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 이야기

백자대호 白磁 大壺

썬필이 2019. 8. 18. 20:07

백자대호 白磁 大壺 18세기 높이41cm : 2003년 4월10일 서울옥션 제70회미술품경매, 3억6천만원 낙찰

잘 생긴 백자 달 항아리입니다. 크기도 늠름할 뿐 아니라 색도 곱습니다.

금사리 달 항아리의 전형이라 할 만합니다.

달 항아리의 경우는 45cm을 넘어야 물건, 즉 대작(大作)으로 쳐줍니다.

시장에서 그렇다는 말인데 이 항아리는 그 기준에 비춘다면 조금 못 미치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이 점만 빼고 보면 나무랄 데가 없는 금사리 전성기의 특징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금사리(金沙里)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걸쳐 분원 가마가 있던 곳으로 퇴촌면에서 경안천으로 끼고

분원리로 가는 길 우측 골짜기 일대를 말합니다.

현장을 조사했던 정양모 전 관장에 의하면 가마터는 마을 주변의 구릉에 흩어져 있지만 현재는 대부분 밭으로

개간돼 사용되고 있으며 현재까지 이곳에서 9개의 가마터가 발견됐다고 합니다. 
금사리 달 항아리의 특징은 백자의 색이 은은하고 깊어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구연부 (口緣部)가 낮습니다.

그에 더해 입 주둥이가 위로 똑바로 뻗어있는 것이 아니라 く형으로 꺾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특징입니다.

또 몸체를 받치고 있는 굽의 폭이 구연부의 폭보다 좁은 것도 특징입니다.

이렇게 되면 작은 대 위에 커다란 몸체가 올려있는, 이른바 긴장된 힘의 균형을 느끼게 됩니다.    
형태에 있어서 완전한 좌우대칭이 아닌 점도 중요한 특징입니다.

더욱이 이런 비균제적(非均齊的) 성격은 달 항아리를 달 항아리이게끔 해주는 최대의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면 볼수록 푸근하다든가 여유롭다는 느낌은 바로 살짝 일그러진듯한 조형에서 나오는 안심감이나

여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은은해 보이는 색감이나 이 비균제성은 모두 흙에서 시작됩니다. 금사리 백자에 잘 생긴 달 항아리가 많은 것도

그 흙 때문입니다.

즉 금사리 가마에서 쓴 백토에는 다른 것에 비해 모래가 많이 섞였다는 것이 이 선생의 말입니다.
가마 속에서 흙이 익어 도자기로 바뀔 때 이 모래 성분이 녹으면서 심(芯)을 이루는 지지대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콘크리트 건물에 철근이 시멘트 사이에 들어가 골조를 이룬다는 비유입니다.

실제로 입자가 고운 흙만 가지고 달 항아리처럼 덩치가 큰 형태를 만들면 무게를 이겨내는 힘이 없어 불

속에서 주저앉고 맙니다.
금사리에서 백자 달 항아리를 만들다가 실패해 깨부순 도자기 파편을 봐도 모두 기벽(器壁)이 무척 두텁다고

이 선생은 덧붙입니다.

이 역시 모래가 섞인 흙이어서 고운 백토에 비해 상대적으로 얇게 빗을 수 없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기벽이 두꺼운 것 자체는 도자기 스스로에게  안정감이나 무게감을 지니게 해주게 됩니다. 
이런 순백의 달 항아리가 조선시대 후기의 생활 현장에서 ‘어떤 용도로 쓰였나’ 라는 물음에 대해 단순히

곡식 종자를 넣어두는 것 이상일 것이라고 이 선생은 추정합니다.

그보다는 ‘당시 고급 식재료였던 밀가루 등을 넣어두는 용기가 아니었을까’ 라는 것입니다.
밀가루든 곡식 종자이든 크고 듬직한 항아리를 아무런 문양 없이 그래도 둔 이른바 무지(無地)나

무문(無紋)의 항아리는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습니다.

있다면 극히 제한적 용도가 있는 제기(祭器) 뿐입니다.
문양사를 전공하는 쪽에서도 인간이 애초가 가진 공간에 대한 공포증에서부터 문양이 들어가기

시작됐다고 말합니다.

그에 비하면 수십 센티미터나 되는 우람한 항아리에 선 하나 긋지 않고 그대로 두고 쓰는 예는 극히 예외중의

예외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도자기의 한 특징에 바로 이 공간 공포증까지도 괘의치 않는 대범함이랄까 무심함 같은 것이

포함돼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 스마트 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