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 대호 白磁 大壺 18세기전반 높이38cm : 2006년 2월23일 서울옥션 제100회미술품경매, 6억원 낙찰
조선시대 도자기에 글자가 적혀 있는 것이 간혹 있습니다.
전기에는 대부분이 분청사기에 보이며 후기가 되면 19세기 이후 분원산 청화백자에 주로 보입니다.
물론 시대가 더 내려와황해도 봉산 일대에서 만든 이른바 해주가마 도자기에도 글귀가 보입니다.
그런데 조선 전기와 후기에 보이는 글자는 그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분청사기의 글귀는 대부분이 관서명(官署名)입니다.
장흥고(長興庫, 궁중물품 관리조달 부서)를 비롯해 인수부(仁壽府, 세자를 위한 부서),
인녕부(仁寧府, 왕비를 위한 부서), 내자시(內資寺, 왕실 물자관리 부서, ),
내섬시(內贍寺, 관청 및 신하에 소용되는 물품관리 부서) 등의 이름이 보입니다.
반면 후기의 청화백자에 적힌 글귀는 시구이거나 아니면 부귀장수(富貴長壽)처럼 길상적인
사자성어(四字成語)입니다. 이는 해주가마 도자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잘 생긴 백자 항아리에는 전기의 전통을 이어받은 듯 ‘연령군것쥬방’이라는 글자가 굽 바로 위쪽의
몸통에 보입니다.
적어 넣은 것이 아니라 바늘로 꼭꼭 누른 듯이 새겨져 있습니다.
연령군(延齡君)의 이름은 이훤(李昍 1699-1719)으로 숙종의 여섯 번째 아들이며 영조의 배다른 동생입니다.
모친인 명빈 박씨가 일찍 죽자 5살때인 1703년에 군에 봉해지고 1707년에 결혼할 때까지 궁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니까 이 항아리는 1703년에서 1707년 사이, 즉 18세기 막 들어서서 만들어져 궁에 공납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항아리는 앞서 소개한 길쭉한 항아리와 달리 아주 동그랗습니다.
그래서 흔히 달 항아리라고 불리는데 이 항아리는 17세기 후반에 출현해 18세기 전반기까지만 제작됐습니다.
이를 고려하면 이 항아리는 달 항아리 시대의 한 가운데 무렵에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것에 비유하면 보름달에서 살짝 며칠 지난 무렵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정기의 좋은 장점을 고루 갖췄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게 됩니다.
달 항아리에 대한 찬사는 도자기 학자라면 누구나 거쳐야하는 수사학 테스트 같은 것이 됐는데
최순우 전국립중앙박물관은 ‘의젓한 곡선미’ ‘어리숭하게 생긴 둥근 맛’ 등의 말로 표현했습니다.
최 전관장은 퇴고에 퇴고를 거듭해 글을 쓰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어리숭하다’는 말은 ‘어리숙하다’는 말과 전혀 달리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아니한 것 같기도 하여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달 항아리란 보는 때, 각도, 시간에 따라 천의 얼굴, 만의 표정을 지어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골라 쓴 듯 보입니다.
정양모 전관장도 달 항아리에 대해 ‘유유자적한 큰 도량’ ‘너그럽고 넉넉한 큰 멋’으로 자못 인격으로 승화된
표현을 했습니다.
아무튼 이 항아리는 달 항아리가 만들어진 100년 조금 안 되는 역사 속에서 정점 무렵을 지날 때 만들어진
뜻 깊은 항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참고로 분청사기를 포함해 이 항아리에서처럼 글자를 적는 일은 멀리 태종, 세종 때부터 시작됐습니다.
태종 때인 1417년의『태종실록』에는 장흥고에 바치는 사기에는‘장흥고’라는 이름을 새겨 공납케 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또 세종 때에는 도자기의 품질 향상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만든 도공 이름을 쓰게 한 이른바
생산자 실명제까지도 잠시 실시했다는 내용이 1421년의 실록 기록에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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