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도예가

토우(土偶) 김종희 金鐘禧 - 강파도원(江波陶苑)

썬필이 2018. 12. 17. 18:31

토우土偶 김종희 金鐘禧 (1921 ~ 2000)
대구에서 출생하여 김해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13세때인 1933년 일본으로 갔으나 가난 때문에 
학교를 포기하고 오오사까 근교의 다지미에 있는 기후 현립 도자기연구소에서 도자기 
수습공으로 취직한다 .
해방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오기까지 아이치현 세토지방의 도자기 공장에서 일하였다.
귀국한 토우는 48년에 가야산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당시 가야산일대는 백자를 만드는 고령토 광산이 있었고 일제때에는 일본인들이 이곳의 태토를
일본으로 가져가기도 하였다.
토우가 도자기를 구우면서 차와 다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시 해인사 주지로 있던 효당 
최범술과의 만남에서부터였다.
토우는 5인다기를만들고 중국과 일본에는 없는 뜨거운 물식힘 그릇인 숙우를 처음 만들어 
사용한 주인공이며 이후 많은 차인들과 수행승들이 5인다기와 숙우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찻주전자를 보면 다기가 깨지지 않도록 태토를 두껍게 하거나 찻물이 잘나오도록 구멍을 
크게 내고 주둥이를 붕어 입처럼 만들어 놓아 매우 실용적이면서 반면에 기교가 없는 투박한 
무색의 순수함을 갖추고 있다.
금당 최규옹선생은 토우가 " 좋은 도자기일수록 오동지(五冬至, 음력5월과 동짓달) 삼동에 
만들어야 한다며 그는 이미 완전건조시기의 시점까지 세심하게 고려한 도공이었다"고 말한다.
토우는 학문적으로는 혜암 큰스님과 일지암의 여연스님과 친했고 일타스님의 제자로 걸망안에 
한 봉지의 차와 찻잔을 늘 갖고 다녔다는 도범스님과 무등산 춘설현의 의재 허백련 화백과의 
교류도 두터웠다.
그리고 이들의 대부분은 토우의 다기를 사용했다.
토우는 대구에서 도자기 전시를 많이 하고 계명대와 대구 카톨릭대, 영남대에서 강의를 하며 
대구 차인들과 교류가 많아지자 운명하기 직전까지 그들과 함께 해인사 주변에서 
차밭을 운영하기도했다.
장남(강파江波 김일金一)과 그의 아들(김은 金垠) 또한 사기장이 되어 3대째 가야산에서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강파도예 :경남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로 1289 / 055-932-9998

1946년  귀국 고향부근의 해인사 입구 구원리에 도자기 공장을 세워 운영
1950년  이후 몇 년 동안 해인사 주지 효당 최범술스님으로부터 차그릇 만들기를 권유 받음
           효당, 성철스님이 주문하는 승복색의 다기 만듬
           고려도기사, 금성도기사등 공장다시 설립 운영
1972년  대구 계명대, 영남대, 효성여대등에 출강
1975년  10년간 계명전문대학 교수 재직. 그 무렵 경북 및 대구광역시 미술대전 초대작가로 
           심사위원 역임
1973년  76, 81년 도예 개인전
1990년  삼부자 도예전
1993년  도예창작 60년 기념전

생전 토우 김종희 선생님의 작업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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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흑유다완
다관
숙우
330cc
대형사발 입전 32.0 높이 20.0 굽지름 12.0cm
청화백자명 95 - 480 -480
청화백자호 400- 340 - 340
정호다완
5인 다기세트
3인 다기세트다관 300cc 출처 차와사람
2인 다기세트 다관 120cc 출처 차와사람
5인 다구세트
다기세트 다관 330cc 숙우 330cc 잔 80cc
1970년 작
5인다기세트
5인다기세트

 

- 강파 김일

김일 作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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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보기

3인 다기세트

'도예 인생 47년' 합천 김일 씨 - "남은 세월도 흙과 함께 살리라" - 경남도민일보 : 2008.08.18
김일 선생은 도예가 토우 김종희 선생의 장남으로 태어나 10대 때부터 부친을 도와 도예가의 
길을 걸어왔다. 강파도원은 김 선생과 부친이 설립 운영하고 있는 도자기를 굽는 가마이다.
강파도원이 합천 가야산 기슭에 자리 잡게 된 동기는 당시 전기가 부족한 것을 물레방아가
 대신할 수 있었고, 가야산 기슭이 도자기의 주 원료인 고령토가 생산되는 광산이 있었으며 
또한 가마에 필수 요건인 땔감이 풍부해 도자기 작품을 만드는데 필요한 3가지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에 학업포기 사기장 입문 아버지 김종희 선생이 스승
김일 선생은 아버지이자 스승인 김종희 선생의 가르침을 토대로 그만의 독특한 사상과 기술을 
접목한 다기 및 다완 항아리 등의 백자, 분청, 진사 작품들을 만들고 있다.
김해에서 태어나 2살 때 아버지를 따라  합천 가야산 기슭에 있는 지금의 강파도원으로 이사 온 
김 선생은 중학교 3학년 무렵 가난 때문에 학교를 포기하고 부친과 함께 
도자기 만들기를 시작했다.
평생 흙과 함께 살아온 김 선생은 아버지에 이어 그의 아들 또한 사기장이 되고자 현재 홍익대 
대학원에서 도예 공부를 하고 있다.
사실 김 선생은 이미 고인이 된 아버지 토우 김종희 선생에게 가려져 빛을 발하지 못했다.
"비석을 세우지 말고 봉분도 하지 마라, 세월이 지나 소나 말이 지나가도록 하여라."
어느 유명한 고승이 남긴 유언이 아니다. 토우 김종희 선생이 남긴 말이다.
무엇을 이뤄보겠다는 인간적 욕망을 넘어 평생 흙과 하나 되는 자연 일부가 되는 생활을 하면서 
삶의 진리를 터득한 토우 선생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간을 앞두고 남긴 말이다.
토우의 인간적 면모와 그의 도예작품에 담긴 예술혼이 어떤 것인가를 엿볼 수 있는 
유언이라 할 수 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할까? 김 선생 작품에는 여유와 허허로움이 풍긴다.
화려하지도 않고 아무런 꾸밈도 없이 조선 백자 정신이 살아 숨 쉬는 것 같다.
기교 없는 순수함과 여유 도자기에 솔솔 배어 나와
김 선생이 도자기를 구우면서 차와 다기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아버지가 작품활동을 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면서부터다.
그의 아버지 토우는 5인 다기를 만들고 중국과 일본에는 없는 뜨거운 물식힘 그릇인 숙우를 처음 
만들어 사용한 주인공이며 이후 많은 차인들과 수행승이 5인 다기와 숙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일 선생이 만든 찻주전자를 보면 다기가 깨지지 않도록 대토를 두껍게 하거나 찻물이 잘 
나오도록 구멍을 크게 내고 주둥이를 붕어 입처럼 만들어 매우 실용적이면서 반면에 
기교가 없는 투박한 무색의 순수함을 갖추고 있다.
3대째 가업을 이어 가는 강파도원에는 김 선생이 시대에 따라 다양한 쓰임새와 미적 감각을 
담아온 도자기 작품들로 가득하다.
김 선생은 대구 계명대학교가 토우 김종희 선생과 김일, 김주일 선생을 초청해 개최한 3부자 
도예전과  대구문화예술회관이 주최한 전통 도예가 초대전에 출품한 몇 번의 기회를 제외하고는 
도예단체 가입이나 출품을 극히 자제해 왔다.
그러나 김 선생은 회갑연이 되는 지난 2006년 대구 수련갤러리 개관 기념 초대전을 60평생에
첫 번째 도예전을 열었다.
2년 전 60평생 첫 도예전 부친 작품 전시장 설립 꿈
김 선생은 우리에게 약간은 생소한 작가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될 매우 
탁월한 도예가라고 주위 사람은 말한다.
실제로 김 선생은 지금까지 작품보다는 생활에 즐겨 사용하는 도자기를 만들다 보니 작품제작에
몰두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자기만의 도자기를 만들고자 흙에 심취해 있다.
그는 좋은 물건을 만들려면 도자기 만드는 제작과정도 중요하지만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도
돼야 하고 때론 글을 쓰는 서예가도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선생은 현재 여러 군데 전시된 토우 김종희 선생의 유작을 한군데 모아 전시장을 만드는 것이 
꿈이며 두 자식의 공부가 끝나는 2년 후면 작품에만 전념해 가족 전 등을 가질 계획도 세우고 있다.
평생을 흙과 함께 했다고 강조하는 김 선생, 그의 도자기에는 인간의 지혜와 생활양식, 아름다움,
도예가의 예술혼이 가득 담겨 있다.