. 
이 시기의 도자기들은 회청사기에서 백자로 넘어가는 전환기로 경상도 지방에서는 
백토(白土) 빚음흙의 내화도에 따라 연질(軟質)백자와 경질(硬質)백자 사이의 과도기적인 
백자가 생산됐으며 김해찻사발의 경우 완전한 경질백자는 아니지만 경질에 가깝다.
구연(口緣)은 바깥으로 외반했으며 타원으로 찌그러뜨렸다. 나눔굽찻사발의 특징은 원래의 
용도가 향로(香爐)였기에 두 군데의 손잡이 부분을 떼어내고 찻사발로 사용한 흔적이 
이 찻사발에도 남아 있다. 
손잡이 부분을 중심으로 사발 몸통을 눌러서 찌그러뜨렸으며 굽 언저리에 모를 쳤다. 
이러한 작위(作爲)로 인해 나눕굽찻사발을 '김해사각다완(金海四角茶碗)'이라고 보관 상자에 
찻사발 이름을 쓴(箱書) 예도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뤄봐서 후루다 오리베(古田織部; 1543~1615)의 지도에 의한 변화와 왜곡이 
심한 오리베야끼(織部燒)의 답형다완(畓形茶碗)의 원류가 김해의 나눔굽찻사발(割高台茶碗)
이라고 할 수도 있으며 신해년(1611)에 주문찻사발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후루다 오리베가 당시에 소장했다고 전해지는 나눔굽찻사발로는 
하타케야마 미술관 소장 김해나눔굽찻사발이 좋은 예일 것이다.
찻사발 내면은 깊게 내려앉아 있으며 기면에 약한 물레선이 보이고 중앙의 차고임 자리는 엷다. 
바깥면은 구연 아래 손잡이를 뗀 두 군데 흔적의 돌기가 있고 가는 물레선이 걸린 듯이 아래로
약하게 선이 둘러져 있다. 
찻사발 몸체 아래로 유연하게 곡선을 이루고 허리 아래로는 무심히 모잽이 칼질을 해 몸통과 
허리를 나누는 각이 분명해 찻사발의 강건한 힘을 느낄 수 있다.
찻사발의 굽도리(高台)는 물레로 통굽을 만든 후 굽 바깥면에 모를 치고 十자로 힘 있게 
나눠 잘라냈다. 
자른 단면이 하나는 수직으로 잘라내고 또 다른 단면은 사선으로 깔끔하게 자른 작위는 표현의 
변화가 있고 등분돼 있는 네 개의 굽 크기와 모양이 각각 다르게 만들었으며 무절제 속에서도 
다도에서 말하는 시각적으로 불균제(不均齊)의 미가 표현돼 있다. 
네 개의 굽바닥 면은 유약을 완전히 닦거나 긁어내어 소성했으며 그 부위에 찻물에 의한 
사용흔으로 암갈색으로 변해 있다. 
굽 주변과 자른 굽 안 부분도 정리되지 않은 칼자국의 난삽함이 있고 시유 할 때 손자국과 
긁힌 흔적들이 힘 있게 잘라진 굽다리와 강하게 대비돼 변화가 재밌다.
이밖에 나눔굽찻사발 중에는 오사카(大阪)에 있는 후지타(藤田) 미술관 소장의 굽다리가 
세 개로 나눈 찻사발도 있으며 사카다시(酒田市)에 있는 혼마미술관 소장의 나눔굽찻사발처럼
 17~18세기의 부산요(釜山窯)나 양산의 법기리가마에서 생산됐다고 여겨지는 후기 
김해 나눔굽찻사발도 있고, 대부분 찻사발 구연(口緣)부에 제기의 손잡이 흔적이 없고 
남성적인 기백이 약하다.
일본에서도 나눔굽찻사발을 모방한 찻사발이 큐슈의 사가(佐賀)현 지방의 가라츠(唐津)가마와 
야마구찌(山口)현의 하기(秋)가마를 중심으로 피납된 조선계 사기장들의 찻사발에서도 
작풍을 볼 수 있고 오늘날에도 많은 작가들이 그 기법을 응용하고 있다.
나눔굽찻사발의 특징은 튼튼하고 강한 굽다리와 찻사발 허리 아래의 무심한 모잽이 칼질 속에 
한 칼로 나눠 놓은 자른 굽의 면들이 일본의 사무라이와 무장(武將)들을 매혹시켰고 
다이묘(大名) 다인에게 사랑받은 찻사발이다. 
그렇게 하면서 구연부의 떨어진 손잡이의 흔적과 애수에 찬 듯이 찻사발 전면에 감도는 유약의 
경색(景色), 찻사발 몸체로부터 아래로 내려온 가냘프게 내려온 선(線)의 흐름 속에서 모잽이
칼을 친 분명한 변화들이 찻사발이 내면에 품고 있는 유현(幽玄)의 아름다움과 교감하고 있다. 
- 글쓴이 조국영 도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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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고 차인 사용했던 나가츠카나눔굽찻사발 유명 - 경남매일

고려(高麗) 말과 조선(朝鮮)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발들이 찻자리에 수용되면서 고려찻사발(高麗茶碗)이라고 부르게 됐다. 이 사발들을 일본의 다인(茶人)들이 개인이나 차회(茶會)에서 사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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