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광(晴狂) 윤광조 尹光照, 1946-Yoon Kwangcho | 급월당 汲月堂
한국의 전통적인 분청사기를 Free style의 현대풍으로 새롭게 분청사기를 만드는 작가이다.
1946 함경남도 함흥 출생
1973 홍익대학교 미대 공예학부 도예과 졸업
<개인전>
1976 신세계 미술관 (서울)
1978 현대화랑 (서울)
1979 통인화랑 (생활용기전, 서울)
1980 통인화랑 (서울)
1981 남경화랑 (광주)
1984 예화랑 (서울) / 맥향화랑 (대구)
1986 한국미술관 (서울) / 크래프트 센타 갤러리 (일본, 교토)
1987 현대화랑 (서울)
1989 리빙아츠 (생활용기전, 서울)
1991 선화랑 (서울) / 지니스화랑 (부산) / 맥쿼리 갤러리 (시드니, 호주)
1992 누사 갤러리 (트윈틴, 호주) / 지니스화랑 (생활용기전, 부산)
1996 리빙아츠 (생활용기전, 서울)
1997 다도화랑 (서울)
1998 갤러리 삼성플라자 (경기도 분당) / 미사화랑 (서울)
1999 가나아트센타 (서울)
2000 수가화랑 (부산) / 다도화랑 (서울)
<그룹전>
1973 구주현대공예미술전 (가라쯔, 일본)
1974 제1회 공예가 초대전 (미술회관, 서울)
1974-1979 공예동우회전 (신문회관, 서울)
1975 광복 30주년기념 한국현대공예대전 (국립현대미술관,서울)
제2회 전국 공예가 초대전(미술회관,서울)
1977 신춘초대전 (현대화랑, 서울) / 도작가전 (미도파미술관,서울)
1978 장욱진, 윤광조 합작전 (현대화랑, 서울) / 한국현대도예전(국립현대미술관,서울)
1982 제1회 한국미술대상 초대작가전 (국립현대미술관,서울)
한.미 수교 100주년기념 한국현대도예전 (로스엔젤레스 문화원, 뉴욕)
오늘의 도예작가 3인전 (예화랑,서울)
1983 한.독, 한.영 수교100주년기념 한국현대도예전 (퀄른, 런던)
인도정부초청 한국현대도예전 (뉴델리, 폼베이,마두라스)
1984 한국미술대상 초대작가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홍익현대미술전 (홍대박물관, 서울)
제13회 주니찌 국제도예전 (나고야,일본)
1986 3인의 작업전 (신세계미술관,서울)
한국현대미술의 어제와오늘전 (국립현대미술관,서울)
1988 NCECA 88 (포틀랜드,미국) / 오늘의 분청작가 3인전 (토갤러리, 서울)
1989 현대미술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서울)
1990 동방과 북구 만남전(포시오,핀랜드) / 예술의전당 개관기념전 (예술의전당, 서울)
1992 `92 청담미술제 (샘터화랑,서울) /제2회 진로 도예 지명전(예술의전당,서울)
현대분청 2인전(다도화랑,서울)
1993 `93서울공예대전 (시립미술관,서울)
1994 한국의 미, 그 현대적 변용전(호암갤러리,서울)
1996 제1회 아시아 공예전 (후쿠오카, 일본)
1997 제7회 트리엔날레 “형태와 내용” 전 (프랑크푸르트, 독일)
1998 제6회 호주현대미술 아트폐어 (멜본,호주) / 한국 도공의 정신 전 (성곡미술관, 서울)
“우리들의 도예 즐김” (토아트 스폐이스, 서울)
1999 “우리다운 도예” (토아트, 서울)
2000 "International Infusion" (미시건, 미국)
2001 “책의 香과 氣” 전 (아트사이드, 서울) / NICAF2001 (도쿄, 일본)
<소장처>
1. 국립 현대 미술관 (서울)
2. 호암 미술관 (서울)
3. 워커힐 미술관 (서울)
4. 영은 미술관 (경기도 광주)
5. 대영박물관 (런던, 영국)
6. 빅토리아 국립 미술관 (켐버러, 호주)
7. 퀸스랜드 미술관 (퀸스랜드, 호주)
8. NSW 미술관 (시드니, 호주)
9. 마리몽 로얄 미술관 (브루셀, 벨기에)
10. LA 한국 문화원 (LA, 미국)
11. 국립 자연사 박물관 (워싱턴, 미국)
<경력>
1974 한국문화 공보부 추천 일본 당진 유학
1988 NCECA 88 Portland 참가 (미국)
1990 POTTA 1990 POSIO 참가 (핀란드)
1991 호주의 마나크, 시드니, 켐버러 대학에서 특강
1995 제5회 국제 도예 캠프 참가 (중국)
1996 제6회 국제 도예 캠프 참가 (일본)
<수상>
1973 제7회 동아 공예대전 대상 수상
1979 제4회 공간 도예대전 우수상 수상
윤광조는 1946년 함흥에서 출생한 후, 홍익대 공예학과를 졸업했다.
1974년 한국문화공보부 추천으로 일본 당진으로 유학 갔으나 일본의 기교적인 도예에 회의를
느끼고 돌아와 오히려 자연스럽고 소박하며 자유분방한 분청사기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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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윤광조의 분청은 전통적인 분청에서 보는 물고기 문양이나 일반적인 장식을 보기 힘들다.
물레를 쓰지않고 free form으로 만들기 때문에 기형도 전통적인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도이다.
윤광조의 작품은 소박하나 거친 한국의 산세를 닮아있고, 이성적이기보다 직관적인 민족성,
따스한 정과 동질감을 중시하는 한국인의 심성이 느껴진다.
표면에 나뭇가지, 지푸라기, 산, 강, 달, 바람을 품은 추상적 이미지를 넣거나 반야심경 등을
적어 넣기도 하는 그의 분청사기는 한국의 자연이 그렇듯 건강하고 순후한 아름다움으로
빛을 발한다.
어설퍼 보이는 불완전함 속에 전통문화의 유전자에 녹아 있는 조형적 미감과 기가 살아
숨 쉬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평한다. [미주한국일보 2010.08.11]
윤광조는 80년대 부터는 물레를 이용하지 않고 전통에서 벗어난 현대적 변형에 초점을 맞춘,
표현주의적인 요소가 극대화된 분청사기 작업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작업실을 경주시 안강 깊은 산중, 바람이 많이 불어 '바람골'이라 불리는 곳에서
설치하고 작업에 전념한다.
1946년 함경 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윤광조가 도자기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미국에 있는
셋째 형님의 권유에서 였다.
8.15 해방 후 미군 정청의 고위직 관리를 지낸 아버지를 6.25 때 여의고 6세 때부터 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윤광조는 어려서부터 자유롭고 낙천적인 성격으로 애당초의 꿈은 해군이나
마도로스가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꿈은 해군사관학교 낙방과 함께 좌절되었고, 이듬해 어머니의 권유로 연세대 경제학과에
응시했으나 다시 고배를 들어야 했다.
그의 어머니는 대한 부인회 초대 조직 부장을 지내는 등 정치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했는데,
아들도 역시 정치하기를 원했고 그러한 일환으로 경제학을 권유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유 분방하고 창의적인 기질을 갖고 있는 그에게 정치나 경제학은
어울리지 않았던 것 같다.
고민과 방황 속에서 그에게 적절한 조언을 해준 사람은 그의 식구 중 유일한 상담 자였던
셋째 형님이었다.
그는 미국인들이 한국에 대해 묻는 말에 답변하기 위해 우리 문화를 공부했는데, 한국의
도자기에서 예술의 진가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만들기를 좋아하고 재주가 뛰어났던 동생에게 도자기를 추천하였고,
이에 윤광조는 집안의 반대를 가출로 대응하면서,1965년 홍익대 도예과에 입학하였다.
대학에 들어간 후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은 한때 연극에 몰두하여 두 편의 주연을 맡았을
정도여서 도자와 연극 사이의 선택을 놓고 갈등을 겪기도 했다.
연극은 좋아했지만 개성이 강한 그는 단원들과 함께 몰려다녀야만 하는 집단 생활이 싫어
군에 자원을 한다.
군 생활동안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근무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에게 대단한 행운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도자사에 대한 공부도 할 수 있었고, 분청에 대한 심오한 매력을 느끼게 되어
오늘날까지 분청 작업을 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 당시 수시로 드나들었던 중앙박물관에서 우리 나라 도자 예술에 선각자 역할을
하였으며,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 선생을 만나게 되는데, 최순우 선생은 오늘날까지
그가 분청 작업을 흔들림 없이 지속하게 하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가 우리 것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작업의 방향을 잡는데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1974년
문화공보부 추천으로 일본으로 도예 수업을 위한 유학을 갔을 때였다.
당초 목적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붙들려 간 한국 도공들의 자취를 알아보고, 그 곳의 개인
공방에서 일년쯤 수업하면서 그들의 실태와 가마 운영법 및 작업하는 태도를
견학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그 곳에서 석사 과정을 밟으면서 나름대로의 방향을 잡아 볼까 하고,
3년 예정으로 갔으나 1년도 채 못되어 돌아 왔다.
그 곳에서 작업하는 일본, 독일, 프랑스, 미국의 도공의 작품을 보면서, 그들이 만들어 내는
도자들이 한결같이 일본화되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진정한 자유로움을 얻기 위해서는 아마추어가 아닌 철저히 프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집단적이고 권력적인 힘에 의해 지배되는 현실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연과의
만남 속에서 자율적인 정신과 여유를 확보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이 때부터 작가는 도자에 대한 내적 탐구의 깊이를 더해 갔다.
특히 분청 예술이 불교의 종파인 선종과의 관계가 있음을 깨닫고, 무념 무상의 자율성을 자신의
도예와 결합시키려 하였다.
선종은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교종에 대립하여 스스로 사색하여 진리에 도달하려는 불교의 한
종파인데, 이러한 자유로운 선종의 정신을 형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그는 참선하고 차를
달이면서 작업을 한다.
1980년대 후반 그의 작업은 큰 변모를 겪게 된다. 그 동안 즐겨 사용하던 물레에서 벗어나
석고틀 작업이나 판작업 그리고 코일링 작업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이 이유를 물으니 물레를 너무 능숙하게 다루다 보니 물레를 다루는 기술이 예술을 앞지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어 물레를 던져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곧 석고 틀에 의한 조형의 한계성을 깨닫고 석고틀 작업은 지금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1991년 4년만에 가진 개인전에서는 다양하고 자유스런 형태들이 등장했다.
아무렇게나 빚은 듯한 자연스런 형태가 오히려 편안함을 주고 있는 작품들이다.
또한 넓적하고 길쭉한 그릇 표면에 지푸라기나 나무 조각, 손가락 등을 이용해 나무, 풀, 바람 등
자연의 추상적 이미지를 속도감 있고, 즉흥적으로 긁어냄으로써 기형과의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있기도 하다.
윤광조의 도자 예술의 특징은 전통 도자를 현대적으로 변형을 시도하고 있으면서도 도자가 갖는
고유한 속성인 실용성과 기능성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우리 도자계의 분위기는 실용의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나 순수 미술로 전환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그는 이에 동요하지 않고, 그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생활 용기전을 열었다.
여기에 출품된 작품들은 모두 어떤 특별한 용도를 갖고 있기보다는 여러 용도에 사용할 수
있도록 여유와 넉넉함을 갖고 있다.
여유있어 보이는 접시들, 그리고 무엇을 담아도 좋을 넉넉한 모습과 손에 쥐기 알맞은 바리들,
빈 벽면이나 서가 모퉁이에 걸거나 놓을 수 있는 꽃병들, 그 외 다른 형태들도 대부분이
자연을 닮아 여유로워 보인다.
그러한 이유의 근본 원인은 존중과 배려이다.
최근의 오브제 작품들도 삼각형 모양의 빈 공간을 두어 언제든지 실용적인 용기로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한편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도벽 작업은 그간의 입체 작업을 평면으로 연장시킨 것으로써,
우리 전통의 조각보나 꽃담에서 힌트를 얻고 있다.
언뜻 몬드리안의 구성 작업을 연상케 하는 이 도벽은 18가지의 다양한 흙과 산화불, 환원불,
중성불, 혼합불 등을 사용하여 흙과 오는 원초적인 질감과 다양한 자연색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검정색 유약으로 악센트를주고 자연스런 손자국을 무작위로 표현함으로써 한국적인
공간미를 연출하고 있다.
윤광조의 예술이 갖는 의미는 작품 활동과 생활을 분리시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생활속에서 느낀 감정이나 깨달음을 그대로 자연스럽게 조형 언어로 이어가려는 것이다.
사고가 바뀌어야 생활이 바뀌고, 생활이 바뀌어야 작품이 바뀐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생활이 바뀌지 않고 작품을 변화시키려 할 때 작품은 부자연스럽고 단지 손의 기교에
그치고 만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발견한 위대한 스승은 자연이었다.
봄이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낙엽이 지는 대자연의 섭리, 형상은 언제나 다르지만 항상 일정한
법칙에 의해서 동일하게 움직이는 자연에서 그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것임을
터득하였으며, 또한 모든 아름다움은 자연스러움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윤광조에 있어 예술은 즉 대자연의 원리에 순응하고 융화함으로써 무심한 상태에
도달하고, 여기서 사심 없는 소박한 형태를 창조해 내는 것이다.
도자는 회화나 다른 미술 작품과는 달리, 한번 작업이 시작되면 흙이 말라 가는 과정에 따라
순차적으로 작업을 진행해야 하는 시간의 제약이 따른다.
또 실수나 결함이 곧바로 드러나지 않고 건조되는 과정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한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제작하는 동안 흙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흙의 따사로운 속성과 작가의 의지가. 타협점을
찾으며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작가의 재주와 주장만으로는 결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으며, 반드시 자연에의
순응과 타협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그래야만 자연의 일부처럼 느껴지고, 보면 볼수록 친근감이 느껴지는 자연스런 형태가
탄생되는 것이다.
자연을 인간에 대립하는 관계로 바라보며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서구와는 달리 한국인들은
예로부터 자연과 인간을 구별하지 않고, 그 속에서 동화되기를 염원하며, 자연에 순응하려는
심리가 저변에 깔려 있었다.
그래서 과도한 장식이나 세련된 묘사보다는 마음을 중시하고, 전체적인 통일감이나 생동감을
위하여 세부 표현이나 기술적 완벽성을 희생시켰었다.
이러한 한국인의 선천적 체질이 도자 예술이 요구하는 속성과 일치하여, 과거에 우리는
세계속의 도자 문화를 꽃 피울 수 있는 원인이 되었으며, 윤광조 역시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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